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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
엘리자베스 1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을 하긴 해야 하는데.’
36살이나 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싱글이었다. 법적으로는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처녀. 잉글랜드의 여왕이기 때문에 혼처를 구할 땐 먼저 정치적인 면을 고려해야 했다.
사랑 따윈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적당한 혼처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
펠리페 2세에 이어 펠리페 2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카를 2세까지 청혼을 해왔었다. 카를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1세와 황후 안나의 셋째 아들이었다. 합스부르크의 구혼은 끈질겼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확실히 거절했다.
아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메리 1세의 통치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았다. 만약 또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혼한다면 성공회를 비롯한 신교 세력이 엘리자베스 1세에 반기를 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거절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해버렸다.
‘적당한 사람이 없으니.’
여왕이기 때문에 힘들었다. 아무하고나 결혼할 순 없었다. 잘못하면 잉글랜드가 몰락할 테니까. 혹은 여왕인 자신은 꼭두각시의 삶을 살게 될 터.
어린 시절 홀대 받으며 자라 겨우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다.
‘줄 수 없어. 이건 내 꺼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신하들은 새로운 혼처를 찾는다며 분주히 움직였다. 그것을 보며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힘을 더욱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이 힘이 있으려면 부를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이것을 잘 이해하는 엘리자베스 1세는 모직물 공업을 장려했다. 모직물 생산을 늘리기 위해선 양을 늘려야 했고 양을 늘리려면 목초지를 늘려야 했다. 그 결과 인클로저가 일어났다. 토지를 잃고 일할 곳이 없어진 농민들은 떠돌기 시작했다.
“치안이 여전히 어렵습니다.”
“사략선을 더욱 늘리도록.”
엘리자베스 1세의 복지 정책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교화소를 두어 노동 의욕이 없는 이들을 강제노역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꺼려하는 험난한 일에 동원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략선을 타는 해적이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교화소에서 넘어온 해적들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이제 한 배를 타게 되었다. 난 너희들을 혹독하게 대할 생각이 없다. 내 명령을 따르기만 한다면 앞으로 얻게 될 보물을 공정하게 배분할 것이다. 하지만!”
배에 탄 해적들은 드레이크를 보며 침을 삼켰다.
“만약 날 배신하려는 놈들이 있다면 상어밥으로 던져주겠다. 자! 그럼 일을 시작하자!”
잉글랜드가 강력한 에스파냐에 저항하기 위한 작전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사략이었다. 에스파냐는 전쟁을 많이 했다. 그러나 생필품을 사들이는 국가이기도 했다. 지출은 엄청난데 생산력 자체는 그리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492년 발표한 알람브라 칙령의 결과였다. 알람브라 칙령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몇 개월 되지도 않는 시간 안에 에스파냐를 떠나야만 했다.
부동산과 같은 것은 빠른 시간 안에 처분할 수 없는 재산. 유대인들은 부동산을 비롯한 팔기 힘든 재산들은 처분하지도 못하고 얼마 안 되는 재산만 가지고 에스파냐를 떠나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재산을 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에스파냐인들은 일순 돈이 많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유대인이 떠나며 에스파냐의 경제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경제의 한축을 담당하던 이들이 떠나며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돌파한 방법은 바로 아메리카, 신대륙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은으로 대체했다.
에스파냐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는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해적들이 에스파냐 선박을 약탈해 은을 빼앗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해를 입힐 수 있으니 사략해적을 대대적으로 허가했다. 살 곳을 잃은 농민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그렇게 바다로 내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드레이크를 따르는 이들을 비롯해 많은 해적들은 보물로 가득한 에스파냐 선박을 노려 인생 역전을 노렸다.
더구나 성공회를 믿는 이들은 에스파냐 선박을 공격하는 행위가 애국행위라고 믿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과 싸우는 에스파냐를 응원해야 하지만 최근 들어 부는 신교 열풍은 에스파냐를 편들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인도에 가서 누굴 털지? 신국의 배는 털기 힘들 텐데.’
해적으로 들어온 부하들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며 드레이크는 고민에 빠졌다. 에스파냐를 더욱 곤란에 처하기 위해선 더 강한 선박이 필요했다. 그리고 더 강한 선박을 얻기 위해선 돈이 있어야 했다.
‘차라리 신국과 거래를 할까?’
드레이크의 고민은 항해를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유럽에서 한참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는 와중에 결국 1570년이 되었다.
신유성은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는 산책을 시작했다.
겨울이라 몹시 추웠으나 오리털 옷을 입은 터라 오히려 더울 지경이었다. 겨울이 되면 새털을 잔뜩 넣어 만든 방한복은 인기를 얻었다. 특히 북쪽에 사는 이들에겐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기도 했다.
‘의회를 열기까지 앞으로 1년 정도만 있으면 되나?’
의회를 열고자 했으나 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지금도 신국은 숨 가쁘게 확장 중이었다.
시의회를 시범적으로 연 이후, 수많은 이들이 재산을 털어 개척에 나섰다. 호주는 물론 뉴기니섬과 인근 섬들로 사람들은 뻗어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때로는 서로 다투기도 해서 이를 중재하기 위한 기관도 신설해야만 했다.
임시로 만든 기관의 이름은 개척진흥청이었다.
이들에게는 개척지에서의 법률문제까지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한 마디로 개척지에서는 개척진흥청이 또 하나의 정부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신유성은 이 자리를 이에야스에게 맡겼다. 이제는 어느 정도 믿을 수 있고 또한 파벌 같은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현재 세력을 늘리고 있는 조선 출신만 중용하기가 껄끄럽다는 것도 한몫했다.
‘세계를 아우르려면 세계를 품어야 한다.’
이지번의 우려는 잘 알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들어줄 순 없는 일이었다. 신국을 구성하는 인구 중에 한반도 인구는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요직마다 전부 한반도 출신만 앉힌다면 분명 다른 마음을 품는 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중요한 자리는 골고루 나누는 것이었다.
균형을 찾아야만 했다.
“컹! 컹컹!”
개짓는 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신유성은 개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한 마리 삽살개가 헐떡이면서 앞에서 얼쩡거린다.
바로 옆에 느긋하게 있는 풍산개, 김백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
신유성은 옆에 있는 김백구를 바라보았다.
사람으로 치면 이제 노인이라고 해도 될 나이의 김백구는 만사가 귀찮은 눈빛이었다. 그래도 주인인 신유성이 산책을 하니 호위처럼 따라붙어 곁을 지켰다.
반면 삽살개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신유성의 앞에 와서 떠들고는 또 달려 나갔다. 파릇파릇한 삽살개의 젊음과 김백구의 느긋함은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둘 다 신유성의 개였다.
굳이 풍산개를 놔두고 삽살개를 들인 이유는 별 거 없었다. 그냥 다른 품종을 키워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삽살개는 워낙 흔한 품종이었기에 구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삽살개가 뛰어다니는 근처에는 조금 덩치가 작은 녀석들이 헥헥거리며 뛰었다. 풍산개인 김백구와 삽살개 사이에서 태어난 녀석들이었다.
‘잡종도 나쁘지 않아.’
신유성은 순혈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삽살개와 풍산개라는 정체성을 꼭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품종이 어떻든 모두 다 내 개일 뿐이지.’
신유성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하나, 주인을 잘 따르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즐겁게 뛰어노는 개들에게 상으로 간식을 던져준 신유성은 묵묵히 뛰노는 개들을 바라보았다.
산책에서 돌아온 신유성은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가정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바로 해군에 관련된 일이었다.
‘전열함.’
전열함은 2척이 또 만들어졌다. 신국이 전력을 기울인다면 1년에 10척까지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갤리온을 비롯한 다른 전함 생산을 포기해야 한다. 어선의 경우야 지방의 조선소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해군이 사용할 전함은 아무나 만들기는 어려웠다.
최고의 조선공들을 모아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신국의 대포는 금속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날이 갈수록 화력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화력을 고려해 전함은 다시 만들어져야만 했다. 해상에서의 우위를 점하려면 끊임없이 최신 기술을 적용해 발전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술 개발이 멈추고 기술 개발이 멈추면 연구를 하던 사람들과 기술자들은 백수가 된다.
백수가 된 이들은 결국 다른 일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해군의 기술력은 정체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정지.
그렇기에 규모를 계속 늘리는 것도 힘들지만 줄이는 것도 해선 안 될 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신유성은 무리하게 전열함 생산을 더 늘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규모가 커지고 좀 더 많은 숙련된 조선공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함대에 전열함이 한 척만 있어도 해전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다 위의 요새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군함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전열함 2척은 신대륙으로 보낸다.”
“네? 뭄바이가 아닙니까?”
신하 하나가 확인 차 다시 물었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시기라 혹시 자신이 잘못들은 것인가 싶어서였다.
“신대륙이다. 그곳의 해상 세력을 모두 밀어낸다.”
아메리카 북부 지역은 신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에서 지들끼리 마음대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강하지 못하면 존중받지 못한다.
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이 원래 신대륙의 주인이었으나 강하지 못했다. 약삭빠르지도 못했다. 자신들을 지킬 힘도 없었고 결집하지도 못했다.
외부에서의 충격에 그대로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쳐들어온 침략자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못했다. 그렇게 주인이 바뀌었다.
“남만인들을 신대륙에서 몰아내고 그 사이에 있는 바다를 전부 신국의 것으로 한다.”
바다는 넓었다. 지도를 바라보는 신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위치한 한반도가 세계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크기인지. 그런데 신유성은 그보다 수십배는 더 큰 바다를 가지겠다고 선언했다.
바다는 육지와 달리 쉴 곳도 별로 없다. 그야말로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곳.
그런 곳을 신국의 영역으로 만들겠다고 신유성은 선포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포부.
하지만 아무도 신유성의 결정에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바빠진 것은 후지바야시 켄이었다.
해군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켄은 새로 함대를 만들어 아메리카로 진출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후 신유성은 열심히 일했다. 많은 것을 위임했지만 신국이 커진 만큼 일은 더 늘어났다. 그 결과 신유성이 할 일은 오히려 더 늘어난 상태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어둠이 찾아왔다. 신유성은 홀로 처소에 들었다. 아내들이 모두 임신 상태이기 때문에 또 다시 독수공방을 하는 중이었다.
가끔 아버지 신겸혁이 찾아와 새로 후궁을 더 들이는 것이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자식이 20명이 넘어도 방심할 수 없었다. 특히 황제라면 자식을 더 많이 낳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주변의 권유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딱히 특정인물을 받아들이라 하지도 않고 주변의 궁녀라도 그냥 안으라고 할 정도였다.
신유성은 밤참으로 햄버거를 시켰다.
밤에 먹는 햄버거는 살로 가지만 많은 열량을 소모하는 신유성에겐 별 것 아니었다.
‘음, 슬슬 케첩이 들어간 햄버거가 먹고 싶다.’
하지만 신유성은 토마토를 아직 구하지 못했다. 사실 이 시기의 토마토는 유럽인들에게 냉대를 받고 있었다.
이유는 토마토가 맨드레이크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맨드레이크는 원래 악마의 사과로 알려져 있었다. 사탄의 사과 혹은 사랑의 사과라고도 알려졌으며 최음제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여기에 남아메리카가 에덴동산이고 토마토가 선악과라는 인식이 더해지니 냉대는 더 심해졌고 유럽인들은 토마토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배에 실릴 일도 별로 없었다.
사고팔질 않으니 신유성으로서는 직접 구하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도 공략 때문에 해군을 서쪽에 집중한 까닭에 아메리카 북부에서 더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이것이 신유성이 감자와 토마토를 아직도 구하지 못한 이유였다.
‘프렌치프라이. 포테이토칩. 구운 감자. 못생긴 감자. 스파게티. 피자.’
감자만 있다면 정말 다양한 먹을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토마토가 있다면 감칠맛을 더욱 살릴 수 있었다.
‘먹고 싶다.’
지금도 먹을 것은 많다. 그러나 기억 속에 들어있는 서민 음식은 신유성을 아직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황제가 되었지만 아직도 먹질 못하고 있으니 귀한 음식이라 할 수 있었다.
‘코코아! 커피! 초콜릿!’
남아메리카에는 정말 구할 것이 많았다. 이곳으로 진출해 작물만 가져오는데 성공하면 식량 문제를 해결하며 신국은 또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었다.
신유성에게 있어 남아메리카는 그야말로 보물 창고였다. 하지만 이러한 보물 창고를 먼저 발견한 에스파냐는 은이나 캐가고 있었다.
은을 엄청나게 캐갔다. 가치가 떨어질 정도로 캐가는 중이었다. 그래봐야 생산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스란히 다른 나라에 은을 가져다 바치고 있었지만.
감자를 먼저 발견하고도 악마의 작물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옥수수 정도만이 유럽에서 빈곤층의 작물로 재배되는 정도였다. 신유성이 포르투갈인은 물론 에스파냐인들도 남만인으로 묶어 적대하게 되어 교류가 끊겨서 옥수수도 아직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팝콘!’
팝콘을 떠올리자 영화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영화는 볼 수 없는 상태. 이 시대에선 잘 해봐야 연극이나 좀 볼 정도였다.
‘으으으음.’
미래의 기억은 여전히 신유성을 괴롭혔다.
신유성은 햄버거를 씹으며 눈을 빛냈다.
‘꼭 감자를 얻고 말겠다.’
감자칩에 대한 욕망은 뜨거웠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