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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정원
뜨거운 태양, 밋밋한 바람. 그래도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상품을 잔뜩 실은 신국의 상선들은 페르시아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평화로운 항해가 되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불운이 이들을 덮쳤다.
“9시 정체불명 선박 3척!”
3척이나 되는 배를 발견했다. 이후 깃발을 확인하려 했으나 깃발 확인은 불가능.
‘해적인가?’
선장은 이를 악물었다.
“갤리선! 접근 중!”
“항해사! 속도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전투를 치러야 합니다! 뿌리칠 수 없습니다!”
적의 속도가 느리면 걱정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적이 빠르면 결국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근처의 순시선은?”
“하루에서 이틀거리 밖에 있을 겁니다!”
순시선들은 주기적으로 해역을 돌아다닌다. 정기 순시선의 경우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도움을 요청하라며 아예 항해 일정까지 공개했다. 이들을 따라 움직이면 해적 걱정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아도 일정을 알고 있으면 어디쯤 있는지 계산이 가능했다. 그럼 위급한 경우 순시선의 항로로 뛰어들면 된다.
“젠장! 전원 전투 준비!”
“상품을 버리고 속력을 올리면 되지 않을까요?”
“젠장! 갑판장! 전투냐 상품을 버릴 거냐?”
선투는 선원들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갑판장에서 선택권을 넘겼다.
“당연히 전투죠. 버리면 얼마가 날아가는지 알면서.”
돈이 필요해서 배를 탄 선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는 빚을 진 자들도 있었다.
항해를 할 때마다 순이익에서 선원들에게 배당이 떨어진다. 이것이 신국의 방식이었다. 이 방법을 통해 선원들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뱃일은 엄청나게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배에서의 생활만 해도 열악한 환경과 음식으로 고생하는데 여기에 노동까지 겹치니 힘들었다. 또한 위험부담도 컸다.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선원이 되게 하려면 결국 배당을 줘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선원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요즘처럼 개척 바람이 불고 있는 시기에는 숙련 선원은 귀하신 몸이었다.
“좋아! 전투다!”
상품을 버리고 목숨을 구한다. 이것이 평범한 이들이 선택하는 선택지지만 험한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선원들은 다른 것을 택했다.
“이놈들아! 당장 전투 준비다!”
“아니 어떤 놈들이 우리 돈을 노려?”
“싸우자!”
선원들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사기는 전투에서 고스란히 입증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신국의 선원들은 그야말로 악귀처럼 싸웠다.
“꺼져!”
“죽어!”
“개놈들!”
욕설과 비명이 오가는 현장에 피가 뿌려졌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맞붙은 양측은 뒤엉켜서 피를 뿌리는 선상 전투를 이어나갔다.
신국의 선원들 중 상당수가 일본 지역 출신이었다. 그것도 사략선을 타다가 나이가 들어 상선으로 옮긴이들이었다. 사략선을 타서 한 몫 잡았으나 돈이 갑자기 많이 생기면 주체하지 못하고 몽땅 써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해서 망하면 다시 배를 타는 것이었다.
이들은 돈에 민감했다. 그렇기에 죽어라 싸웠다.
숫자에서 밀리지만 악귀처럼 싸웠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상선에는 일본 출신 선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근처에 가기만 하면 무기든 사람이든 뭐든 썰어버렸다.
손에 쥔 쿠크리를 묵묵히 휘두르며 종횡무진 싸우는 자들의 정체는 바로 히말라야, 그것도 구르카 출신 선원들이었다.
히말라야는 신국에 복속된 뒤에 경제적으로 많이 나아졌지만 이득을 본 것은 대부분 상류층이었다.
평민 계층은 그리 큰 덕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용병이 되거나 선원이 되었다. 그럼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으니까.
이사 비용을 벌기 위해 배에 탄 구르카 전사들의 눈이 돌아갔다.
가까이 다가오는 적은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소수였으나 이들의 움직임은 악마와 같았다.
같은 편인 일본 출신 선원들도 이들을 보면 덜덜 떨 정도였다.
아군은 살리고 적은 죽인다.
오직 이 한 가지 사실만을 생각하며 행동했다.
그 결과 상선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선원들의 피해가 컸지만 소수가 다수를 역으로 잡아먹은 것이었다.
이후 해적들의 배를 나포해 페르시아 항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당연히 신국은 분노했다.
“아니, 그 썩을 놈들이?”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한 후지바야시 켄은 부들부들 떨었다.
“남사고함을 중심으로 원정 함대를 조직한다!”
전열함인 남사고함은 사실 바다를 수비하는 임무 따윈 하지 않았다. 갤리온 정도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큰 전투도 없는데 남사고함이 순시를 나가면 그야말로 낭비였다.
그래서 뭄바이에서 훈련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전쟁이 결정되자 가장 먼저 전쟁터로 가게 되었다.
전열함을 중심으로 20척의 갤리온이 아라비아 반도를 향해 출항했다. 물론 가면서 발견하는 오스만 제국의 항구는 모조리 박살낼 기세였다.
신국은 거대해졌다. 이젠 신유성이 직접 하나하나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신경을 써야만 했다.
분열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니까.
지금처럼 언어와 인종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는 분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유성은 의회라는 아주 큰 떡밥을 던진 것이었다.
의회 건물은 대충 만들어졌다. 앞으로 수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르기에 마냥 건물이 완성되길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의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때는 여름, 7월.
해가 점점 기울어 황혼이 지려 할 무렵이었다.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의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의회가 열리는 장소에 모였다.
날씨가 더워 다들 손에는 부채와 차게 식힌 음료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음료는 얼마 안 가 금방 미지근해졌다.
더운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으니 더 더웠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은 더위보다 더 뜨거웠다.
‘슬슬 때가 되었군.’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신유성은 단상에 올랐다. 목소리가 모두에게 전달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연설을 하면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그대로 적어 신문으로 낼 테니까.
더구나 의원으로 모인 이들이 전부 같은 언어를 쓰지도 않았다. 조선어를 배우는 이들이 많았지만 신유성이 연설을 하면 모두 알아들을 수준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 행사에 참여했고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뿐.
중요한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말을 못 알아들어도 연설 내용이야 나중에 통역을 통해 보면 될 일이다. 더구나 의원이 되기 싫으면 의원 자리를 내놓고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신국의 의원들이여.”
간단한 인사로 연설을 시작한 신유성은 황혼에 물드는 하늘과 사람들을 보았다. 연설은 의원들의 곁에 붙은 통역들이 조용한 목소리로 통역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며 이유를 내게 이유를 물었다. 의회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많은 신하들은 의회로 인해 나라가 분열될 것을 염려하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회를 열었다.”
이지번을 비롯해 이이와 조식 등 한반도 출신 인물들은 신유성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의회는 연방이란 체제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신유성은 연방 정부와 지방 정부에 대한 설명에 들어갔다. 지방 정부는 영주들의 영지를 의미했고 연방 전부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조정을 의미했다.
“연방 정부는 각 영주의 자치권을 존중해야 하며 영주가 연방의 체제를 받아들인 지방 정부를 설립할 경우 연방의 세금으로 지방 정부에 지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회는 바로 이 세금을 어디에 얼마만큼 지원하게 될 것인지 정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신유성은 준비한 떡밥을 던졌다. 그러자 의원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영주들이 낸 세금은 영주들이 원하는 형태로 다시 돌려준다. 단!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이며 올바른 정책을 펼쳤는지 다른 의원들의 심사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또한 각 지역의 교류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에 필요한 법을 재정하는 것도 그대들에게 맡길 생각이다.”
떡밥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멋진 얼굴이야.’
황혼에 물든 하늘, 탐욕으로 타오르는 의원들의 눈빛.
후끈한 열기가 피어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꿈이 있다.”
기이한 침묵이 이어졌다. 누군가 기침이라도 한다면 크게 들릴 것 같은 적막. 수많은 사람이 모인 것 답지 않은 고요함이었다.
“그것은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심장을 갑자기 빨리 뛰게 만드는 선언이었다.
“하나로 만들어 불필요한 전쟁을 줄이고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 이것이 내가 연방을 만든 목적이다! 그러니 연방의 목적에 동의하는 자는 의회의 설립을 찬성하는데 투표하길 바란다. 반대하는 사람에겐 불이익은 없다.”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명분이었다.
신유성은 연방의 명분을 설명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의회가 앞으로 어떤 형식으로 발전하게 될지 깨달았다.
‘찬성해야 한다.’
의원들은 자신과 같은 문화권 출신의 의원들에게 찬성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벌써부터 근질거렸다.
모여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반대는 별로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투표에 들어가겠다. 투표는 익명으로 처리한다.”
이어서 옥새가 찍힌 투표용지를 받은 의원들은 투표에 들어갔다. 신유성은 서로 의논할 시간 따윈 주지 않았다. 하지만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찬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었다.
투표를 하는 동안 신유성은 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났으나 아무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모두 초조한 마음으로 투표함을 바라볼 뿐이었다.
투표가 모두 끝나자 바로 개표가 이루어졌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만장일치입니다. 폐하.”
만장일치로 의회가 설립되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모두 환호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이제 1호 법안을 통과시킬 차례다.’
잠시 환호를 즐기던 신유성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의회가 설립되었으니 한 가지 법안을 상정하겠다. 그것은 바로 화폐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은행을 통해 동전들을 살펴본 결과 부정행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동전을 깎아내는 행위였다.”
신국의 경제가 발전하고 신국의 돈이 유통되면서 한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은화나 금화의 테두리를 깎아내는 것이었다.
동전을 살짝 깎아내면 눈치 채기 힘들다. 아주 미세한 가루라도 아주 많은 동전에서 조금씩 깎아내면 또 다른 동전을 만들만큼 은이나 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러한 부정행위에 대해 언급하자 몇몇 의원들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분노하는 의원도 있었다.
“돈을 손상시키는 것은 결국 돈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행위다. 이제부터 그대들이 논할 것은 이 돈의 가치를 어떻게 손상시키지 않고 유지할 것인가 방법을 찾는 것이다.”
돈 계산이 빠른 이들은 돈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동전을 깎아서 더 많은 동전을 만들어 은행에 넣게 되면 결국 장부에 기록된 것만이 진실이 된다. 이를 악용한 영주들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결국 전체적으로 손해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돈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돈이 아닌 현물 거래를 선호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물물 거래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
교역의 규모가 커지면서 느낀 것은 하나였다. 신국의 돈으로 교역하면 어떤 지역을 가든 편리하고 빠르게 거래가 가능했다. 현물만으로 거래를 하게 되면 서로 기대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엄청나게 흥정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신국의 돈이 중간에 끼어들면서 시세라는 것을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상품의 가치를 신국의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하면 끝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그대들끼리 의논하도록 하라.”
신유성은 할 말을 마치고 퇴장했다.
의원들은 모인 장소에서 떠나지 않고 바로 토론에 들어갔다. 갑자기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흥분한 이들은 신유성의 법안을 무조건 받아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반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황제인 신유성이 제일 먼저 결정하라고 내놓은 법안이었다. 신유성에게 실망을 안겨줘선 안 된다는 압박감이 의원들을 옥죄었다.
해가 점점 저물며 붉은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급기야 어둠이 찾아왔지만 떠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욕망의 꽃이 활짝 핀 정원은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았다.
처소로 돌아온 신유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이다.’
의회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통역 문제로 토론이 쉽지는 않았다. 의원들이 품은 뜨거운 욕망이 아니었다면 이뤄지지 않을 일이었다.
‘언어 문제가 점차 해결되는 것부터 시작이다.’
상류층에서 조선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밑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리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황실의 지배력은 점점 강해진다. 무엇보다 의회는 영주들로 하여금 떠나기 힘든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혼자서만 떨어져 나간다면 거대한 조직에 의해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까.
‘나중에 문제가 안 생길 순 없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의회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 내가 죽어도 갑자기 분열할 일은 없겠지.’
의회를 통해 더 큰 이익을 맛보게 되면 벗어나기 어려웠다. 또한 신유성은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원정을 갈 수 있다.’
신유성의 눈은 유럽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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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