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히로인을 공략함-47화 (47/331)

〈 47화 〉 46. 백화TV

* * *

* * *

눈을 뜨니 새하얀 공간이 나를 반겻다.

이 공간은 오랜만이다.

정확히 말하면 작가 유은하가 사는 공간이다. 내가 사는 방과 전혀 다를 곳이 없는 방.

그래. 심상세계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유은하는 평온한 표정으로 손으로 펜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하다하다. 신검을 침식시킬 줄이야. 신검은 성좌 중에서도 1위라구요?”

신검 따먹었다고 뭐라고 한다.

“그럼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아니, 그런 망나니짓은 회사원시절에도 많이 해봤잖아요. 여자인 지금도 그러고 싶은 거에요?”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진 거 아니야?”

내 말에 유은하는 반박할 말이 없는지 표정을 풀었다.

그래. 전세계에 재앙몰고 다니고, 사람 재미로 죽이고 먹고, 선동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시절에 비하면 여자들 가지고 노는 것은 새발의 피가 아닐까?

“부정을 못하겠네요. 그래도 하필 신검이라뇨.”

“그럼 괜히 노예로 만들었다는 소리야?”

“뭐 적이 되면 위험하겠지만. 확실히 유은하의 노예라면야 상관은 없지만요. 신검 성격이라면 지금처럼 두는 것이 확실히 나을지도.”

작가 유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그런데 침식당할 때는 어떤 기분이야? 너는 작가니까 알 거 아니야.”

아까 보니 아주 사람이 아주 활어가 되던데.

내 물음에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확실히 마약같은 설정이네요. 하지만 신검은 자신이 어떤 존재로 변할까하는 두려움과, 성좌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에 대한 배덕감. 흥분, 그 모든 것이 섞여 있어요. 전회차에서 알렌의 타락한 성좌도 봤을 테고. 자신이 신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하지 못했으니, 차라리 침식되면 어떨까하고 살짝 자포자기 마음도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그 와중에 내가 존재감까지 부정했으니.”

“네.”

그게 충격적이었겠지.

쾌락은 쾌락이고 멘탈이 부서졌을 것이다.

세계관 최강자인 아지다하카가 방식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인류를 위해 싸우는 절대적인 지원군이 되었다.

그런 마당에내가 내뱉은 말들은 고작해야 시우에게 힘을 조금 빌려주고, 이미 회귀 전에 실패했던 성좌로서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꼴이었겠지.

그런 신검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

절대적인 인류의 아군이라는 자기 자리를 빼앗은 내게 매달리는 것. 내 노예가 되어서라도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다는 것.

시우보다도, 세계보다도 자기 존재가치를 우선시한 것이다.

“결국 회귀가 신검의 자아도 망쳐놓은 것이로군.”

“그렇죠.”

그러니까. 신검이 나에게 굴복하는 것은 단순히 내 잘 못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내게 할 말은 뭐길래 부른 거야?”

“인과율의 조정으로 죄악이 등장했어요. 알고 계시겠지요?”

“응.”

그래서 내가 이 난리를 치는 거잖아.

“그에 따라 군단장들도 있는 것을 알 테고.”

“응.”

군단장은 죄악들의 수하들. 또 그 밑의 군단은빌런조직같은 거라 생각하면 된다.

“인과율 조정에서 제가 참견하면 스토리를 정말 알 수 없어져요.”

“응.”

“일단 남국여행권은 나중으로 미룬다해도 엘프유적은 다녀오셔야 해요. 이왕이면 빨리.”

남국 여행권.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고 게이트로 들어가는 여행지인데. 따듯한 섬으로, 몰디브와 비슷하다고 한다.

더 말해 무엇하랴.

원래 시우새끼가 히로인들과의 바닷가 이벤트를 조지기 위한 곳이다,

나도 지금은 남국여행을 갈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아니 죄악 사정을 떠나서. 지금 나와 단체전 멤버는 전부 한국에서 유명하다. 그런 마당에 자기들 아카데미 욕처먹는 동안. 룰루랄라 여행? 말도 안 된다. 필시 아카데미 익명게시판이나 커뮤니티에 온갖 레즈드립이 올라올 것이 뻔하다.

“거기가 레이나가 조금 더 성장하는 곳이던가.”

“게다가. 우리 용용이가 저질러준 탓에 레이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어요.”

“무슨 가능성?”

“제가 설정으로만 뒀던 다크엘프요. 타락각성이란 거죠.”

“설정이 어떤데?”

작가가 여기 있으니 굳이 내 원작 기억을 들추지는 않겠다.

“어. 좀 음습한데. 들어도 안 웃을 거죠?”

“응.”

다크엘프는 정령의 도움없이 마기를 이용한 화살을 쓴다고 한다.

일반 엘프가 정령화살이면, 다크엘프는 침식화살. 상대를 마기에 침식시키는 화살을 사용하는 것.

관련 전용기술도 따로 존재한다.

성격은 다소 까탈스럽고, 포악해지지만, 자기 주인에게 만큼은 몸과 마음을 다하는 엘프.

다크엘프 각성 조건은 세 가지가 있다.

1. 필요 이상의 마기 흡입. 이때, 일반적인 마기가 아니라 S급 괴수나 괴인 이상의 마기.

2. 괴수코어 이식으로 인한 괴인식 각성.

3. 동족죽이기.(같은 엘프후손이나엘프살해)

“원작에서 본래 각성하는 엘프와 다른 점은?”

“사실 전투력만 따지면 이쪽이 더 강해요. 원래 타락버프라는 게 있잖아요.”

“아니, 타락하면 악이 되는 건 국룰아니야?”

타락하면 강해지는 건 국룰이지만, 그만큼 정의에 의해 쓰러지는 것도 국룰이다. 제 아무리 강해도 어떤 이유로든 쓰러지게 되어있다.

“어차피. 우리 용용이 거잖아요? 악이라도 상관없죠. 그리고 가능성의 하나인 것 뿐이지. 원작대로 그냥 엘프루트 타도 돼요.”

그녀는 레이나의 타락설정이 적힌 수첩을 흔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작가 유은하가 가진 타락설정집이 레이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지? 몇 장은 되는 거 같은데.

“잠깐, 이거 한 장이 아닌데. 설마.”

“네. 한수지, 최시우 및 로자리아, 이유정까지 있어요.”

나는 그 설정집을 보면서 경악했다.

“설마 지금 만든 거?”

“아니요. 아, 최시우가 성전환한 것은 진짜 예상외이기는 한데. 주인공, 히로인 타락은 작품의 괴인화 설정을 기반으로 한 거라. 이전에 만들어 둔 거에요. 애초에 제가 지금 그것을 만든다고 해도 이제 내 힘은 세계에 미치지 않아요.”

즉,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는 뜻이고 작가 유은하의 음습한 취미라는 것이로군. 이런 취향은 인정해주자.

“음. 일단 참고할게.”

“그리고 전작 히로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에요. 접근하기 쉽고, 강한 인물로는 서지연이 낫겠죠.”

“서지연?”

“네. 서지연은 괴인이 되면 굳이 손을 쓰지 않고 눈으로 찰칵소리만 내도 공간을 삭제할 수 있어요.”

뭐 그런 미친 강자가.

“대체 그런 미친 설정은 왜 박았어?”

“아니, 전작부터 이것저것 박아본 건데요. 괴인과 헌터, 빌런이 존재하면 당연히 괴인화 설정집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하기야 소설가니까 뭐.”

그거야 작가 마음이지. 내가 뭐라 하겠나. 애초에 괴인화가 가능한 세상이니 설정집이 없어도 히로인을 괴인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전달할 건 다 전달했으니 돌아가보세요.”

“응.”

작가 유은하와 대화를 마치자, 눈부신 빛이 시야를 가렸다.

* * *

일단 얼마 전의 일을 짧게 설명해보자.

암컷타락하기 시작한 최시우가 빌런짓을 망설이자, 나는 성좌인 신검을 대신 타락시켜 시우의 다른 인격으로 만들어버렸다.

시우가 자는 동안에는 이 다른 인격인 시아가 나와서 빌런짓을 할 거다.

나는 금발의 시우. 아니, 최시아에 대해서 나는 히로인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솔직히 쪽팔리기는 하더라. 성좌란 여자가 악룡에게 보지나 벌리고 애액 질질 흘리는 것이 웃기지 않나?

“최시아는 최시우가 여자가 되면서 생긴 성좌의 인격이야.”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잠깐, 그럼 원래의 최시우는 어떻게 되는 거에요?”

“원래의 최시우는 지금 자고 있어. 자는 시간에만 시아가 쓰는 거야.”

“와 육체가 24시간 풀로 돌아가는. 그거 괜찮은 거에요?”

“괜찮아. 지금 시아는 반괴인, 성좌라서 원래 첫 번째 인격인 시우에게는 딱히 피로가 누적되지 않아.”

그건 좀 놀랍더라.

사실 저지르고 나서 미안하기는 했다.

그야 원래 주인인 시우의 허락없이 괴인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최시아가 아닌 본래 최시우의 인격으로는 괴인이라기보다는 육체가 반성좌에 가까웠다.

즉, 최시우는 인격에 따라 반성좌, 반괴인이 되어버린 아주 잡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단 다시 설명하자면 내가 흑신교 우두머리인 아지다하카. 신도들은 나를 다하카님이라 부르고 있어.”

“우리도 그렇게 불러달라고?”

“아니, 이건 미리 말해두는 거고 각자 맡을 역할을 알려줄 거야. 첫번째로는 이유정선배.”

“응.”

앞으로는 이유정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상, 송도의 치안은 전부 이유정의 몫이니까. 특히 지금도 한성을 지키고 있는 골렘은 이유정의 역작이지 않나.

“선배는 송도를 지킬 골렘 좀 만들어주세요. 자원은 창고에 있는 마석도 있고, 천산그룹에서 지원해줄 거에요.”

“야, 송도가 그래도 꽤 큰 편인데.”

한수지는 이유정에게만 전부 시켜먹는 건 아니냐며 나를 째려봤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으로써는 우리 팀 최강 브레인은 이유정이니까.

타락설정집을 힐끗 보니, 이유정이 괴인이 될 때는 아예 도시 자체를 자기 두뇌네트워크망에 두고 제어할 수 있던데. 지금도 난 충분히 만족한다.

“흑신교 신도들도 대부분은 전투능력은 갖추고 있어. 뭐 흑신교라는 빌런조직을 골렘집단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야. 적당히면 충분해.”

“애초에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 내가 골렘 한 마리 만들면 그 골렘에 제작지식만 넘겨서 일해서 한 마리 더 늘리고 2마리가 또 골렘을 제작하고.”

이유정은 별거있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거 편하겠네요.”

“그리고 곧 백화TV라고 해서 스트리밍하나 할 건데.”

백화. 내가 사용하는 백염을 고쳐 쓴 것이다.

막상 이름이 떠오르는 것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백염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내 이명인 백염의 검희 때문에 겹칠 우려가 있다.

“설마 빌런 토벌 영상을 찍는 거야?”

“한수지. 좋은 질문이야. 나는 빌런 토벌영상만이 아니라 게이트 토벌 영상도 올릴 거야. 그리고 시아.”

“네.네?”

시아는 평소에도 내게 경어를 쓰도록 했다.

그야 나에게 굴복했으니, 애들 앞이라고 반말을 허용해주면, 버릇들어서 안 된다.

그래도 애들이 오해하면 안 되니 공공장소에서는 주인님으로 부르는 것은 봐줬다.

“지금의 너는 헌터나 괴인등급으로 얼마나 될 거 같아?”

“S는 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대한민국 상위길드 마스터급이다.

그 대부분이 유진석 동료라고 치면 시아는 꽤 강한 편이다.

그 정도라면 지금 격리구역에 있는 괴인 빌런집단은 토벌할 수 있겠지. 어지간한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방송은 어떻게 하려고요?”

그거 좋은 질문이다.

“최근에 천산그룹이 개발한 드론이 있는데, 야외방송 헌터 스트리머용이거든.”

“수요가 별로 좋지 않을 거 같은데?”

“맞아요. 헌터 방송으로 돈 벌려면 시청자들이 흥미를 끄는 수준높은 던전가야 하는데. 그런던전 갈 정도라면 최소 A급. 굳이 스트리머할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시청자들 위해 하이라이트 뽑아야 해서 귀찮을 텐데?”

헌터들은 제각각 사냥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 마당에 게이트나 던전 토벌 방송은 카메라를 든 매니저들을 지켜야 해서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시청자들은 어지간한 연출이 아니면 도네도 안 한다. 양학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목숨을 거는 던전에 가야 그나마 돈을 넣어준다.

그만한 리스크를 각오하는 헌터스트리머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그러지 않고 여유로운 던전만 돌아다녀도 괴수들 소재와 코어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S등급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와중에 그 드론은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하이라이트를 찍기에 안성맞춤이며, 얼굴은 가릴 테지만 시아의 외모가 훤히 드러나는 슈트도 입힐 거라 남성 시청자들이 꽤 들어올 거다.

저 실력으로 상위 던전이나 게이트는 밥이겠지만. 그래도 신규 던전이나 게이트토벌. 상위 던전을 양학한다면 그건 나름 흥미를 끌 것이다.

심지어 빌런 토벌도 있다면 말다했지.

“그래서 특수제작한 거야. 우리만을 위한 거지. 겉은 마룡의 비늘로 만들어져서 어지간한 충격에도 끄떡없고, 스트리머 앵글에 맞춰서 인공지능이 알아서 전부 촬영해줘.”

“굳이 헌터가 아니라 야방 스트리머들이 좋아하겠는데요?”

레이나가 수긍했다.

그렇지 다만, 특수제작이라 나만 가질 수 있다.

내가 저거 얻으려고 이유진. 그 년한테 마석을 얼마나 바쳤는지 모른다. 그 덕에 송도 근처의 마기는 꽤 정화되었다.

“응. 그래서 한 대는 내가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시아가 사용할 거야. 시아는 내가 명령한 지역 가서 빌런이나 던전, 게이트 토벌하고 귀환스크롤로 여기로 돌아오면 돼.”

“네.”

“그럼 우리는 뭐해?”

“레이나는 한동안 세계수의 활을 사용을 익히도록 하고. 한수지 너는 내가 무신을 붙여줄 거야. 훈련해. 휴교끝날 때까지는 너희들 힘부터 올려야 해.”

레이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엘프유적을 데리고 갈 거다.

휴교가 끝나기 전에는 그렇게 해야지.

각자 역할을 맡기고,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나와 한수지는 신도들에게 소개한 후에, 지하에 있는 시뮬레이션 훈련실로 보냈고, 한수지에게는 무신을 붙여주었다.

시아에게는 방송이 아니라 따로 시킬 것이 있다.

“시아. 너는 내 방에서 쉬고 있어. 아까 많이 힘들었잖아?”

아까 엄청 따먹었었지. 아마 아직도 자궁에 여운이 남을 거다. 그거 생각해서 봐준 거지.

“감사합니다.”

“아, 그래도 내가 올 때 연락은 해둘 테니, 알아서 다리 벌리고 기다려. 그리고 오늘 나 물 좀 빼게 입도 양치해두고.”

생각해보니, 나는 전혀 싸지 못했다.

굴복시키는데 시간을 다 써버렸지. 그러니까 내 욕구불만은 빌런들 좀 족치고 이따가 풀어야 한다.

“네. 주인님.”

시아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을 한 번 보고는 케이트를 이용해서 부평역으로 왔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이유진으로부터 받은 드론을 꺼냈다. 무려 자체 PC기능이 있는 것이다.

아마 마도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이런 것도 나오기 힘들었겠지.

지금도 주문제작으로 엄청 비싸다고 한다. 굳이 현금으로 판다치면 10억은 든다더라. 그만큼 천산의 모든 기술이 집약되었다.

거기에 아카식 레코드의 지식이 들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지.

아마 가성비 때문이라도 천산그룹은 이걸 양산하지는 않을 거다.

나는 나와 케이트에게 딱맞은 스마일가면을 꺼내 얼굴에 씌웠다. 그리고 마기를 둘러 복장을 수녀의 것으로 바꿨다.

“트위티였지.”

이 세계에서도 인방은 꽤 유명하다. 여전히 먹방, 벗방이라던가. 겜방도 있다. 하지만 나만큼 혁신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제목은 이 정도면 되겠지?

<백화TV­빌런 조직="" 부평="" 산곡연합,="" 부천="" 빌런동호회="" 단신="" 토벌="" 도전!=""/>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