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0. 방벽을 넘어가기 위한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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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협회가 있는 건물은 청와대와 비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컸다.
입이 떡 벌어져서 구경하고 있는데. 정장을 잘 차려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지? 은하양.”
“의외로 오.빠에게 부회장님의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입에 오빠란 단어가 영 붙지를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정나윤은 유진석의 히로인이답게 엄청 예쁘다.
흑발의 청초한 분위기라고 할까. 나중에 자빠트려서 앙앙거리게 만들 수도 있으니 미리 손을 써두려는 것이다.
내가 회장 최철식이라면 정나윤을 책상 밑에 넣어뒀을 텐데.
“정말?”
“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필요하면 직접 찾아올 일이지. 솔직히 오는데 귀찮았지만 정나윤의 호감을 올리고 싶었으니까.
“일단 은하양도 대충 예상하고는 있죠? 그래서 딱히 묻지 않고 찾아왔을 테니.”
“네.”
“우선 은하양은 협회장님께서 직접 불렀거든요. 아, 저기 오시네요.”
저 멀리서 이쑤시개로 이 사이를 쿡쿡 쑤시는 중년의 남성이 걸어온다.
내가 회사원이던 시절. 부장님이 딱 저런 캐릭터였다.
김치찌개 냄새 풀풀 풍기며 이쑤시개로 이를 쑤셨지.
“커흠. 은하양. 어릴 때보고 오랜만이로군.”
어 반짝거리는 대머리다.
고유능력이 혹시 태양권 아닐까? 땀이 흐르는 머리를 쓰윽 문지르는 것을 보니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어디서 봤었나요?”
“엄청 어린 시절이야. 김재수와의 싸움에서 다친 곳은 없고?”
“네. 괜찮습니다. 다만. 신검사용자인시우가 좀.”
암컷이 되어가고 있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솔직히 아래도 사라진 것 같은데, 아직은 좀 너무 슬랜더형이다.
성냥개비라는 느낌? 남자의 근육이 빠지고 점차 변화하는 것 같으니 군침 흘리면서 지켜보면 될 일이다.
“최시우는 협회에서 충분히 보상을 할 것이네. 이렇게 자네를 부른 까닭은 협회 측에서 헌터로 일해주었으면 하네.”
빌런이 될 건데요. 라고 말하면 제 2의 김재수가 되는 것 같으니 참기로 했다.
애초에 협회에 들어갈 일도 없고 말이지.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나중에 여러 길드의 계약조건을 받고 괜찮은 곳 들어갈 생각이에요.”
이렇게 말해야 나중에 나를 귀찮게 안 할거다. 왜? 지금 국내 탑 길드의 마스터들은 대부분 유진석의 동료들이니까.
심지어 히로인들이 길드마스터다. 그 탓에 서로 연적이라 길드간의 사이도 좋지 않고, 남자들의 경우에도 지금까지 사랑노름이나 하는 유진석의 히로인들이 엿같아서 서로 선을 그어뒀다.
“커흠.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어쩌라고.
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피면서 선언했다.
“저는 예쁘고, 강하고,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미 다른 길드에서도 컨택은 생각하고 있을걸요?”
공주병 걸린 여자애의 발언.
반은 연기지만, 반은 진심이다. 그러니 동성이라도 반하는 여자들이 나오는 거다.
즉, 여자들도 반하는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
“무슨 조건을 걸어주면 되겠나?”
“그 전에 생도라면 어차피 헌터활동에 제약이 생길 텐데요?”
본격적인 헌터활동은 아카데미 졸업 후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 전까지는 혼자서 자율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고,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더라.
“음. 그래서 일단 이름값만 빌리려고 하는 것이지.”
“그럼 내 이름값을 빌리는 이른바 대여료를 지불하고 싶다. 이 말씀이시군요.”
아무래도 내 이름값이 크게 오른 모양이다.
S급 괴인 김재수를 토벌했으니, 헌터들 사이에서는 아마 물밑으로 꽤 인기있지 않을까.
이거 잘하면 이 일을 빌미로 꽤 많은 걸 얻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뭐 그렇지. 우리도 어린 생도의 미래를 강제할 생각은 없어. 졸업 후에 원한다면 다른 길드와 조율해서 넘어가도 되네.”
이쪽은 상당히 급한 모양이다.
그럼 걸고 넘어갈 것이 있을 것 같다.
갑과 을이 명확한 이상 먹을 건 먹어야지.
“조건이 있어요.”
“말해보게.”
“돈은 많이 주지 않으셔도 되니까. 방벽 너머로 가게 해주세요.”
방벽 너머는 즉, 인천을 비롯한 격리된 몇 몇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대격변으로 평양이 초토화된 북한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 격리된 지역은 괴인들이나 빌런들이 주로 둥지를 틀고 있다.
“경기, 부산이나 전라도, 제주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방벽 그 자체를 넘겠다고? 인천같은 곳 말인가?”
“네.”
“방벽을 넘으면 완전 무법지대네. 그래도?”
“네.”
내 말이 뭐가 이상한지 최철식과 정나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 그저 젊은 애가 자기 실력 믿고 나댄다고 생각하겠지.
“이봐. 실력에 자신있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위험해. 젊은 혈기에 실력믿고 오만하게 굴다가 죽는 사람 여럿봤어. 무엇보다 은하양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유진석에게 죽네.”
“실력을 증명하면 되는 겁니까?”
“빌런들도 상대할 수 있네.괴인이나.”
그걸 누가 모르나. 그래도 설득해야겠지.
방벽 밖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목표가 확실치 않은데 허락해줄 리 없다.
아마 내 실력이 검증된다고 해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방벽 밖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뭐지?”
“침식지대를 탐사하는 것. 대량의 마석도 구할 수 있잖아요? 감춰진 게이트를 찾을 수도 있고.”
'마기에 의해 침식된 지대. 그곳은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법상으로는 수복해야 하는 지역으로만 표시될 뿐이다.’
한국에서 도시기능을 하는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그런 설정이다.
침식지대는 그래서 협회에서도 미지의 영역이라고 불린다.
마기에 침식된 괴인들이 매복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만큼, 수도에서 죄를 저지른 빌런이나괴인들이 도망치는 지역도 그 방벽 너머의 영역이다.
통행증없이 방벽을 넘으면 곧바로 빌런으로 찍힌다.
“후우. 정 그렇다면 일단 실력을 확인해보겠네. 그건 괜찮겠지? 애초에 자네 실력도 보고 싶고.”
“네.”
“때마침 백호길드의 백청강이 와 있지. 그놈을 상대로 한 대라도 일격을 먹이게. 그럼 방벽 너머로 갈 수 있는 통행증도 주고, 장비도 지원하지.”
“예.”
내가 강하다는 증명만 보이면 되는 거니 어려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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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네가 진석이 동생 유은하구나.”
“오, 존나 예쁨. 오늘부터 내 여동생임.”
약간 늙어보이는 남성과 사탕을 빨고 있는 조카뻘의 소녀가 나를 흥미롭게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언니도 예뻐요.”
저 늙어보이는 양반이 백청강이다.
백청강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하얀 도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이명은 ‘강철의 사내’. 그 이명답게 탱커짓이 아주 뛰어나며 온갖 격투기술로 괴수들을 때려잡는다.
그냥 게임 속에서 격투가 포지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백청강의 옆에서 마도기어를 만지작거리는 검은 머리에 내 또래로 보이는 소녀.
이름은 서지연.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와 친구먹을 외모다.
이명은 ‘죽음의 사진가’
쟤는 능력이 은근히 사기다.
양손으로 네모를 만들어 그 사각형을 통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찰칵’이라는 보이스 커멘드를 통해 사진처럼 찍어낼 수 있다.
그 사진을 찢는 순간, 사진에 담긴 공간 자체가 사라진다.
그 사진을 불태우면 그 공간이 전부 불타버린다.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지.
물론 강한 괴인들의 경우에는 사진기능이 먹히지 않는다. 대신 그 사진을 통해 상대를 자신의 심상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 세계는 서지연의 세계라 그녀가 바라는 대로 적을 농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예쁘다.
대화체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저것이 능력사용조건이다.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영상으로만 봤지만, 정말 마음에 듬. 진석이한테는 너무 아까움.”
서지연이 내 볼과 손을 만지작거린다.
나도 만지고 싶지만, 일단 연장자라 참았다.
“실은 백청강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음?”
협회장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은하양 실력 좀 확인해주게.”
“설마 협회 헌터로 만들 생각입니까?”
“탈모 노친네가 미쳤음? 협회 들어갈 바에 빌런이 되는 게 나음. 공무원이랍시고 월급도 쥐꼬리만큼 주잖슴.”
서지연이 대머리 노친네의 되도 안 되는 욕심에 치를 떨었다.
젊은 여자애가 경멸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자 최철식이 두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이유가 있네. 일단 은하양의 이름값만 빌릴 생각이고. 사실 방벽 너머로 가고 싶다고 해서. 자네한테 한 대라도 맞출 수 있으면 허락하기로 했네.”
“방벽? 굳이 넘어갈 필요가 있음?”
서지연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방벽 너머로 가는 것은 일반 헌터들도 쉽게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내가 말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겠지.
“그냥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
“오 그거 마음에 듬. 나도 예전에 자주 넘어갔었음. 김재수를 잡을 수 있으면 충분한 거 아님?”
이미 능력은 선보였으나, 협회장 최철식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싶을 거다.
왜? 만에 하나라도 내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 오빠 유진석이 협회를 엎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도 혹시라는 것이 있으니까.”
“나는 괜찮은데. 유은하는 어떻지?”
“해보죠 뭐.”
백호길드 길드 마스터 정도면 상대할 수 있다.
서지연까지 상대하려면, 악룡의 권능까지 발휘해야겠지만, 저 격투가 백청강은 약하다.
유진석 세대에서 가장 약하다.
괴수만 상대할 때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격투가라 전적으로 마나를 이용한 체술에만 의존하는 인물이라. 동세대에서 마나를 다루는 다른 직업에 밀린다.
내 대답에 최철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들을 지하에 있는 대련장으로 안내했다.
“결계 쳐져 있으니까 잘들 해보라고.”
대련장에 결계를 걸어 필요이상의 힘은 사용하지 못한다.
이건 조금 아쉬운데, 그렇다면 나 역시 힘을 쓰는데 어느 정도 제한이 생긴다.
“자 원하는 무기를 들어봐. 나는 이대로 싸워주지.”
“오세요.”
내가 저쪽에서 회사원의 인생을 살 무렵. 어렸을 때 태권도 학원을 다녔었다.
노란 띠에서 그만뒀으나 대충 폼은 잡을 수 있다.
“호오. 제법 자세는 되어있구나? 검술을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원래 예쁜 애는 뭐든지 완벽한 법임.”
“그래. 용기는 가상하다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 어디 한 번 내 주먹을 받아보거라!”
여기서 내가 백청강과 비슷한 수준만 증명해도 되겠지만, 협회는 나를 유진석의 동생인 유은하로 보고 있다.
방벽 너머로 가려면 최철식에게 보다 압도적인 힘을 증명해야 한다. 결계탓에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 어떤 공격에도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줘야겠지.
"흐럅!"
백청강이 몸에 마나를 둘렀다.
눈으로 보일 정도로 맑은 마나가 주먹에 맴돌더니 호랑이의 머리가 되었다.
저것이 백청강 스스로가 고안해낸 ‘백호권법’
백청강의 기본 버프 기술로 일단 S급 길마다운 힘을 자랑할 것이다.
그래서 피하지 않았다.
막지도 않았다.
백청강이 막강한 주먹으로 후려친다고 하면 나는 악룡의 방어력으로 밀어붙이면 될 뿐이다.
그 옛날 10억이나 죽일 때 사람들의 저항이 없었을까? 아니다. 수녀의 모습일 시절에도 수없이 나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처참하게 막혔다.
중국이 나 죽이겠다고 도시 자체를 핵 하나로 파괴한 적이 있었다.
중국군이 파괴한 도시를 보고 희생이 아깝지 않다며 기뻐할 때. 내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자 사정없이 얼굴이 일그러졌었다.
그때 상당히 즐거웠지.
그런데 저 정도 공격이 맞는다고 대수냐?
콰직!
백청강의 공격은 아주 간단하게 막혔다.
내 마나나 마기에 의해 막힌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악룡과 노력파 격투가의 차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굳은 뇌의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금강불괴?”
입이 절로 호선이 그어졌다.
나는 백청강이 순간 당황할 때, 오른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금강불괴만 아니지요.”
“잠깐, 갑자기 무슨”
화르륵!
백염은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 순식간에 백청강의 몸을 덮은 백염이 천천히 백청강의 마력을 불태웠다.
“잠깐,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어?”
“어휴. 등신새끼. 그 나이 먹고도 마나흡입하는 거에 당함?”
마나흡입. 약한 헌터가 자기보다 강한 자를 상대할 때 주로 쓰는 스킬로 마력을 흡입하여 상대가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예 마나흡입을 궁극적으로 단련하는 것이 아닌 이상, 마나흡입으로 타격을 받는 일은 없다.
그래서 저 멀리서 지연이 얼척이 없는 표정으로 백청강을 까는 거다.
한때 평양에서 대규모 혈전을 벌일 때만해도 근력만으로는 유진석과 대등했던 몸이 고작 마나흡입으로 저런 꼴이니까.
다만 나는 말했듯이 흡입이 아니라 태우는 거다.
“아니, 조금 다르다니까?”
“당연하죠. 제가 사용하는 것은 저급한 마나흡입 따위가 아니니까요.”
“그럼 뭐임?”
서큐버스에게 정력이라도 빨린 듯 흐느적거리던 백청강은 이내 쓰러지고, 대신 물어본 것은 지연이었다.
“아예 불태우는 거에요. 백청강 삼촌의 몸에서 마력을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방벽 너머의 흘러넘치는 마기도 불태울 수 있다는 건가. 백염은 그런 기능이 있는 건가?”
최철식도 감탄했다. 대머리가 유독 반짝인다.
“네. 정화와 파멸의 불꽃이죠.”
“이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음.”
“좋아. 통행증은 만들어주지. 인천과 서울 관문에 연락도 해둘 테니 걱정말게. 유진석에게만 걸리지 않도록 해.”
결국 허가가 떨어졌다.
“네.”
무려 유진석세대의 서지연이 공인했으니, 최철식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중에 유진석이 한마디한 것 같기는 하다.
자기 동생이 위험지역으로 가는데 어떤 놈이 받아들여.
“아니, 삼촌으로 불릴 나이는 아닌데.”
“닥치고 거울보고 말하셈. 양심도 없음?”
“이 망할 계집애같으니. 어, 그럼 음. 이 삼촌이 있는 길드는 어떠니? 졸업하고 3억 계약으로…….”
가만히 확실히 백청강이 늙기는 늙었다. 지금 20대일 텐데 무슨 40대 같다.
무공을 잘 못 배우면 저리 된다는 것일까.
심지어 저기 들어가면 이상한 쫄쫄이 입고 격투기나 배울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무협길드는 좀.”
사회적인 위치와 체면이 있지. 명색이 드래곤이 저런 곳에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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