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사표를 내다. =========================================================================
* * *
" 아아~ 선배님 바람이 엄~청 상쾌해요 . "
이주랑이 창문을 열고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에 얼굴을 맡겼다. 바다냄새나는 차가운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와 히터로 따뜻하게 달궈진 내부를 차갑게 훅훅 불고 되돌아 나갔다.
" 문 닫아. 바람 차다. "
" 그래도 기분이 좋은걸요. "
" 그러다 감기걸려. 감기 걸리면 키스 안 해줄거야. "
" 선배님이 하기 싫다고 그래도 제가 덮칠건데요? "
이주랑은 창문을 올리면서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계속 귀 뒤로 쓸어넘겼다.
"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찌르지 뭐에요. "
" 그니까 창문 닫으라고 했잖아. "
" 닫았어요. 잘했죠? 칭찬해주세요. "
윤석이 피식 웃었다. 우습다. 어린애도 아니고 칭찬해 달란다.
" 그래. 잘했어. "
그런데 더욱 우스운 건 정말로 그 별 것도 아닌 일에 칭찬을 해주었다는 거고, 그 칭찬에 주랑이 기분 좋은 듯 배시시 웃는다는 거다. 사람이 참 유치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유치해짐이 나쁘지 않다.
' 이 기분... 나쁘지 않아. '
" 선배님. 저도 포병할 걸 그랬나봐요. "
" 포병? "
" 스나이퍼는 너무 긴장돼요. 못 맞추면 어쩌나 하는 것도 있고...마지막에 못 맞춰서 너무 미안했어요. "
" 어쨌든 이겼잖아. "
" 그 때 너무 떨리고 그래서... 죄송해요. "
" 괜찮아. 이겼으니까 됐어. 다음번에 잘 하면 돼. "
주랑은 못내 미안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이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 너 왜그래? 이니셀 신입사원 씩씩발랄 에이스 이주랑 맞아? 겨우 게임 같은걸로 기죽지 말라고. "
이젠 겨우 게임 같은 게 아니다. 유토피아는 이미 게임을 넘어서서 일상이다. 게임이 아닌 또 다른 세계. 혹은 또다른 삶. 세상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 그래도... 다음번엔 좀 더 도움이 되고 싶어요. "
2차 길드전은 10일 뒤다. 워낙에 많은 길드가 출전했다보니 각 길드전 별로 텀이 길었다. 이번 길드전 이벤트는 도합 2달이 넘게 걸리는 거대 이벤트였다.
" 선배님. 저 좀 도와주세요. "
" 그래. "
" 뭔지도 안 물어보고 그렇게 대뜸 승낙하면 어떡해요? "
" 네가 나한테 무리한 걸 부탁할 리 없잖아. "
" 이번엔 조금 무리한 거 부탁할 거란 말이에요. "
윤석이 피식 웃었다.
" 그러면 오늘은 외박하는거다? "
" 응큼해요. "
" 그럼 싫어? "
싫다는 소리는 못 했다. 말을 돌렸다.
" 바람이 상쾌해요! "
윤석이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 창문 닫혀 있는데? "
" 어머나? 얘. 너 왜 닫혀있니? 나는 닫은 적이 없는데..."
* * *
주말에 바람도 쐴 겸, 데이트도 할 겸 해서 순천만으로 여행을 왔다. 날씨는 제법 차가운데 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태양빛은 마치 황금색 파노라마 같았다. 햇살과 차가운 바람과 함께 어우러진 황색 갈대숲이 부시시- 소리를 내며 흔들려 아무도 없는 정적을 정취로 바꾸어 놓았다.
장난감 점토를 흩뿌려놓은 듯한 형형색색의 갯벌위에 세워진 나무 다리를 걷자, 갈대가 내는 부시시- 소리와 주랑의 하이힐에서 나는 또각- 또각- 소리가 섞여버렸고 그 사이로 윤석의 기분좋은 하하하- 웃음소리가 추임새처럼 들어갔다.
갯벌과 갈대숲, 시원한 바람, 나무다리와 나무 난간. 그리고 이주랑과 함께 걸을때마다, 검은색과 황금색을 격자무늬로 머금은 나무다리에 두 명의 그림자가 길게 펼쳐져 나무다리를 덮었다.
" 정말 멋져요.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계셨어요? "
으슬으슬한 날씨 탓일까. 주위엔 사람도 없다.
" 그냥... 어찌어찌 하다보니. "
" 혹시 예전 여자친구랑 같이 왔던 곳 아니에요? "
" ....... "
윤석이 아무런 말도 않자 주랑은 윤석의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서 몸을 윤석에게 가까이 붙였다.
" 혹시 왔던 곳이면 어때요? 지금은 저랑 같이 여기에 있는 거잖아요. 저 그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쓰는데... "
주랑은 배시시 웃으면서 윤석을 올려다봤다.
" 진짜에요. 앞으로도 저한테 중요한 건 지금이에요. 선배님이랑 같이 있는 지금! 그리고 혹시 몰라 말하는데 바람 피면... "
그녀는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고선 윤석의 어깨를 살짝 툭 쳤다.
" 걸리면 죽어요! "
그리고선 다시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 가끔 바람펴도 괜찮아요. 예쁜 여자보면 눈 돌아가는거 그거 본능이잖아요. 가끔 바람 펴도 괜찮은데 나한테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선배님이 다른 여자랑 어떻게 하고 있는거 보면... 죽긴 죽는데 선배님이 아니라 내가 죽을 거 같아요. "
시원한 바람이 다시 그녀와 윤석의 앞머리를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주랑은 차에서 그랬던 것 처럼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 저한테 걸리면... 너무 아플 것 같아요 제가. 그니까 들키지만 말아주세요. "
" 바람 같은 건 안 펴. 너 말고 다른 여자한텐 관심도 없어. "
" 그래도 쭉쭉빵빵 미녀가 작정하고 꼬시면 남자는 다 넘어가게 되어 있대요. 한 두번 흔들려도 괜찮으니까 다시 저한테 돌아오기만 하면 돼요. 전 기다릴 거니까. "
윤석이 우뚝 걸음을 멈춰섰다. 덩달아 주랑도 멈춰섰다.
" 선배님...? "
윤석이 주랑에게 물었다.
" 키스... 할래? "
주랑은 대뜸 얼굴을 찌푸리고 볼에 바람을 불어넣어 불만을 표시했다. 못마땅한 듯 윤석을 쳐다봤다.
" ... 그런 걸 물어보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
결국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 바보. "
* * *
사실 윤석은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오늘 드라이브코스는 전부 6년 전의 그녀가 짜주었던 곳이고 그녀와 함께 둘러봤던 곳이었다.
' 내가 어쩌자고... '
지금 와서 그 곳을 둘러본다고 해서 그녀가 많이 떠오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랑은,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넘칠 만큼 괜찮은 여자였다.
" 여기요. "
주랑이 카드를 내밀었다. 윤석이 아주 잠깐 상념에 빠져있을 때에 주랑이 모텔비를 먼저 계산해버렸다. 주랑이 윤석의 귀에 속삭였다.
" 오늘만... 외박 하는 거예요. "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객실 문을 열었다. 문이 닫혔다. 윤석은 현관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 선배님...? "
" 미안하다. "
주랑은 발 뒷꿈치를 들어 윤석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 뭐가요? "
" 그냥 다. "
" 그거 제일 성의 없는 대답인 거 알죠? "
주랑이 몸을 돌려 걸어가 침대 위에 앉았다.
" 어떤 사람들은 그런대요. 남자친구가 외제차에서 국산차로 바꾸면 헤어지고... 자기는 200벌면서 남자는 400이상 벌어야 하고... "
" ....... "
" 제가 여태까지 계속 생각해왔는데요... "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 첫 째. 전 제 남자친구가 경차 타고 다녀도 좋아요. 경차를 타는 사람이 제 애인이 아니라, 제 애인이 경차를 타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건 저한테 전혀 미안할 게 아니에요. 둘 째. 데이트 비용같은 건 같이 부담하는 거에요. 선배님만 하는게 아니라 저도 즐거운 시간 보내는 거니까요.그니까 제가 여기 계산 한 것도 전혀 미안한 게 아니에요. 셋 째. 여기도 혹시 여자친구랑 왔던 모텔이에요? 그건 저한테 조금 미안해하셔도 돼요. "
주랑이 침대에서 일어서서 다시 윤석에게 걸어왔다. 두 팔로 윤석의 허리를 감싸 안고서, 오른쪽 볼을 윤석의 가슴에 댔다. 그리고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여자친구랑 왔던 것 자체는 하나도 안 미안해하셔도 돼요. 그런데 그걸 미안해하면서 지금 선배님한테 안겨 있는 저랑 재밌게 안 놀아주시는 건 미안해하셔야 돼요. 말했잖아요. 저 선배님 과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다른 건 다 괜찮으니까... 지금 저를 봐주세요. 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과거의 김윤석이 아니라 지금 제가 꽉 껴안고 있는 김윤석씨란 말이에요. "
윤석은 그녀를 들쳐 안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랬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과거같은 걸로 미안해하기보다, 지금 주랑에게 충실하는 게 주랑과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 주랑아. "
" 네? "
" 고맙다. "
" 뭐가요? "
" 그냥 다. "
그녀는 피이- 하고 다시금 소심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 진짜 성의없... 하으... 가, 간지러워요. 아흐흐, 간지럽단 말이에요. 귀를 그렇게 빨면... 아흐, 아흐흐, 간지러워요 선배님. "
간지럽다며 몸을 뒤틀던 주랑이 윤석의 목을 껴안고, 두 사람의 시간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서로가 서로를 탐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 까지. 두 사람은 뜨거운 날 숨을 내뱉으며, 그리고 서로가 뱉은 그 뜨거운 숨을 삼키면서 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한차례 용암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두 사람의 시간을 휩쓸고 지나가고, 또다시 뜨거운 불길로 만들어진 폭풍이 휘몰아쳐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뜨거운 날숨과 함께 새어나오는 야릇한 신음소리와 살이 맞닿는 소리. 물기를 머금은 무언가가 질척거리는 소리. 그리고 희열에 가득찬 마지막 소리까지. 두 사람의 시간을 뜨거움과 갖가지 소리가 가득 채워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윤석이 주랑의 몸을 덮었다. 주랑도 숨이 찬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했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윤석의 몸도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윤석이 주랑의 귓가에 속삭였다.
" 사랑... 한다. 이주랑. "
주랑이 웃었다. 정말 기뻐 보였다. 기쁜 눈웃음 가운데엔 이슬도 조금 맺혀있었다. 정말 예쁘게 웃었다.
" 저도... 사랑해요. "
주랑이 배시시 웃었다.
" 쩜쩜쩜 뒤에 그 말... 듣는데 오래 걸리지 않아서 정말 기뻐요. "
============================ 작품 후기 ============================
적나라한 묘사, 자극적인 H씬은 뺐습니다. 그런 글들은 워낙에 많기도하고 전 워낙 순수한 (이라고 주장하는) 작가라서요...H씬. 그게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