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히로인을 공략함-53화 (53/331)

〈 53화 〉 51. 시노하라 정권

* * *

시우가 색욕이 된 것까지는 나쁘지 않다. 다만 타이밍이 최악이다.

엘프유적도 다녀와야 하는데, 색욕이 된 시우가 성욕을 참지 못하고 덮치러 오면 설득하기도 귀찮다.

싸울 수 있어도 상대가 죄악이면 부담감이 있다.

그러니까 엘프유적을 다녀올 때까지만이라도 최시아가 버텨줘야 한다.

“마력만 충분하면 가능해요.”

“줄게.”

시아가 색욕 최시우를 억제할 수 있다면 마석이 뭐가 아까울까.

애초에 넘쳐나는 것이 마석이다. 내가 수시로 마기를 정화하고 있으니까.

“노력해볼게요. 그런데 언제까지 잠재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거면 돼.”

그나마 색욕이 들어가서 다행이지. 다른 죄악은. 아니다. 애초에 지금 상황에 색욕이 아닌 다른 죄악이 최시우에게 심어질 리 없다.

최시아도 백화TV에 데뷔시켰으니 나는 레이나를 데리고 며칠간 빠지면 그만이다.

사람수는 좀 확보했으니, 굳이 눈길을 끌려는 것보다는 그저 토벌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팬트하우스로 돌아와 이유정, 레이나를 소집했다.

한수지는 이 매몰찬 년이 훈련장 문에다가 ‘내가 나올 때까지 방해금지’라고 붙여둬서 건드리지도 않았다.

“유정언니 골렘은 어떻게 되었어요?”

“만들고 있어. 역시 언니는 대단해. 골렘만드는 비용을 전부 대주다니 말이야. 투자할 가치가 있다 생각한 걸까.”

모르겠다. 그 여자 이상하게 나한테 지원을 잘해준다.

나 볼 때마다 이상한 얼굴이나 하고. 아무리 봐도 그 여자도 평범한 레즈가 아니야.

원작에서는 큰 비중이 없던 여자가 비중이 나름 생긴 것도 인과율인가.

“엘프유적은 우리도 가?”

이유정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추천하지 않아요.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레이나의 문제라 굳이 안 가셔도 될 것이고.”

원작에서도 레이나와 최시우 둘이 간다. 정확히 말하면 히로인 호감도 빌드업 구간이라는 거다.

굳이 나 혼자 갈 이유는 없지만.

일단 아카식 레코드의 도움을 받아볼까.

[마스터. 엘프 유적에는 이유정을 데리고 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원작을 알고 계시는 마스터라면 이해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

확실히 엘프유적에서는 다양한 이벤트가 존재한다. 그러나 최시우의 힘이 부족해서 엘프유적 이벤트에서 어쩔 수 없이 레이나와 함께 탈출한다.

여기서 이유정을 더해 전력을 보강하라는 말인가?

심지어 엘프유적에는 가동하지 않는 골렘들도 있었다.

“뭐 나는 상관없어. 애초에 그런 따분한 곳 좋아하지 않으니까. 다만 둘이 얼마나 꽁냥거릴까. 그게 싫을 뿐.”

“그래서 안 갈거에요?”

“갈 거야. 둘만 보내기도 조금 걱정이 되고 말이야.

이유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돌아와서 이유정을 한 번 안아줘야겠다.

“우리 선조들의 유적이 따분하다구요?”

누가 깐프의 후손 아니랄 까봐 레이나는 씩씩거리며 이유정에게 따졌다. 저거 저러다 엘프로 각성하면 얼마나 바가지를 긁을지 알 만하다.

레이나가 그 요망한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이유정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너 일반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 경주 다녀오지 않았니?”

“네.”

“불국사 보고 무슨 생각들었어?”

“따분하던데요?”

아, 그건 인정. 불국사 따분하다.

회사원의 인생은 학창시절에 수학여행으로 경주만 다녀왔었다.

당연히 보는 것이라고는 불국사뿐.

“알겠지?”

“아, 네.”

이유정의 논리에 레이나는 고개를 기울이다가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한수지는요?”

“한수지는 지금 무신과 뭐 해야 한다던데. 기억의 편린이라고 했나.”

무신? 편린?

아! 한수지가 지금 무신 이벤트 중인가?

원작의 사이드 스토리 중 하나. 박준혁의 이벤트다.

지금은 빌런으로 죽어버렸으나, 박준혁은 머리는 멍청해도, 무예에 대한 의지는 어마어마해서 무신이 편린으로 박준혁을 끌어들여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전수했다.

나는 그저 검술만 배웠으나, 아마 한수지는 스킬들도 다양하게 받을 거다. 특성같은 거 말이다.

“그럼 우리는 엘프유적으로 떠나죠. 송도는 당장 누가 건드릴 일이 없으니 시아랑 골렘에만 맡겨도 되고.”

“한수지는 안 봐도 되는 거에요?”

레이나는 한수지가 그리운 모양이다.

굳이 지금 한수지를 만날 때가 아니다.

“무신의 편린이라면 오히려 괜히 방해할지도 몰라.”

“알겠어요.”

엘프유적과 무신이벤트가 동시에 터졌으면, 내 입장에서는 전력을 더 확보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아마 또 인과율인지 뭔지가 문제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거다.

* * *

일본 도쿄

대통령 하정석은 죄악의 일 때문에 미국이 제안한 한일정상회담을 위해 도쿄로 가는 포탈을 타고 일본으로 넘어왔다.

그를 수행하는 비서 최지수는 마도기어에 메시지가 온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하정석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각하. 협회장 최철식의 마도기어로 연락이 왔습니다.”

“또 탐사대 보내야 한다고?”

“그 백화TV 때문에 이번에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허, 빌런인지도 모를 년한테 헌터를 갖다바치겠다는 것이 아닌가. 됐다. 싸그리 무시하지. 그놈 말 들어줄 바에야 일본놈들과 정상회담에서 저자세로 나가겠어."

백화TV인지 뭔지에서 나오는 수녀에 대해서 하정석은 알지 못하지만, 끽해야 빌런 한 마리가 우연히 발견한 드론으로 방송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튼 지금 급한 것은 눈앞에서 자신을 반기는 총리와 시노하라 일행이다.

“일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국의 대통령각하.”

“반갑습니다. 한국의 대통령 하정석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쪽은?”

웬 여자가 인사를 해오니 하정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시노하라는 어디로 가고 무슨 어린 소녀가 나와있나.

“시노하라 가문의 3대 당주 시노하라 유즈키라 합니다.”

허. 이 어린 여자가?

“오, 그 일본을 손에 쥐고 흔든다는 그 가문이군.”

시노하라 유즈키라. 이번 대는 여자인가.

하정석은 시노하라 유즈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흑발에 제법 청초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이제 막 20대 초반일까. 벚꽃이 자수된 검은색 기모노를 걸치고 다소곳하게 한국의 대통령을 맞이하는 모습은 꽤 그럴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대학생 나잇대로 보이는 소녀라니. 아무리 인재라고 해도 늙은 기러기가 길을 여는 법이다. 어린 애가 나라를 이끌다니.

“후훗 하늘에 어찌 해가 둘이 있겠습니까?”

시노하라 유즈키는 조신하게 웃었으나, 하정석의 생각과는 달랐다.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문명국이 되어 근대화를 했다며 떵떵거리던 놈들이 다시 막부시절로 회귀한 꼴 같았다.

“황제나 왕 같은 국가지도자를 대신하는 재상이야 얼마든지 있지. 특히나 일본은 그 기간이 길지 않던가.”

“대통령 각하.”

“후우. 그래. 회담을 해야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있던 일본의 총리가 눈에 호선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죄악의 일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일본은 죄악에 관해 한국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허.”

대통령 하정석은 관자놀이에 핏줄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자기도 미칠 지경이다.

헌터동맹을 기초로 유대를 끈끈하게 잇던 영국이라면 모를까. 죄악 일 때문에 중국에서도 헌터를 한국에 파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 나오는 마당에 이제는 일본이라니. 시노하라에서 사무라이 헌터라도 파견하겠다는 소리인가.

“음, 오늘은 피곤하신 듯하니, 한국의 대통령각하와 총리 각하께서는 따로 만찬을 즐키시고 여독을 푸신 후에 내일 회담을 가지시지요.”

한마디 하려다가 시노하라 유즈키가 막아서 참았다.

원래 일정을 퍽이나 잘 대해주는 것처럼 생색내는 꼴이 우스워 하정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대통령각하. 부디 진정하시지요. 국가와 국가간의 외교가 아닙니까.”

비서 최지수가 대통령을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나, 하정석은 넥타이를 내던지면서 분을 고씹었다.

“최지수. 한국이 누구의 나라인가?”

“예?”

누구의 나라긴. 국민의 나라가 아닌가. 자기가 대선 때 그리 떠벌리고도 치매인가.

최지수는 입 밖으로 속마음을 비추지 않고 조용히 대통령의 말을 기다렸다.

“나 하정석의 나라야! 그런데 중국과 일본 따위가 감히 죄악을 핑계로 내정간섭을 하려 하지 않나! 지금이 구한말이야? 당장 우리 헌터들에게 코가 꿰인 놈들이 감히!”

하정석에게 있어 한국은 그 누구의 나라도 아닌 대통령 자신의 나라였다. 그런데, 감히 내정간섭을 하려는 무리를 어찌 그냥 두고 볼까. 국제관계고 뭐고 없었다면 당장 최철식을 시켜 저 오만한 일본을 털었을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시노하라가 강하다고 해도 한국의 쟁쟁한 헌터들만 할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하정석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일행에게 숙소를 안내한 일본의 총리는 하정석의 오만함에 씩씩거렸다.

“대체 저 한국의 오만함을 언제까지 지켜보자는 건가? 경제적인 압력이라도 가해야지!”

일본의 총리는 시노하라 당주 시노하라 유즈키를 상대로 한국의 오만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정작 일본의 실권을 틀어쥔 시노하라 유즈키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참으시지요. 한국은 우방국입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덤덤한 어조에 총리는 미간을 좁혔다.

“대통령의 표정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오나? 마치 우리를 지들 보다 아래로 보고 있지 않나? 쯧쯧쯧.”

시노하라 유즈키는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총리의 발언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 그리 한면만 보는 것인가.

한국의 대통령 하정석은 대통령감은 아니지만, 적어도 외교에서 실수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한국은 헌터들의 국가나 다를 바가 없다.

협회가 이전만 못해도 한국헌터협회의 지원 아래에 상위 길드들이 한국을 지키고 있다. 당연히 권력도 가지고 있는 구도다.

“총리 각하는 다르십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를 잘 달래어 헌터들을 이용해 먹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죄악 일이 터지니 곧바로 한국에 압박을 가할 생각만 하셨지요.”

“대체 시노하라는 누구 편인가? 자네들은 일본인이야! 일본의 국익만을 생각하게!”

“국익. 하. 국익. 말 한 번 잘하시네.”

대체 총리란 작자가 생각이 있는 건지. 시노하라 유즈키는 이런 자와 함께 일본을 다스리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그 무슨.”

“잘 들으십시오. 총리. 아무래도 우리 시노하라를 믿고 한국을 어떻게 하고 싶은 모양인데. 한국이 가진 전력을 생각하십시오. 상대를 다스리는 것은 상대보다 강할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한국에 되지 않아요. 신검은커녕 얼음여제, 죽음의 사진사, 꽃의 노아도 상대하기 벅찬 것이 우리 일본입니다. 심지어 죄악의 파편을 무찌른 생도는 ‘백염의 검희’라는 이명을 받은 신검의 여동생입니다. 제 2의 신검도 있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총리각하란 말입니다.”

유진석이 크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다. 한국은 커도 너무 컸다. 일본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가문으로 있던 시노하라가 대격변 이후, 헌터 가문으로써 옛 막부처럼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처럼 말이다.

“시노하라가 있지 않나! 일본 최대 가문이자 헌터전력을 보유한 시노하라가 그까짓 한국놈들에게 진다고?”

이제 보니 시노하라를 믿고 있었나.

한국이 협회와 청와대가 반목하면서도 대국으로 우뚝 선 이유도 유진석을 비롯하여 강자들이 쟁쟁하게 남아있는 탓이다.

당장 12인의 사도 중에 4명이 한국인이니 말은 다한 셈이다.

그들이 작정하고 시노하라와 싸우면 시노하라도 멸문을 각오해야 하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총리께서는 한국과 싸울 셈입니까? 우리가 힘을 쏟는다면 동귀어진은 하겠지요. 그런데 그래서 무슨 소용입니까? 양국이 서로 사이좋게 망할 뿐입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데.”

시노하라 유즈키는 복도에 있는 시노하라의 가신들이 부르르 떨 정도로 소름끼치는 살기를 뿜었다.

총리는 저도 모르게 복도 끝으로 내몰려 주저앉았다.

어느새 유즈키의 능력으로 허공에 떠오른 수많은 검들이 총리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우윽!”

“그 자.리 시노하라가 줬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시노하라 유즈키는 총리를 무릎 꿇린 그 차가운 살얼음판 같은 살기를 풀고,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에 총리는 이를 갈았다.

“크흑. 두고 보자. 반드시 시노하라를 잡아서 권력을 되찾고야 말 테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