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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
달리고 달렸다. 날씨가 추웠다. 북쪽으로 갈수록 날은 더 추워졌다. 이반 4세의 군대는 그야말로 달렸다. 낙오되려는 자들을 고려해 포병은 놔두고 보병과 기병만을 이끌고 달렸다. 기병들은 앞서 달리지 않았다.
이탈하려는 자들을 잡기 위해 행렬을 포위했다.
“미친. 이게 무슨 짓이야.”
“지랄. 힘 빠진다. 닥쳐.”
병사들은 욕설을 토해내면서도 달렸다. 뒤처지면 목을 치니까.
탈영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잡아 죽이니 방법이 없었다. 하루에 딱 한 번 쉬웠다. 해가 떨어지면 저녁을 먹고 자고 일어나 아침 먹고 계속 행군이었다. 중간에 물도 걸어가면서 마셨다.
이반 4세는 극한까지 병사들을 다그쳤다. 그랬기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전선을 벗어나 랴잔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했다.
“니키타!”
라쟌의 반란진압군 진영에 도착한 이반 4세는 성난 표정으로 니키타를 찾았다.
“차르!”
“이 자식! 뭘 하고 있던 거냐!”
호통과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니키타는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았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내가! 너한테! 이러라고 했냐? 엉?”
바닥에 웅크리니 발까지 사용했다. 극도로 분노한 이반 4세는 주위의 눈길 따윈 신경 쓰지도 않았다.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니키타를 대놓고 두드려 팼다.
이러한 행동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
‘미친 놈.’
니키타는 이반 4세의 최측근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현재 망신을 주고 있었다. 아니, 망신 정도가 아니었다. 엉망이 된 니키타는 조금만 더 맞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저 놈 밑에 있으면 다 죽어.’
이반 4세의 바로 밑에 있던 지휘관들도 불안에 떨었다. 최측근도 심하게 대하는 것을 보니 자신들도 실수하면 가차 없이 죽일 것 같았다.
“차르! 그보다 지금 적을 상대해야 합니다!”
“후욱! 알았다!”
이반 4세는 힘이 빠지자 이성을 되찾았다. 폭행이 끝나자 니키타는 정신을 잃었다.
깊은 밤, 니키타는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반 4세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린 명령이 있었다.
니키타의 부하들은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어느 누구도 배신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계하거나 하지 않았다.
늦게까지 신국 원정군을 상대할 전략을 짜던 이반 4세와 그의 부하들은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반 4세의 부대는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피로 때문에 곯아떨어졌다.
약을 써서 잠들게 할 필요조차 없었다.
“생포한다.”
니키타의 부하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랜드 보야르인 니키타를 개 패듯 패는 차르에 대한 공포는 배신으로 이어졌다.
은밀히 차르의 처소에 접근한 부하들은 순식간에 친위대를 제압하고는 이반 4세를 생포했다. 아울러 이반 4세의 부하들도 모두 생포했다.
저항하는 자들은 죽였다.
“이 새끼들이! 지금 뭐하는 짓인지 아냐!”
“반란이다! 반란이다!”
소리를 지르지만 도움은 없었다. 도움에 응해야 할 이반 4세의 군대는 이미 지쳐서 곯아떨어졌다. 니키타의 군대는 이미 작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이반 4세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 너희들이 이러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나! 모두 파면이다!”
파면. 무서운 이야기였다.
파면을 당하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다. 인간이 아니란 소리나 마찬가지. 파면 당한 사람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니 죽여도 살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빼앗긴다. 인정받지 못한다.
재산권을 넘어 인권까지 박탈하는 것이 파면이었다.
허나, 아무도 이반 4세의 외침에 떨지 않았다.
“파면이라. 고맙군.”
일이 끝나자 정신을 차린 니키타는 엉망이 된 얼굴로 나타났다. 하도 맞아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라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이노오오옴! 네가 감히!”
“내가 감히 뭐.”
니키타 로마노비치는 짜증이 났다. 맞아서 욱신거리는 얼굴과 몸 때문에 이반 4세가 떠드는 것을 듣는 게 괴로웠다.
“조용히 시킬까요?”
“아니, 그래도 차르가 아닌가? 이제는 망할 차르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차르. 예우는 해줘야지.”
예우를 한다는 말에 니키타의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르신 분.’
행동에서 이반 4세와 비교가 되었다. 분노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우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절차에 따르는 모습만으로도 부하들의 마음은 니키타에게 기울었다.
종잡을 수 없는 폭력적인 폭군은 힘을 잃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끄러운 짐승에 불과했다.
“신국에 연락해라.”
“배신자! 네 놈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교도를 아내로 삼고 살인을 저지른 자를 군주로 섬겼으니 당연히 지옥에 떨어지겠지.”
“크윽!”
죽은 마리아는 이교도였다.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정략결혼이었다. 마리아의 집안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아내로 삼았다. 어리고 예쁘다는 것도 한몫했다.
“일단 가두도록.”
이반 4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니키타는 이반 4세를 이끌고 라쟌으로 향했다. 라쟌에서는 노부나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약속대로 해주었군. 신국의 영주가 된 것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니키타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끝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최후의 발악 정도는 하도록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왔었다.
‘이제 안전해.’
긴장이 풀린 니키타를 보며 노부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안으로 들지.”
이반 4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가둬두라고 했을 뿐이었다.
전쟁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차르가 잡혔으니 차르국은 끝이었다. 더구나 모스크바까지 점령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할 일이 있다.”
만찬이 시작되기 전, 노부나가는 보야르들을 모아놓고 연설에 들어갔다.
“차르국은 끝났다. 하지만 아직 폐하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 많다.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둬야 하나?”
“아닙니다!”
통역을 통해 전해진 질문에 보야르들은 입을 모아 힘껏 외쳤다.
“그렇다.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들이 항복한다 해도 어찌 위험을 감수한 그대들과 함께 설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모습을 보기 싫다. 그러니 가서 그들을 징벌하라! 하지만 그 전에! 오늘은 승리했으니 축배를 들자! 마셔라! 황제폐하 만세!”
“황제폐하 만세!”
독한 술을 단숨에 비워낸 보야르들은 고기를 뜯었다.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웃었다.
니키타는 엉망이 된 얼굴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의원이 술을 마시지 말라 하니 달콤한 망고 주스로 대신할 뿐이었다.
‘달다.’
술하고는 맛이 영 다르지만 달콤한 맛은 전신에 퍼지며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정말 어려운 결정을 해주었다.”
얼마 전까지는 적이었으나 이제는 아군이 된 니키타를 노부나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행동에 니키타는 살짝 소름이 돋는 모습이었다.
“제가 꺼려지지 않습니까?”
“꺼려져? 왜? 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부나가는 피식 웃었다.
“적이었어도 나쁘지 않은 적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신국에 복속하지 않았나? 그거면 되었다.”
“제가 배신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전쟁은 이미 끝났다. 배신한다면 그것은 자멸로 가는 길일뿐이다. 알렉산드로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싶은가?”
알렉산드로 이야기가 나오자 니키타는 주먹을 꾹 쥐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알렉산드로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 아마 많은 보야르, 아니 이 지역 영주들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대의 배신을 가장 반길 사람이 그라는 것만 기억해두도록.”
노부나가는 대항마로 삼겠다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다. 다만 부추길 뿐이었다.
니키타는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노부나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거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 되진 않을 겁니다.”
“그래?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그나저나 남은 보야르들 말인데. 누구에게 맡기는 게 좋겠나?”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이었다. 여기서 니키타가 거절한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생각은 없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역시 현명하군. 생각보다 오래 보게 되겠어.’
노부나가는 만족했다. 니키타는 노부나가가 던져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 요식행위에 가까웠지만 어찌 되었든 명령을 받고 먼저 움직인 것이 되어야만 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바쁠 테니 보고는 나중에 해도 되네.”
마음껏 공을 세우란 소리였다.
이반 4세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차르다! 감히 내게 이게 무슨 짓이냐!”
미쳐버렸다.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의 악몽이 그대로 떠올랐다.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놈들을 때려잡으며 기쁨을 누리던 이반 4세는 몰락한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적응할 수 없었다.
이성은 초라한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반 4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완전히 미쳐버렸다.
“이노오오오오옴!”
난동을 부려보지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좁은 감옥에서 발광하는 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한심하군.”
노부나가는 완전히 미쳐버린 이반 4세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를 한양으로 압송해야 할까요?”
“폐하께 결례를 저지를 놈이다.”
“그럼.......”
“상태를 보아하니 얼마 안 가 실의에 빠져 자살하게 생겼군.”
말을 한 노부나가는 수고한다며 술이나 사먹으라고 은화가 가득든 주머니를 간수장에게 주었다.
의미는 명백했다.
노부나가가 나가자 간수장은 홀로 바쁘게 움직였다.
“흐흐흐, 차르라고? 미친놈이지. 이런 놈을 살려 둘 순 없어. 이 놈 때문에 내 동생하고 형님이 죽었단 말이지.”
간수장은 전쟁에서 형제를 잃었다. 모두 차르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위대해야만 할 차르가 자신의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갇혀 있었다.
용서가 되질 않았다.
형제의 피를 빨아먹은 자가 초라한 모습으로 있다니 용서가 되질 않았다. 한 때는 차르라고 해서 포기했던 마음에 불길이 일었다.
간수장은 밧줄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수장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명령을 내린 탓이었다.
“이 놈! 뭐하려는 짓이냐! 얼른 경의를 표해라! 나는 차르다!”
이반 4세의 외침에 간수장은 침을 뱉었다.
“닥쳐 돼지 새끼야.”
그리곤 밧줄로 목을 졸랐다. 죽은 형제들을 생각하니 힘이 펄펄 솟았다.
“켁! 켁!”
이반 4세는 저항해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목을 파고든 밧줄은 숨통을 조였다. 버둥거리던 이반 4세는 축 늘어졌다.
죽으면서 오줌과 똥을 지려 구린 냄새가 실내에 가득했다.
“퉤!”
간수장은 침대보를 가져다가 길게 찢었다. 줄을 만들었다.
죽은 이반 4세의 목에 줄을 걸었다. 그리고 천장에 보이는 대들보에 줄을 넘기더니 당겼다. 그러자 죽은 이반 4세의 몸이 들렸다. 이후 쇠창살에 줄을 묶은 뒤 간수장은 직접 의자와 탁자 그리고 침대를 안에다 넣어주었다.
이후 간수장은 호들갑을 떨며 이반 4세가 자살했다며 보고했다.
간수장은 죽을 때까지 이반 4세의 죽음의 진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음 날, 이반 4세의 죽음이 알려졌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소문이 당연히 돌았지만 노부나가를 비롯한 신국에 악담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잘 죽었지.”
“그러게.”
보야르를 비롯해 병사들까지 모두 이반 4세의 죽음을 환영했다. 공포의 근원이 사라져 기쁠 뿐이었다.
노부나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정리되면 바로 진격한다.’
곧 있으면 봄이었다. 봄이 되면 도착하지 못한 포병들을 이끌고 진격하는 게 가능했다.
‘리보니아!’
리보니아는 물론 스웨덴까지. 북방의 땅을 모조리 점령한 뒤 남쪽으로 힘을 투사할 생각으로 가득한 노부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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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