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8 / 0271 ----------------------------------------------
위기에 처한 사람들
1571년 7월.
모리 모토나리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아침이 오자 눈을 뜨지 못한 것. 죽은 모토나리의 얼굴은 편안했다. 잠든 얼굴 그대로였다.
어떤 고통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남겨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장례식에 가봐야겠다.”
신유성은 모토나리의 장례식에 직접 참여했다. 황제가 발걸음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성대한 장례식이 되었다.
황제가 가는데 의회의 의원들이 안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토나리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이들은 장례식에 참석했다. 모토나리와 관계가 별로 안 좋았던 이들도 참석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황제가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신이었다. 나를 도와 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했다. 현명했으며 자비로웠다.”
신유성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모토나리를 칭찬했다.
사실과 조금 다른 것들도 있었으나 아무도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원수도 아닌데 여러 사람 듣는 곳에서 나쁜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모토나리는 이미 죽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 장례식은 어떤 모습일까?’
연설을 마친 신유성은 문득 자신이 죽은 이후를 떠올렸다. 상상이 별로 가지는 않았다.
‘하던 일이나 해야지.’
장례식에서 돌아온 신유성은 소피아와 연화를 동시에 불렀다. 그리고는 고기 몽둥이로 엉덩이를 괴롭혔다.
모토나리가 죽었지만 신국은 멈추지 않았다. 의회는 드디어 화폐에 대한 법률을 만들어냈다.
화폐를 손상하거나 위조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화폐에는 신유성의 얼굴을 넣기로 했다. 즉, 황제의 존안에 손상을 가하지 말라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돈을 손상시켜선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신유성은 자신의 얼굴을 넣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하게 했다.
“그럼 법이 통과되었음을 선언한다. 모두 수고했다. 다음 안건은 그대들이 정하도록. 정해지면 그때 다시 의회를 열겠다.”
신유성의 선언에 의원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들의 힘으로 국정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신유성이 나가고 의원들은 환호하며 무사히 끝난 것에 자축했다.
한편, 의회를 나선 신유성은 황궁 안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남자들은 들어가선 안 되는 금남의 구역.
하지만 신유성은 들어갈 수 있었다.
오직 신유성에게만 허락된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무장한 궁녀들은 예를 올렸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더 안으로 들어가자 사방이 막힌 뜰이 나왔다. 위로는 거대한 유리천장이 있었다. 흐릿한 유리여서 빛을 통과시키는 수준이어서 하늘을 제대로 살피는 것은 물론 유리에 바짝 붙은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유리가 사용된 이유가 있었다.
뜰에 있는 여성들은 모두 옷을 벗고 있었다.
“어떤가요? 마음에 드시나요?”
“그래.”
어느새 다가온 주녹정이 말을 걸었다. 주녹정의 옷차림은 살짝 천을 두른 정도였다.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수준이었다.
“저들은 정말 평생 혼자 살겠다고 맹세한 건가?”
“그렇습니다.”
궁녀를 새로 뽑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평생 혼자 살겠다고 맹세한 이들은 금남의 구역에서 생활하게 했다.
모두 미녀 대회 본선에 오른 참가자들이었다.
이들은 신유성과 동침을 하지 못해도 궁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다. 원래는 미녀대회를 통해 뽑힌 이들과 동침하기로 한 것이었으나 나츠가 대회를 직접 참관해보라고 권유해 결국 참석한 것이었다.
여자들이 한가롭게 벗고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 느낌.
자극을 받은 신유성은 얼른 성욕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얼른 가지.”
“네.”
이어서 안쪽에 준비된 침실에 들어가 신유성은 한바탕 주녹정과 정사를 치렀다.
이후 열린 미녀 대회는 간단하게 끝났다. 심사 위원인 주녹정과 후궁들이 점수를 매기는 것 뿐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긴장감을 조성할 필요도 없었다.
본선에서 가리는 것은 오직 미모뿐이었기에 선정은 더욱 빨랐다.
나머지 자격은 본선에 오르기 전에 심사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최종 심사에선 오직 외모만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뽑히면 순서대로 주녹정부터 한 명씩 골랐다. 그 뒤에는 신유성과 함께 동침하게 되는 것이었다.
언어도 민족도 다른 여자들이 골고루 뽑혔다.
신유성은 한 명씩 안았다. 처녀의 성을 하나씩 무너뜨린 정복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 무너뜨린 다음에는 한 데 모아놓고 광란의 질주를 시작했다.
지독한 정사의 폭풍 속을 신유성은 묵묵히 헤쳐 나갔다.
어떤 폭풍에도 굴하지 않는 신유성은 바다의 신과 같았다.
아메리카로 넘어간 전열함들은 해안을 두들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남아메리카 최남단을 돌아 북상하기 시작했다.
“전방에 선박!”
“전투 준비!”
현재 들어선 해역은 신국의 해역이 아니었다. 신국의 선박은 없었다. 동맹국도 없었다. 그러니 만나는 선박은 무조건 적으로 취급했다.
“나포합니까?”
“필요 없다!”
“왜? 돈 필요해?”
“돈은 언제나 필요하지 말입니다!”
“됐다. 나포하다 누굴 죽이려고! 침몰시킨다!”
함장은 부관의 말을 씹어버렸다. 해병들은 낄낄거리며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배에 보물이 가득 실려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함장은 그런 것보다 해병들의 목숨을 더 우선시했다.
사기가 안 올라갈 수 없었다.
“이 놈들아! 포탄 낭비하면 술 없다!”
술 안 준다는 소리에 해병들은 웃음을 그쳤다.
“이 자식들아! 엉덩이가 퍼졌다! 빨랑빨랑 못 움직이냐!”
선임병이 악을 썼다. 실수 많이 하면 술을 안 준다는 소리 때문이었다.
뱃일은 굉장히 힘들다. 어선에서 일해도 힘들고 전함에서 일해도 힘들다. 힘든 노동을 이겨내는 데는 술처럼 좋은 것은 좀처럼 없었다.
술로 고통을 잊고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바다에 나온 이상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문이 되기도 한다.
언제나 통하는 벌칙으로 인해 병사들은 배에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였다.
이어서 추격이 벌어졌다. 신국의 배들은 빠르게 적을 따라잡았다.
에스파냐의 선박들이었다.
“군선입니다!”
군선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신국이 함장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신호를 주고받으며 기함의 명령을 확인한 함장들은 저마다 목표를 설정했다. 그리고 길고 긴 전투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 군선은 사실 그냥 군선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자꾸 에스파냐 선박을 습격하는 해적들을 잡기 위한 군선들이었다.
펠리페 2세는 대규모 해전을 위해 선박을 모으면서도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해군을 부르지는 않았다.
이유는 바로 위그노 해적들 때문이었다.
위그노 해적들은 1523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이 신교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들은 이들을 묵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위그노 해적들이 약탈로 벌어오는 재화와 에스파냐에 대한 견제 때문이었다.
이들은 플로리다 동부 해안에 자리를 잡았었다. 그리고 신대륙을 오가는 에스파냐의 보물선을 습격했다.
이러한 것을 참다못한 에스파냐는 위그노 해적들의 근거지를 습격했다. 에스파냐의 제독 메넨데스는 사로잡은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는 이단자를 처형했다고 말했다.
근거지를 잃은 위그노 해적들은 이리 저리 흩어졌다.
에스파냐는 행여나 위그노 해적들이 또 어딘가에 있을까 싶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펠리페 2세가 아메리카 함대를 전부 빼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현재 만난 이들은 바로 위그노 해적들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에 완전히 박멸하기 위해 움직인 군함들이었다. 원래는 잘못된 정보였지만 에스파냐 함대는 훈련 삼아 움직였다. 그러다 신국의 함대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함선 다수!”
“위그노냐?”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다 위그노다! 이단자들을 처형할 시간이다!”
가톨릭의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신교는 다 이단자였다. 증오를 품는 이들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에스파냐 함대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모르고 덤볐다.
전투가 시작되고 신국의 함선을 사정거리에 넣기 위해 움직이는데 갑자기 신국의 함선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
잠시 뒤, 물기둥이 치솟았다. 몇 발은 배에 박혔다.
“으아아아아! 적의 포격이다! 빨리 움직여라! 속도를 높여!”
믿기지 않는 사정거리였다. 더구나 포격도 굉장히 정밀했다. 자신들이 포를 쏴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에스파냐 함대는 순식간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전투를 위해 가까이 접근하려 한 것 때문에 배를 돌려 도망치는 것이 늦어졌다.
신국의 함대는 배를 돌리는 사이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
전열함 2척도 마찬가지였다.
“쏴!”
전열함의 연기가 피어오르자 한 척이 침몰했다. 또 다른 전열함이 뒤이어 쏘자 또 한 척이 침몰했다.
한 방에 한 척씩 침몰하니 에스파냐 해군은 겁에 질렸다.
“으아아아! 죽기 싫으면 빨리 움직여 이 새끼들아!”
배가 침몰하면 죽는다.
그것보다 더 심한 다그침은 없었다. 에스파냐 해병들은 죽을힘을 다해 배를 움직였다. 반격 따윈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전열함의 괴물 같은 파괴력에 겁을 집어 먹은 것이었다. 붙으면 반나절도 안 돼서 다 박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도망쳤다. 하지만 방향을 돌렸을 땐 이미 함대의 절반이나 날아갔다. 이후 끈질기게 도망쳤지만 신국의 함대는 기를 쓰고 쫓아가서 모두 침몰시켰다.
“에스파냐 놈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다.”
“계획대로 됐군요.”
에스파냐 함대가 남쪽으로 가게 된 것은 이들의 정보 공작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 보물선을 노린다.”
위그노 해적들은 이를 악물었다. 원래 터전으로 삼았던 요새가 박살나고 동료들이 이단자로 처형당했다.
위그노 해적들은 종교적으로 박해 당했다고 생각했다.
“배는요? 배도 없는데 가능합니까?”
배는 있었다. 조그만 보트와 어선들이. 하지만 이런 배들을 가지고 해적질을 나설 순 없었다.
“항구를 습격해야지.”
“숫자가 모자랄 텐데요?”
“원주민들과 함께 하면 된다.”
위그노 해적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민들은 위그노들을 받아주었다. 위그노들이 가진 물건과 지식은 원주민들에게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친해진 원주민들은 위그노들을 가끔 버칸이라고 불렀다. 사냥꾼이라는 의미가 담긴 단어였다. ‘부카니에’ 혹은 ‘버커니어’란 단어의 원형이 되는 말이었다.
즉, 위그노들이 바로 버커니어 해적들의 원점이었다.
“버칸! 오늘 습격 간다?”
“오늘 간다!”
“간다!”
젊은 원주민 전사들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약탈 행위에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강자는 약자의 것을 취한다. 같은 부족이 아니면 약탈을 해도 상관없었다.
위그노 해적들은 원주민들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에스파냐에 대해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노예로 만들고 약탈한다는 이야기에 젊은 원주민 전사들은 이를 갈았다. 그렇기에 위그노 해적들의 습격에 동참한 것이었다.
위그노 해적들은 항구를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밤이 내려앉은 부두 근처는 조용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주점에서 선원들의 주정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정도였다.
노리고 있는 배는 캐럭이었다.
“보초부터 잡는다. 소리 내지 않는 편이 좋다.”
원주민 전사들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조용히 접근했다. 피부에 바른 위장색 덕분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배를 지키는 자들은 하품을 하며 잡담을 나누거나 꾸벅꾸벅 졸았다.
형식적으로 배를 지킬 뿐이었다.
그래서 항구로부터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을 감지하지 못했다.
“컥!”
자비는 없었다.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소리가 좀 나긴 했지만 항구와 거리가 떨어져 있어 소리가 닿지도 않았다.
위그노와 원주민 전사들은 결국 배에 올랐다.
“빨리! 출항한다!”
“털지는 않고?”
“복수는 바다에서!”
항구에서 싸우면 숫자에서 밀린다. 그러니 바다에서 싸우는 것이 아직은 최선이었다.
캐럭 한 척이 어둠 속에 출항했다.
항구에서는 아무도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이후 위그노 해적들은 에스파냐 상선들을 습격해 잔인하게 죽였다.
복수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