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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플레이어-94화 (94/244)

00094  남자는 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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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계일학. 닭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은 아무래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낭중지추. 주머니 속에 송곳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철중쟁쟁. 같은 쇠붙이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맑은 소리가 난다. 하여튼 무언가 하나가 다른 것들에 비해 특출나게 뛰어나다는 뜻이다.

지금이 그랬다. 빌라의 격을 뛰어넘은 빌라들이 밀집한 이 곳에서도 가장 특출난 빌라. 사실 편의상 빌라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빌라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대저택정도가 되겠다. 하얀색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집이다. 그런데 이 담벼락이 그냥 담벼락이 아니다. 윤석이 주문영창에 관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더욱더 넋나간 표정을 지어야만 했던 수희는 진심으로 입을 쩍 벌렸다. 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내어 높이 솟은 담벼락을 올려다봤다.

" 세상에... 이건 성이야 집이야?  "

담 높이가 거의 5 미터는 넘어보였다. 그 담은 전체적으로 화이트톤의 컬러인데 중간중간 투톤 그레이로 색상의 조화를 이뤄내 품격을 높였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형상화한 듯한 정교하고 미세한 조각이 담벼락에 새겨져 있어서, 그 담벼락 자체만으로도 이름난 예술품 같아 보였다. 정확한 재질은 알 수 없었으나.

" 이, 이거 설마 대리석이야? "

대리석같은 느낌에 수희는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윤석은 글쎄다, 짧게 대답하고선 얼이 빠진 수희의 팔목을 잡고 반쯤 질질 끌어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을 것만 같은 철문은 옅은 카키색 바탕의 도화지였다. 그 도화지 위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라 짐작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느 이름난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새겨넣은 것 같았다.

" 세상에... 문이 저절로 열려..."

수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엄청난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런데 소음도 크지 않았다. 그릉- 그릉- 낮은 소리가 날 뿐.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윤석이 피식 웃었다.

" 저기 카메라 보이지? "

" 으 응. 보, 보여. "

" 저기로 보는거야. 우리 가족이 오면 문 열어주게 돼있어. 사람을 따로 고용했거든. "

" 세상에... 문 열려고 고용한 거? "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것 저것 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 일이지. 뭐... 문이 안 열린다 싶으면 그냥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면 돼. 옆에 작은문 봤지? "

실은 살다보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때가 훨씬 많을거라 생각은 된다만 윤석은 일부러 허세를 부렸다. 차에서 내린 윤석은 네 오빠가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라고 주장하듯 그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턱을 치켜 세우며 팔자걸음으로 에헴- 하고 걸었다. 평소라면 수희는 " 아니꼬워! " 라고 타박을 놓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궁전인지 성인지 저택인지 빌라인지 그 정체성이 도무지 모호한 이 집이.

" 이 집이... 진짜 우리 집이야? "

" 그래. 거품 욕조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안쪽엔 초호화 목욕탕도 있고. "

윤석이 피식 웃었다.

" 피부관리실이랑 마사지실, 개인 헬스장도 따로 있어. 필요하다면 출장형식으로 피부관리사랑 마사지전문가, 트레이너도 고용할 생각이고. "

" 세상에... 세상에... "

수희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놀라서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집 안을 둘러보는데 정말 이게 집인지 아니면 뭐 이상한 다른 세계에 빠져든건지 도통 분간이 안 됐다.

" 여기가 네 방. "

전체적으로 옅은 분홍색톤의 방이다. 침대는 퀸사이즈. 최고급 원목과 자재를 사용해 만든 최상급 침대이고 침대보와 이불 역시 최고급 비단이다. 인테리어 자체는 분홍색이지만 침대와 화장대를 화이트톤으로 매치해 우아함을 높였고 화장대 위엔.

" 엄마나... "

백화점 상품권 100만원짜리가 놓여져 있었다. 수희는 그걸 들더니 고개를 휙휙 좌우로 내저었다. 그리고서 두팔로 무언가를 공손히 들듯 들어 윤석에게 뻗었다. 잘 보면 팔이 미세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돼, 됐어. 이런 거까지 안 줘도 돼. "

" 이사한 기념이야. 껌이나 사먹어. "

100, 100만원짜리 껌이 어디 있냐! 수희는 눈을 흘겼다가도 침을 꿀꺽 삼켰다.

" 그냥 오빠가 너한테 평소에 잘해주는 것도 없고 그래서 그냥 껌값 준거니까 이걸로 화장품이라도 좀. "

윤석이 말하는데 수희는 비명을 질렀다.

" 으악! "

100만원짜리 상품권이 있긴 있는데.

" 이, 이게 며, 며, 몇 장이야? 헐...헐... "

한 장이 아니었다. 빼도 나오고, 또 빼도 또 나오고, 또 빼도 또 나오고, 나와라 얍! 하면 뿅!하고 나오는 요술방망이처럼 계속해서 나온다.

" 돼, 됐어. 나 진짜 괜찮으니까 주랑이 언니나 많이 챙겨줘. "

" 이게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을 것이지. 뭐 이리 말이 많아? "

" 그래도... "

수희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나는 해줄 수 있는게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런 말을 할 것 같다.

" 그래도는 무슨. "

윤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퉁명스레 말하지 않으면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다.

" 가족이잖냐. "

수희도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일부러 찡그렸다. 언짢은 척 했다.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고 윤석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보면.

' 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

물론 오빠가 무언가를 요구한다거나 무슨 대가를 생각하고 잘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서도 그래도 마음 한켠이 무겁긴 무거웠다. 이렇게 받기만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또 그렇다고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다.

" 가족이면 그냥 서로 대가같은 거 생각 안하고 살면 되는거야. 무엇보다 넌 좀 멍청하긴 하지만 내 하나뿐인 동생아니냐. "

" 오글오글. 오글오글. 오글오글. "

윤석의 말에 마음이 불편해진 괜스레 '오글오글'을 주문영창처럼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으레 민망할때면 그렇듯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톡톡 쳤다. 결국 오빠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 고마워 오빠. "

말 한마디 정도밖에는 없는 것 같다. 목소리는 조금 퉁명스러웠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 고마우면 알아모셔. 난 진짜 대단한 오빠니까. "

윤석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아니꼬울 수가 없다. 그런데 윤석을 22년간 봐왔던 수희는 안다. 괜히 저렇게 과장된 모습으로 우쭐대고 서있다는 건 오빠도 나름대로 민망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 그래도 좋긴 좋다. "

" 뭐가? "

수희가 콧잔등을 매만지며 윤석의 시선을 피했다.

" 그 왜... 이런 오글오글한 건 좋다고. 뭐랄까 가족이랄까..."

윤석은 헹! 코웃음 치고 걸음을 옮겼다.

" 오빠. 어디가? "

" 똥 싸러! "

수희는 윤석의 퉁명스런 목소리에 더러워 똥쟁이! 하고 말했지만 이내 멀어져가는 윤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생긋 웃고 말았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하여튼 민망해지면 맨날 똥 마렵냐! 진짜 웃긴 오빠라니까. "

바보 멍청이. 하고서 하얀색 화장대 위에 올려진 상품권을 집어들었다.

" 이건 고이고이 모아놓고 나중에 오빠랑 주랑언니 선물이나 사야겠다. "

* * *

김웅민은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캡슐을 발로 뻥뻥 찼다. 서민들에겐 그리 싸지만은 않은 가격. 무려 30만원이나 하는 캡슐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 개같은 년이! "

파직! 30만원짜리 전자기기. 유토피아 접속캡슐이 찌그러졌다.

" 개같은 년...씨발 좆 같은 년이... "

웅민은 이를 악물었다. 동시 접속자가 비록 5억에 이르는 게임이라지만 그는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다른건 몰라도.

' 샤무라고 했겠다... '

이를 바드득 갈았다. 샤무라는 건 안다. 이미 샤무의 길드원들에 대해 상당부분 조사를 많이 해놨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까싶어서 준비해놓았기도 했고, 자꾸만 마탑에 대항하려는 샤무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게임의 일을 현실로 가지고 왔다가는 괜히 큰 일이 될 수 있어 참고 있던 중이었다. 일명 '현피.' 게임의 일로 인해 분을 참지 못해 현실에서도 불상사가 일어나는 사건이 증가함에 따라 '현피'는 이슈화 되었고 그것은 현재 강력한 제재대상이다. 그건 전세계적인 추세였고 실제로 미국에선 '현피'때문에 종신형을 살게된 경우도 몇 번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쓸 심적 여유가 없었다. 자꾸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산소가 배출되지 않고 가슴속에 쌓여, 심장이든 폐든 내부의 장기들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톡, 건드리면 빵! 터져버릴 듯 했다.

' 개 같은 년이... 감히 나를 건드려? 이 김웅민을? '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 씨팔!!! "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아 캡슐을 발로 또다시 차버렸다. 4억짜리 아이템. 그것만해도 미칠 노릇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4억은 물론 큰 타격이다. 그러나 '마도사'의 직위를 빼앗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마도사'는 중요했다. 4억 2천만원짜리 아이템 -실은 돈이 있어도 물량이 없어서 구할 수 없는 희귀템-의 손실과 더불어 도태까지 당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신상털기 들어가! 뭘 물어! 그 년 말이야 그년! 그래! 그 씨팔년! "

'그 년'은 인터넷 까페를 통해 들어왔었다. 까페를 통해 이 쪽 파티를 맺었고.

" IP 추적을 하든 뭘 하든 어떻게든 알아내란 말이야! 씨팔년이 4억도 모자라서 감히 날 죽여? 김웅민을? 이 좆같은 년이! "

시간이 흘렀다. 생각보다 알아내는 작업은 어렵지 않은 듯 했다. 유토피아의 방화벽을 뚫고서 상대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만 그게 아니었다. 수희는 인터넷까페를 통해 이번 파티에 참여했고 그 까페엔 수희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 알아냈습니다.

" 어떤 년이야? "

- 대학생입니다. 전 거주지까지는 알아냈습니다만... 지금은 이사를 한 모양입니다.

- 그래서 그 이사한 곳이 어딘데?

- 조만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아내. 뭐하는 년인지. 지금쯤 횡재했다고 좋아하고 있을테니까 아이템 경매 사이트도 잘 뒤져보고, 그년 부모가 뭐하는 새끼들인지도 알아보고. "

이마에 핏줄이 솟는 느낌이다. 어떤 년인지는 몰라도.

"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잘근잘근 밟아주겠어. "

============================ 작품 후기 ============================

30만원짜리 걍 부수는 거 보면 꽤 부자고 힘 좀 있는 거 같은데... 너 돈 좀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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