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6. 단체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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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리아의 새로운 취미를 들춰보기로 했다.
이거 SM물이다. 전에 한 번 읽은 소설인데 하녀가 지하에 자기 여주인을 가두고 귀갑묶기로 꽁꽁 묶어 괴롭혀대는 장면이 있다.
혹시나 싶어 주워서 봤는데, 진짜 내가 아는 그런 내용이었다.
“호오. 호오. 이거 참.”
“도.돌려주세요.”
내 손에서 이 백합물을 탈취하고 싶은 모양인데. 힐러가 딜러를 근력으로 이길리가 없다. 내 손에 쥐어진 이 백합물은 이제 내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네가 여주인이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내가 여주인이 되기를 바라는 걸까?”
“따.딱히 그런 건.”
딱히 아니라고 하면서 부정하지는 못한다. 말 그대로 나와 자기 중 한 명이 여주인 역할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거 참. 수녀는 이래서 곤란하다니까.
어쩔 수 없다. 이 변태 수녀가 조금 더 의욕있게 싸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니.
“나 귀갑묶기 할 줄 알거든? 이번에 잘하면 내가 묶어서 하루밤낮 암캐처럼 다뤄줄 테니까 열심히 해.”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원래 이런 캐릭터들이 아닌데. 레이나나 한수지를 비롯해 히로인들이 죄다 M속성 레즈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야 좋지. 이전의 구버전 아지다하카도 온갖 재앙을 몰고 다녔으나, 그저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거보고 성적 쾌락을 느끼는 정말 구제불능 변태는 아니었다. 나름 마음에 드는 여자들은 먹고 다녔다.
그 탓인지 나도 좀 더 그쪽으로 자극받는 상황이고.
“누.누가 바란데요? 흥. 제가 힘이 안 되니 억지로 당해주는 것 뿐!”
“그런 거 치고는 여기가 굉장히 뜨겁고 습기가…….”
“마.만지지 마욧!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안 보는 곳에서는 해도 된다는 말이겠지?”
내 말에 로자리아는 볼을 붉혔다.
딱히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 영국의 수녀님께서는 나한테 당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럼 그렇게 해줘야겠지.
한참 만지작거리면서 슬쩍 화장실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어떤 백인 소년이 우리가 가는 길을 막았다.
“이야, 로자리아양.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런던에서 만나고 우리 1년만 아닌가요?”
금발의 스윗하게 생긴 남자. 그냥 서양의 훈훈하게 생긴 백인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우리 앞을 틀어막았다.
“오, 과연 로자리아. ‘백염의 검희’로 한국 헌터협회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유은하양과도 어느새 친분을. 역시 나의 여자에요!”
“하.하하. 알렌. 그런 말은 부디 그만. 우리는 딱히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로자리아는 이 영국스윗남을 향해 눈을 떨다가 슬쩍 내 눈치를 보고 있다.
“후후. 이미 우리가 몸과 마음이 엮여있는 것은 전생에서 쭉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렌이라 알렌. 그래. 로자리아에게 달라붙는 쓰레기였지.
원작에서는 결국 최시우에게 물리치료받고 세상 하직하는 빌런이다.
저놈 나중 가서는 최시우를 아서왕 취급한다며 괴인으로 변했다가 최시우의 신검이 심장을 꿰뚫었다.
자, 여기서 작품설정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우리 잘나신 작가님 진짜 유은하의 설정으로는 저 스윗남 알렌은 랜슬롯의 환생. 로자리아는 기네비어의 환생이다.
전설이고 나발이고 그런 설정이다.
“아, 이런 실례. 유은하양. 나는 영국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인 알렌이라고 합니다.”
알렌은 스윗하게 웃으면서 영국의 신사다운 인사를 했다.
여기도 원래 내가 나설 자리는 아니다. 최시우가 나타나야 하는데, 원작이 비틀어지면서 내가 최시우 역할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듯하다.
당연히 로자리아 옆에 최시우라는 존재가 있을 시절에는 최시우가 남자라 알렌이 경계하였으나, 내가 여자라서 안심하는 모양이다.
당당하게 전생을 언급하여 “야! 네 여자 침대에서 쩔더라!”하고 싶지만, 전생은 전생일 뿐이다.
지금은 친절한 척 연기를 해야지.
“저에 대해 잘 아시나요?”
“김재수가 S급 헌터로서 영국에서도 활약한 존재였습니다. 그의 한성아카데미 습격소식은 영국 헌터들도 믿기 힘들어 조사해봤는데, 괴인이 되었고, 유은하양에게 토벌되었다고 하더군요.”
“네.”
나약한 김재수. 거의 중간보스급 주제에. 아니, S급인 것을 감안하면 최종보스 라인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놈이.
“기.김재수가 그렇게 대단한 헌터였어요?”
로자리아도 교회에 있으면서 그 소식은 들었었나보다.
생도인 내가 쉽게 잡았으니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나?
“네. 로자리아양. 영국 헌터들이 중국 황룡토벌에 나섰을 때, 주력이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
때 등장한 괴조를 때마침 영국에 머물던 김재수 헌터가 쓰러트렸죠.”
더 말해 무엇하랴.
김재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다. 뭐 아무튼 김재수의 뒤를 이을 자는 이 알렌이라는 놈이다.
심지어 창을 쓴다. 딱 봐도 김재수랑 겹치지 않나.
그럼 나는 내 뜻대로 저놈을 요리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여자라고 안심하는 모양인데. 단체전 끝나고 나서 로자리아랑 농밀한 영상을 찍어 보내줘야겠다.
“은하양은 원탁의 기사들도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활약하시어 영국과 한국의 관계가 보다 더 우호적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마디로 영국의 원탁도 기대하고 있으니, 나보고 출세해서 협회의 한자리를 꿰차고 원탁과 친밀하게 지내달라는 이야기.
한국과 영국은 유진석 세대 이후로 상당히 많이 친해졌다. 오죽하면 양국 헌터계를 중심으로 동맹관계가 맺어질 정도.
영국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헌터강국으로, 그런 나라와 동맹을 맺은 한국은 적어도 이 세계관에서 만큼은 국뽕 좀 빨아도 된다.
“아닙니다. 원탁의 기대를 받을 정도면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되겠지요.”
이것이 알렌과 내 첫만남이었다.
알렌은 마지막까지 스윗한 미소를 머금으며 로자리아와 내게 작별인사를 하더니, 협회에 볼 일이 있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알렌이 사라지자마자 로자리아가 나를 쳐다봤다.
“저.저기 유은하. 절대 저 사람과 저는 그렇고 그런 관계가.”
“엥? 아닌 거야?”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길래 모른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원래 유부녀나 남의 약혼녀 빼앗는 게 더 재밌는데. 쳇.”
농담이 아니다. 회사원 시절에는 조금만 호의적으로 굴어도 넘어오는 것이 유부녀와 애인있는 여자들이었다.
“이.이런 무슨. 한국에서 기대받는 유망주가 이.이런 크레이지 싸이코 레즈비언이라니. 믿을 수 없어요.”
“믿어. 앞으로 너를 평생 책임질 아서왕이 되어줄 테니.”
드디어 내가 어떤 인물인지 깨달은 로자리아가 치를 떨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악룡의 본능은 역시 백합 뿐이었다.
“당신이알렌의 여성버전 같은 기분은 왜일까요?”
“심하네. 저런 스윗해 보이기만 하는 놈과 나를 동일하게 보지 마.”
사실 영국 원탁의 헌터들은 제대로 된 놈이 단 한 두명 빼고는 오만에 찌들어있다.
알렌 같은 놈만 4명은 될 거다.
“어, 나 머리가 뭔가 띵해요. 정말이지 내가 어쩌다 이런 여자에게 걸려서.”
그런 주제에 나를 유혹하고 싶은 건지. 발정난 암컷임을 과시하는 건지 하반신의 속살에는 검은색의 요염한 가터벨트가 걸쳐진 하얀 다리가 보였다.
유혹하는 주제에 어딜. 이게 이른바 승부속옷이라는 걸까.
아무래도 오늘 단체전이 끝나고 로자리아를 먹어야겠다.
“안 돼요! 저는 흥미가 있을 뿐이지. 여자를 사랑하지는 않아요! 내가 게이물을 읽었다고 해서 동성애자는 아니란 말이에요.”
자기 할 말만 하더니, 로자리아는 쿵쿵거리며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몸은 솔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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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아카데미 B반 1조 리더 박준혁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젠장. 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생각보다 라이벌로 생각했던 상대가 너무 강하다.
유은하. A반에서 1대 신검 유진석의 동생이란 이유로 막대한 기대를 받으면서 출세한 여생도.
참으로 화가 났었다. 노력해도 명성을 얻을까말까한 B반의 자신과는 달리 저 멀리 앞서나가는 여자.
실력도 분명 과장된 것일 뿐일 텐데. 유은하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백염의 불길은 그야말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 감탄을 나오게 만들었다.
본래 원소를 고유능력으로 다루는 자는 많지 않다. 설령 마법으로 다룬다고 해도 술식도 그려야한다.
그런데 저 유은하란 여자는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백염을 사용해서 시험장 자체를 태워버렸다.
유은하의 이명은 광속. 분명 신속하게 적을 잡는 걸로 아는데. 마법까지 다루는 만능이라는 건가.
A반의 특권층이 싫다. 성적순이라면서 결국 특권층만 있는 A반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오르지 못할 나무.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는 너무 급하다.]
"그렇다면 쟤네들을 그냥 두고 보자구요?"
[내가 생전에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머리를 쓰지 않고 성급하게 굴린 탓에 이자겸의 난에 휘말리고 궁궐로 쳐들어가 방화를 한 일이다.]
"그래도 어떻게 생긴 기회인데!"
[……참아라. 참아서 무신의 길을 가라. 훗날을 기약하거라]
박준혁은 매일같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성좌의 말을 듣기도 싫었다.
조금 은 더 자신을 믿고 힘을 줄 수는 없는 것인가.
그가 한숨을 푹 내쉴 무렵. 이번에는 머릿속으로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힘을 원하는가?
누가 들어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꺼림칙한 목소리.
“누구냐!”
나라면 네가 원하는 힘을 내어줄 수 있다.
“괴인같은 것은.”
그저 괴인 따위가 아니지. 너에게 나는 폭식의 파편을 심어줄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너라도 그 신검과 백염을 이길 수 있겠지.
박준혁은 처음에 망설였다. 아무리 그래도 정체불명의 힘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떻게든 저 유은하와 최시우를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괴인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받고. 폭식의 파편을 받아들였다.
[이런 어리석은! 정녕 무신이 되지 않고 파멸의 길을 걸을 참이냐!]
성좌 무신의 목소리는 더는 박준혁에게 들리지 않았다.
이날, 폭식의 첫 번째 신자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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