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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
1570년이 되었으나 봄은 아직 오지 않은 시기.
맹렬한 추위가 시베리아를 비롯해 모스크바 일대를 강타했다. 랴잔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군과 신국 원정군 사이에 큰 규모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동안 소규모의 병사를 보내 기습을 감행한 정도였다. 양쪽 다 기습으로 인한 소득은 별로 없었다.
날씨가 양쪽의 발목을 잡았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눈만 오지 않았어도.’
노부나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이 오지 않았다면 전투를 더 빨리 치러 모두 끝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남쪽에서 올라올 이반 4세의 군대를 걱정해야 했다.
“이반의 군대는 어디까지 왔나?”
“전령이 보름 거리였다고 했으니 아마도 닷새 거리쯤 될 겁니다.”
전령이 소식을 가져온 시간을 감안해 거리를 계산하니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요새를 더욱 강화하도록.”
결국 남은 것은 전투를 치르기에 앞서 요새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요새가 없었으나 겨울 동안에 병사를 움직여 요새를 만들게 했다. 가만히 놔두면 혈기왕성한 병사들이 사고를 칠 수 있으니 일이라도 시킨 것이다.
또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보야르들이 불안해할 수 있기에 무엇인가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요새 건설은 이제 요새 보강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순신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며 병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목으로 넘어가며 목부터 뱃속까지 뜨거운 기운이 일어났다.
“후우.”
하얀 입김이 그대로 얼어버릴 것 같았다. 병을 옆으로 돌리자 신립이 받아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치겠습니다. 이게 뭔지. 겨울에 전쟁은 역시 미친 짓이라니까요.”
“저기 남쪽으로 내려가면 거긴 겨울에 여름이라더라.”
“하지만 여름에는 겨울이라던데요?”
“세상은 넓다.”
“신국이 넓은 거죠.”
라쟌에서 한양까지만 해도 한참 걸린다. 하지만 한양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나오는 신대륙도 결국 신국이 발을 디뎠다. 남쪽으로는 호주까지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이쯤해서 ‘내정을 다져야 합니다’라고 충신들이 떠들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영주자리에 눈이 돌아갔다.
내정이고 뭐고 땅을 개척해 영주가 되려는 생각을 안 가진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의 곁에 서 있는 신립마저도 공을 세워 영주가 되고 싶어 했다.
원정군의 말단 병사들도 영주가 되는 꿈을 꿀 정도였다.
신국은 영주 열풍에 휩쓸린 상태.
영주가 되어 기필고 의회의 의원이 되겠다는 욕망이 신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폐하는 무서운 분이시지.’
이순신은 열풍에 대해 생각하다가 신유성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욕망의 정점에 서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정의나 그런 것에 호소하지 않고도 신국은 무시무시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굶주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북해도 인근과 그 북쪽 바다에서 잡아들이는 고기들은 신국의 좋은 식량 자원이었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부근에서 잡히는 고기들도 있었다.
여기에 소금을 이용한 저장식품들이 늘어나며 겨울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좋은 나라야.’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고픈 이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순신은 많은 점수를 주었다.
더구나 군에 대한 지원은 최고였다.
몇몇 지휘관들은 싸울 맛이 난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 정도였다. 보급 잘 해주고 싸워서 이기면 수당 나오고 약탈도 인정해서 배당까지 해주니까.
전쟁 한 번 치러서 살아 돌아가면 지주가 되고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으면 영주가 된다는 소리까지 나돌 정도였다.
‘영주라.......’
이순신도 아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을 탐하지는 않지만 영주가 되어 한 표를 행사할 마음은 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영주 한 번 해볼까 하고.”
“하하, 당연히 하셔야지요. 그리고 저도 좀 잘 부탁합니다.”
“그래.”
두 사람은 술을 나눠 마시다 움직였다. 병사들의 상태를 살피고 요새를 점검하는 것이 일이었다.
한편, 알렉산드로는 부하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몇몇 아는 지인들을 만나 신국에 붙을 것을 요구했다.
“정말 목숨을 보장해주는 겁니까?”
“그래, 확실히 보장해준다. 내가 영주로 만들어준다니까 그래.”
신국에 붙으라는 이야기에 유력자들은 결국 알렉산드로에게 협력하기로 했다. 차르에게 충성하는 이들은 넘어올 리가 없기에 찾지 않고 오직 중립이거나 불만을 조금 가졌던 이들만을 찾았다.
알렉산드로는 뻔질나게 모스크바를 누볐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력을 확보하자 모스크바 경비군을 습격했다.
“신국의 군대가 지척이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알렉산드로는 자신에게 붙은 이들과 함께 모스크바 시민들을 선동했다. 그리고 경비군을 습격해 항복을 요구했다.
“뭐야? 신국이 여기까지 언제?”
“진압군이 당한 모양입니다!”
반란진압군, 니키타 로마노비치가 패배했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자 경비 대장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
결정은 빨랐다.
“항복하면 정말 살려주는 건가!”
“지금 항복한다면 아무 죄도 묻지 않겠다. 하지만 저항한다면 신국의 적으로 간주해 척살하겠다!”
혼란스러운 상황. 경비 대장은 신국에 대한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과거 키에프 공국을 멸망시킨 동방의 악마를 능가하는 군주가 바로 신국의 황제였다.
많은 이들은 입 밖에 함부로 내지 않았지만 차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항복하면 살 수 있다.’
이미 신국이 모스크바까지 왔다면 차르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경비 대장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는 이들을 순식간에 무장 해제 시키고 자신을 따르기로 했던 이들에게 모스크바 수비를 맡겼다.
단숨에 중요한 요직에 앉게 된 이들은 희희낙락했다.
모스크바를 순식간에 점령한 알렉산드로는 한시름 놓았다.
‘정말 위험했다.’
거의 도박과 같은 작전이었다. 일단 폭설을 뚫고 모스크바군에게 들키지 않고 모스크바에 입성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모스크바 인근에 도착한 뒤부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이반 4세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진 상황이라 모스크바 사람들 중에 반감을 품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편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력부대가 모두 빠져나가 방어가 허술한 모스크바를 꿀꺽한 것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서 군대가 온다면 고스란히 내줘야 할 정도로 허접한 전력이었다. 모스크바를 점령했다고 이것이 바뀌진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니키타는 곤란에 빠진다.’
모스크바에서 보급을 보내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노부나가가 바보가 아니라면 뒤로 빠지는 니키타를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알렉산드로는 안심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하지만 그냥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알렉산드로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까지 장악해 모든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는 이반 4세에게 충성하는 자들의 저택을 털었다. 그렇게 턴 재물은 자신을 따른 이들에게 배분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따른 모스크바 시민들에게도 뿌렸다.
돈맛을 본 모스크바 시민들은 알렉산드로에게 붙었다.
니키타 로마노비치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전령을 비롯한 그 어느 누구도 웃지 못했다. 전령은 비통한 표정을 지었고 니키타와 함께 소식을 들은 이들도 니키타와 같은 표정이었다.
모스크바의 함락.
믿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 그게 사실인가? 지금이라도 장난이라고 말하면 용서해주겠네.”
“죄송합니다. 사실입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니키타는 웃었다. 얼마 안 있으면 이반 4세가 합류할 시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신국을 비롯한 배신자들을 일거에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젠 아니었다.
‘죽게 생겼군.’
니키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신국을 물리치고 배신자들을 죽이는데 목숨을 바친다고 해도 위험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 모스크바를 간단히 되찾는다고 해도 이반 4세가 가만히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만큼 이반 4세는 용서를 모르는 잔혹한 군주였다. 더구나 부인이었던 마리아를 독살했을 거란 소문도 돌았다. 니키타는 믿지 않았지만 목숨이 위험해질 정도의 실수를 저지르니 믿음이 흔들렸다. 만에 하나라도 이반 4세가 잔혹한 결정을 내린다면 로마노프 가문은 끝이었다.
혼자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가문이 가졌던 모든 것은 또 다른 보야르에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권력지형이 바뀌며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알았다. 나가봐라.”
전령을 내보낸 니키타는 술병을 찾았다. 술은 잔을 꽉 채운 것도 모자라 흘러넘쳤다.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귀한 술을 낭비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니키타는 병을 바로 했다. 술잔은 술로 찰랑거렸고 주변은 흥건했다. 술을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술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어찌 했으면 좋겠나?”
질문을 던진 부하의 눈을 바라보는 니키타는 욕망을 읽었다.
살고자 하는 욕망.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
측근이라고 하더라도 권력을 중심으로 뭉친 이들일 뿐이었다. 권력이 단숨에 날아가게 생긴 이상 언제 배신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파렴치한 짓이라 해도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떠들거나 연기를 해서 사람들을 속이면 될 뿐이었다.
“일단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했다. 섣불리 배신을 입에 담았다가는 혼자 독박을 뒤집어 쓰니까.
“음.......”
결국 니키타가 결정할 일이었다.
‘이반.......’
지금처럼 계속 충성을 보일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쓸모를 다했다며 나중에 내쳐질 터. 모스크바를 빼앗긴 것은 그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바로 목을 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어쩌다가.’
치가 떨렸다. 그리고 두려웠다. 마치 약점을 훤히 알고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신국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어느새 정신이 이미 굴복하고 있음을 깨달은 니키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할 녀석은 지금 남아라. 그게 아니라면 떠나라.”
결정을 입 밖에 내기 전, 니키타는 선택을 강요했다.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은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진정으로 함께할 이들을 골라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몇몇 부하들이 말없이 나가는 것을 보며 니키타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 나간 녀석들을 죽여라.”
니키타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 부하들은 바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먼저 나간 자들은 이미 죽음을 직감하고 병력을 부르고 있었다.
“배신자들이다! 놈들을 잡는 자에게 상을 내리겠다!”
니키타가 뒤늦게 나와 외치자 먼저 나간 자들의 반격 시도는 끝이 났다.
병사들이 불안에 떠는 것을 보며 니키타는 외쳤다.
“나는 너희들의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한다! 결코 너희는 홀로 서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병사들은 살짝 안도한 표정으로 흩어졌다.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선 니키타는 부하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옥까지 함께 가자.”
니키타는 신국 원정군에 사신을 보냈다.
신국에 복속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서신을 가진 사신이었다.
“하하하하! 정말 대단하군.”
별 다른 피해 없이 니키타의 병력을 손에 넣었다.
‘알렉산드로가 잘해준 모양이군.’
모스크바에 이변이 없었다면 니키타가 갑자기 배신할 이유는 없었다. 이반 4세의 질책을 두려워한 니키타는 결국 배신을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래, 거짓 항복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거야 이반의 목을 쳐서 진심을 증명하라고 하면 될 일이다.”
노부나가는 그냥 복속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어쨌거나 적대하던 세력이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받아주기에는 이미 선을 넘은 상태. 그러니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면 그만한 선물을 안겨줘야만 했다.
“이반 4세의 목을 가져오면 그와 그의 부하들 모두 영주로 만들어주겠다고 전해라.”
“영주는 좀 과하지 않을까요? 의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
노부나가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로 혼자 모스크바 인근 영주들을 이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것이다.’
니키타는 알렉산드로의 대항마로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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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