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7. 끔찍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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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생활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라고 해야 할까.
음, 뭐 그냥 새로운 느낌이다. 유은하로써의 삶이. 원작과 아카데미에서도 제법 잘 나가게 되었으니까.
히로인 자리에서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한수지에게도 내가 레즈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역시 암만 생각해도 남자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더라. 뭐 이후에 한수지가 친한 척하는 것이 짜증났는데. 꿈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때부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창 밖을 쳐다보던 나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저기 책상 쪽에 검은 인형 같은 것이 보였다. 검은색 실루엣이라고 해야 할까.
막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내 감으로 저것은 귀신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원작 자체가 공포 스릴러물도 아니었고, 유은하도 뭐 어디다 원한살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저건 대체 뭘까?
그래서 한 번 꿈속의 아카데미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그거 정령같은데요??”
“정령이면 정령을 다루는 네 눈에 보이는 것이 정상 아닐까요?”
“어, 확실히 그건 그러네. 여기도 있어?”
“응, 저기 교탁 앞에서 고개를 흔들고 있어. 마치 조는 것 같은데.”
약간 자세가 엉성하다. 마치 투명 의자에라도 앉은 것 같은 모습에 꾸벅꾸벅 조는 것 같은 모습.
정령을 볼 수 있는 이계 2세대 출신인 레이나가 보지 못한다면 저것은 그럼 정말로 귀신인가?
“그럼 성좌아니야?”
“성좌?”
“응. 내 성좌님이 그랬어. 성좌는 다양한데, 그 중 칙칙한 자들도 있다고.”
저건 뭐랄까 칙칙한 수준이 아닌데?
검은 연기같다고? 저게 성좌라면 나는 당당히 화신의 자리를 거부할 것이다.
역시 하나도 둘도 이것은 꿈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이상한 것이 존재할 리가 없지 않나?
“……아, 검은 연기인 줄 알았는데 저건 정장이었네.”
뭐랄까. 점점 저 칙칙한 것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주말부터 계속 보이던 저 이상하고 칙칙한 성좌님도 이제 슬슬 익숙해졌다.
그냥 눈에 이물질이 낀 느낌이라고 할까. ‘원래 내 인생에 저 칙칙한 존재는 항상 존재했다.’라고 여기니 마음이 편해졌다.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점점 진화하겠지.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저기. 저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다 사줄게.”
“어, 음. 그럼 스무디.”
불꽃창녀 한수지가 본격적으로 친한 척을 해댔다. 정확히 말하면 내 남친행세를 하고 자빠졌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라는 말이 있다.
한수지는 확실히 초반에는 성격 더러운 년이었으나, 지금 내게 하는 짓만 보면 단물 쪽쪽쪽 할 수 있을 것 같다.
설마 그까짓 키스 때문인 건가.
아니면 더 맞고 싶어서?
한수지가 딸기맛 스무디를 사오길래 쭉쭉 빨아줬다.
“야, 한수지.”
“어?”
“만일 네 앞에 너만 볼 수 있는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할래? 정령과 성좌도 아니라면.”
“귀신?”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자.잠깐. 그.그럼 환상이라던가? 환각이라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마침 오늘 환상을 다루는 교관님이 오시기로 했잖아.”
아, 환상. 있었구나 그 인간이.
설마 헬조선 학창생활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대충 감은 온다.
“누군데?”
“신검의 동료이자, 과거 빌런연합을 무너트린 주축 중 하나인 환상의 레베카.”
빌런연합. 전작에서 존재하는 단체로 유진석과 그 동료들에 의해 토벌되었다가 잔당이 평양에서 대규모 게이트를 열었다. 전작의 중반부부터 후반부까지 유진석과 그 동료들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그 중 환상의 마법사 레베카는 몇 안 되는 환상을 다루는 마법사로 빌런연합을 환상에 빠트려 대규모 토벌을 했다.
그래. 그 인간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 저 칙칙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 * *
환상의 레베카는 현재 마법계열 헌터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마법사로 환상을 다룬다.
그런 인물이 선생으로 나타났으니, 꿈과 희망이 넘치는 우리 헌터 후보생들은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레이나도 마찬가지였다.
“유은하! 저, 레베카 선생님 팬이에요!”
“아, 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팬이라니깐요?”
“아니, 내가 님이 빠순이 짓하는 것까지 알아야 해요?”
“유은하. 당신 신검의 동생이잖아요? 연줄 이용해서 레베카 선생님의 사인을 받아줄 수 있지 않아요?”
“시간남으면 해드림.”
“꼭이에요?”
어휴 귀찮아.
“너희들의 마법을 가르칠 담당은 나 레베카다. 내가 누군지 아는 이들도 있겠으나, 내 시간에 혹시라도 딴짓하는 놈 있으면 사내새끼들은 발기부전을, 계집애들은 평생치 생리통을 매달 겪게 만들어버리겠다.”
시발, 존나 끔찍하네.
한창 때, 구멍만 보면 쑤시고 싶을 남자들이 전부 거세당하는 격이 아닌가. 생리통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내 수업은 마법을 전공할 아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그렇지 않은 녀석들에게는 마법에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식이다. 질문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업끝나면 바로 물어봐야겠다.
“자, 그럼 지금부터 너희들이 할 일을 알려주겠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마법내성을 기르는 훈련을 하겠다. 오늘 하루는 단체로 내성기르는 훈련부터 하고 다음부터 파트를 나눌 것이다.”
“그 환상이 정확히는 무엇인가요?”
“그래. 너희들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십수년의 인생에서 보기 힘든 최악의 환상을 보여줄 생각이다.”
십수년 인생에서 가장 보기 힘든 최악의 환상이라. 그거 참 기대가 된다.
방구석 여포짓이나 하던 유은하. 회사에서 중노동만 해가며 반 노예생활을 하던 기억. 그보다 더한 환상이 있을까.
그래도 일찍 끝내고, 자유시간을 준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너는 무슨 환상을 봤어? 나는 접근금지된 던전에 갔다가 죽을 뻔한 환상을 봤어.”
쟤는 장난꾸러기였고,
“나는 포경수술 다시 하는 환상.”
쟤는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포경수술일 정도로 행복하게 살았구나.
더 말해 무엇하랴.
레베카는 지금 사기를 치고 있다.
보기 힘든 최악의 환상이 아니라 생도들 기억 속에 잠재된 끔찍했던 기억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원작의 유은하는 무엇을 봤는지 모르지만, 자기 오빠 욕을 엄청 해댔다.
어쩌면 아카데미를 보내겠다고 싸우던 기억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자, 다음은 이번 기수 중에 최정예인 유은하, 최시우, 레이나.”
나야 여유롭다. 내게 있어서 악몽이 있다고 해봐야 회사에서 노예짓 했다던가. 유은하로서 징징거리던 기억 밖에 없으니까.
…
……
“어? 으아아아악!”
여기도 저기도 머리를 짧게 깎은 빡빡이 같은 애들이 한자리에서 반듯하게 자고 있다.
오, 하느님 맙소사. 군대라니요.
한 동안, 그런 끔찍한 꿈은 계속되었다. 입대 첫날이 한시간 즈음은 반복된 것 같다. 같은 장면만 계속해서.
“시발. 죽을 뻔했네.”
환상은 끝이 났다.
너무 오바했다. 군대 입대한 거 가지고 뭘.
그 다음에는 회사에서 야근에 외근에 시달리며 지쳐 쓰러졌다. 또 그 다음에는 유은하로서의 기억이다. 생각대로 오빠한테 징징거리던 시절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 아?”
가만히 눈을 뜬 내 시야 한쪽에서 은발이 된 최시우가 성검을 휘두르고 있다.
상대는 이상한 검은색의 인형.
아. 아카데미에 괴인이 습격했을 때의 일인가?
분명 이때는 유은하가 SS급 코어가 몸에 박혀 죽을 때였다.
내 몸은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이고 싶은데, 마치 그때를 재현하는 것 같았다.
콰직!
최시우와 싸우던 마인이 어느새 내게로 다가와 내 가슴에 괴수의 코어를 박았다.
“켁!”
“신검사용자에게 빼앗기느니 도박이라도 해보는 것이 낫겠지. 자 그 고통을 이겨내면 너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고, 아니어도 이 아카데미는 끝장나겠지. 커흑!”
괴인은 내 몸에 혼심의 힘을 다해 코어를 박고 제멋대로 죽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심부를 시작으로 몸 전체에 살과 뼈가 끊어지고 재구성되는 고통을 느끼면서 점차 눈앞이 번쩍거렸다.
이건 분명 죽은 거다.
내 몸은 괴수의 코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수없이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때로는 화장실에 갇혀있는 내 몸에 박는다거나, 때로는 납치당해서 박힌다던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저 끊이지 않는 비명을 계속 지를 뿐이었다.
* * *
“꺄.하아아악 흐으윽. 아아아아아악!”
유은하가 제 가슴을 잡고 온몸을 배배 꼬았다.
비명만 없으면 그 행동이 무척 요망해보일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유은하의 표정이 그것이 아니라고 절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젠장! 당신. 대체 유은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유은하를 죽이려는 거에요?”
유은하의 친구로 보이는 학생들이 대뜸 찾아와 귀가 울리도록 시끄럽게 쫑알거렸다.
“레베카! 이 망할 년! 대체 은하에게 뭔 짓을 한 거야!”
유은하의 담임인 김지혜는 아예 레베카의 멱살을 붙들었다.
“하던 대로 했을 뿐이야! 오히려 저 녀석이라면 끽해야 진석이랑 싸운 것이 전부일 테니 쉽게 풀려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 거짓말 진짜냐?”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진석이 여동생인데. 오히려 편애를 해줬으면 해줬…….”
“이년이 지금 마법 담당교수란 작자가 애들을 편애해?”
“어쩌라는 거야! 이 방망이년아!”
한참을 비명과 신음을 흘리던 유은하는 최시우의 등에 업혀 그대로 보건실로 직행했다.
“일단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면 될거야.”
다행이다. 멋대로 유은하를 친구1, 라이벌로 삼았던 최시우와 레이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레베카를 노려봤다.
“교수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솔직히 해명부탁해요!”
레베카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이래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이란 귀찮다.
“나중에 유은하의 상태를 보고 말해줄게.”
레베카는 유은하를 내려다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눈을 놓치지 않은 김지혜는 최시우와 레이나가 퇴실하자 슬쩍 레베카에게 물었다.
“너 왜 그래? 그러고 보니 확실히 너 하는 짓이 이상해. 유은하한테 무슨 일 있었지? 하던대로 한 거 맞아?”
“김지혜. 얘 분명 유은하 맞지? 아니. 유은하가 맞으니 그런 것도 있는 건가.”
그래. 유은하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너무 많다.
“왜 그러냐니까?”
“환상마법은 술사도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도 알거야. 그렇지?”
“어."
“왜 얘는 수백번이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죽는 것을 환상으로 보는 거야?”
대체 어째서? 경험한 것만이 떠오르는 환상을 왜 이 아이는 수백번이나? 중간부터 세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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