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53. 엘프유적기록의 서고(2)
* * *
하얀 불덩어리들을 공중에 몇 개 띄웠다.
어두웠던 공간이 조금이나마 환해진다.
불이야 없어도 상관없지만, 사람 심리라는 것이 있다. 안전수칙을 보면 코박죽 깐프들이 이 서고에 뭔 짓을 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경계용으로 괜찮겠지.
그래서 제어실은 무시하기로 했는데.
띠링! 띠링! 띠링!
불이 꺼진 제어실 안쪽에서 딱 들어서는 안 될 것같은 벨소리가 울린다.
“이런 씹.”
그냥 무시하고 가야 하나?
아니다. 저런 거 무시하면 좆되는 거 한순간이다. 예를 들면 하루종일 울리던지 말이다.
일단은 제어싦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눈에 보이는 것은 형형색색의 마도기어같은 것들이었다.
지구의 마도기어들은 휴대폰과 비슷하다면, 엘프의 것들은 컴퓨터와 비슷하게 생겼다.
띠링! 띠링!
도발에는 도발로 응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나는 벨이 울리는 분홍색 마도기어를 작동했다.
“여기는 기록의 서고 총책임자 용용이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는 마리타 요새의 크라크! 인간놈들이 배신했다! 놈들이 마족과 내통하여 침공했다! 지원요청바람! 지원요청바람!
오. 얘네들 우리말 쓰고 있네. 아니, 내가 그렇게 알아듣는 건가. 아니, 그나저나.
“이 씨발놈은 왜 서고에다 지원요청하지? 머리가 없나?”
급하다! 이곳이 함락되면 왕도까지 길이 열린다! 지원요청을 바란다!
“…….”
아무래도 이거 엘프왕국의 마지막을 말하는 거 아닌가.
안타깝지만, 이곳은 기록의 서고다. 단순한 기록일 뿐이겠지. 지원요청 받은 기록이 서고에 버려진 것이 아닐까.
설령 시공간을 넘어서서 저쪽은 멸망하지 않은 엘프의 세계라고 해도 내가 지원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더 듣지 않고 마도기어를 껐다.
띠링! 띠링!
급히 지원요청! 부탁이다! 누구라도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여왕님께!
마도기어를 내던졌다. 이런 우중충한 대화를 언제까지 들어줄 수는 없다.
아니, 혹시 모르니 들고 갈까. 마력공급만 하면 작동할 것 같으니까.
일단 벨소리는 몇 번 무시하니 전화가 더는 오지 않았다.
슬픈 일이지만, 내가 관여할 방법도 없고, 당장 나도 이곳에서 탈출해야 하는 입장이다.
“아카식 레코드.이거 기록이야. 아니면 정말로 외부의 연락이야?”
[기록의 서고 자체가 여러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서고입니다. 단순히 멸망한 엘프들의 기록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세계에서는 실제로 크라크라는 엘프가 지원요청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이것도 다른 의미로 슈뢰딩거라는 소리다.
멸망하기 전에 기록보관소에 기록을 남기다 크라크의 기록은 이곳에 버려졌다던가. 또는 실제로 수도에 지원요청하다가 서고에 전화를 해버린 살아있는 크라크라던가.
슬픈데, 그럼. 어쨌든 내 코가 석자니까. 지금은 당장 탈출구를 찾아보자.
띠링띠링
이번에는 보라색의 마도기어에서 벨이 울렸다.
아마 이건 정말 아닐 것이다. 받아도 이상한 거겠지.
내 몸이. 내 몸이 불타고 있다! 내 몸. 내 몸이!
“그 아가리는 언제 타니?”
나는 마도기어를 내던져 부서트렸다. 아무래도 이 제어실 자체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구조다. 당장 쓰레기통으로 쓰이는 곳의 제어실이 멀쩡히 돌아갈 리가 없으니 말이다. 아마 이 전화는 그 안전수칙에서 2시간이라는 골든타임을 얻으려는 코박죽 엘프새끼의 음습한 목소리에 불과하다.
책에 박겠다고 조항까지 남겨두는 놈들이 서고를 멀쩡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이곳의 책 자체는 관심이 있다. 그 코박죽 놈들이 얼마나 대단하게 여겼으면 박을 생각까지 하는 건가.
“진짜 제어실에서는 구역별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나보네.”
심지어 뒷문의 잠금장치도 여기서 조절할 수 있다.
일단 ON상태로 올리자, 저 멀리서 기이잉!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각구역의 불도 들어오게 해서 서고 전체가 나름 밝게 빛을 냈다.
대체 얼마나 크면 이렇게 구역별로 정리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계속해서 언급되는 뒷문이 탈출구같다.
내가 들어온 곳은 함정입구니, 본래는 출입구였겠지.
제어실 벽면에서 책장배치도를 확인했다. 가만히 보니 크기가 어마어마한 것이 뒷문까지의 약도가 그려져있다.
“무슨 서고에 약도까지 있어. 이런 미친.”
그래. 뭐 그 정도는 되어야 함정이라 할 수 있겠지.
“대체 어떤 기록들이 있는지나보자.”
바닥에 널어진 것 중 아무거나 주워봤다.
[음란한 도마뱀 메이드 1권]
“에라이 씹. 어?”
일단 제목이 엿같지만, 잠시 그 내용을 보자, 내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이거 은근히 내용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챙겨두자.
삽화가 도마뱀 메이드라 거지 같지만 내용만 보면 그래도 꽤 수작이라 할 만하다.
코박죽놈들. 이런 거에 박은 것 같다. 쓰레기통에서 야설이나 찾던 걸까.
복도는 안전수칙대로 상당히 복잡했다. 직선으로 나아가다가도 구역별로 또 복도가 길게 구불구불 늘어서 있다.
당연히 그 복도는 단순한 복도가 아니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만들어진 복도로, 그 책장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세워져 있었다.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데?”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다. 복도가 좁아서 약도를 확인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넓은 탓에 이 약도를 보고 움직이기도 쉽다.
그냥 저 천장을 알 수 엎을 정도로 높이 세워진 책장은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나는 책박이가 아니지만, 책박이들이 좋아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레이나도 평소에 책을 그리도 좋아했었다. 나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레이나는 잡식이었다.
헬조선이란 무엇인가? 왜 그런 책을 읽어?
진정한 지식인은 책을 가리지 않는 법이에요.
자유시간에 보면 레이나는 항상 책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뒀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은 책들을. 아니, 이제 생각해보니 그럼 레이나도 책박이인 건가.
여기 오게 하면 책장에 달라붙어 요염한 자세로 키스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설마하니. 저런 게 나올 줄은 몰랐지.”
눈앞을 가로막는 해골더미들을 보라. 그 왜 판타지게임이나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움직이는 해골들이 나를 막아섰다.
“저것들은 뭐야?”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게임에서든지 하급 몬스터로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다.
뭐 이상한 전화가 올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지만.
그런데 애초에 저런 걸로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엘프들도 멍청하지. 나를 막고자 했으면 예쁜이들을 모집했어야 한다.
나는 손을 살짝 들었다.
딱!
그저 혼돈만 심으면 그것으로 끝일 뿐이다.
“그냥 손가락만 튕겨도 자기들끼리. 어?”
그런데 저 해골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이상한데? 내 혼돈이 하급 괴수들 따위한테 막힌다고? 오히려 해골들은 칼을 들고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이건 좀 빡친다. 명색이 악룡인 내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아니, 정신공격이 통하지 않을 뿐인가?”
생각해보면 저놈들에게 자아라는 것이 있을까? 공격을 당할 만한 정신이 없다면 내 공격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는 말인 즉. 펀치나 백염은 통하지 않을까?
나는 바닥을 박차고 해골들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어어억!?”
울음소리는 있는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뼈다귀들이 그대로 부서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원래 마력으로 만들어져 있었는지, 뼈가 남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별거없잖아?”
“그오오오오오오!”
“뭐야, 이놈들 다시 나타나? 마력은 파괴되었을 텐데?”
마력으로 만들어진 괴수들은쓰러질 때 마력 자체가 사라진다. 분명 마력이 사라진 것을확인했는데?
그렇다면 백염은 어떤가.
해골들에게 하얀 불꽃을 붙였다.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하면서 해골들이 다시 바닥으로 사라져 간다.
그런데 이놈들 상당히 독종들이다.
확실하게 죽지 않고 계속 바닥에서 기어오르고 있다.
바닥을 불꽃으로 도배하고 나서야 리스폰킬 당하면서 길이 열렸다.
그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놈들 그렇게 잡으면 안 돼!”
“어? 진짜 책박이 인가?”
“그놈들은 책에서 나온 놈들이라고! 책 자체를 없애야 놈들이 사라져!”
뾰족한 귀와 깨끗하고 하얀 피부. 백금발. 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레이나? 아니다. 분위기가 달라. 레이나가 츤츤거리고 까탈스러운 전형적인 깐프라면 저 엘프는 살짝 눈매가 순한 인상이다. 그리고 레이나와는 달리 가슴이 조그마하다. 그런데 그게 음란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는 레이나보다 좀 더 많아보인다.
잠깐, 최근 너무 성욕이 끓는다. 참자. 이런 곳에 있는 엘프가 평범할 리가 없다.
그래. 책박이구나.
아니, 여자니까 책빔이?
“뭐해? 저놈들 나온 책을 찾아서 불태워야 해!”
역시 책박이라 그런가. 저 엘프는 열심히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굳이 찾을 필요 있어? 오히려 해골들이 움직일 시간을 줄 뿐이다.
“아니, 그냥 여기 다 태우면 그만이잖아.”
그냥 적당히 다 불태우면 끝이지.
아카식 레코드는 전부 불태우지 말란거지 조금 정도면 괜찮을 것이다.
내가 들어온 쪽에는 없다가 해골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렇다면 책이 바로 이 근처에 있다는 뜻.
해골을 피해 더 앞으로 간다면 해골들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지금 확실히 불태우는 것이 다른 몬스터들 상대하기에도 좋겠지.
“갑자기무슨.”
“하얗게 불타올라라. 헬파이어.”
멋진 주문과 함께 근처의 책장들이 모두 불타기 시작했다.
“이.이런 미친. 책을 전부 불태우다니!”
역시 이 엘프는 책박이가 분명하다.
책장이 불타 무너져내리자, 그제야 해골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책 속의 몬스터들이니 혼돈이 통하지 않은 것 같다. 잠깐, 이 엘프도 혹시 책에서나온 책박이 아니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것들이 폐기된 기록들이라고 해도 그래도 지식이라고? 한꺼번에 다 불태우면 어쩌자는 거야?”
겉모습은 정말 레이나가 순진한 표정을 하면 나올 얼굴이다.
일단 진짜인지 가짜인지 실험해보기 위해, 이 책박이 깐프의 양볼을 손가락으로 쭉 잡아당겼다.
“아야야! 아프잖아! 뭐하는거야!”
“모찌떡같이 찰 진데. 엘프들은 다 그런가.”
한참 잡아당기다 놓았는데, 피부의 촉감이 예술적이다. 레이나의 볼을 만진 느낌과 매우 비슷하다.
“엘프들은 다 그런가? 너는 엘프가 아니야?”
“어, 음 나로 말할 것같으면.”
뭐라고 설명하지? 용? 인간?
그래도 몸 자체는 인간에 가깝지 않나? 악룡의 힘을 가진 인간.
“음, 나는 인간…….”
“이 망할 제국년! 이제는 기록보관소로 들어가려고 작정한 것이로구나! 그러다 여기로 떨어진 거로군! 내 이름은 레이첼 실버류크다! 자랑스러운 엘프왕국 왕실의 일원으로서 네년을 죽여서 분을 풀겠다!”
레이첼 실버류크? 잠깐만, 그럼 왕족? 왕족이라는 년이 여기 왜 있어?
그런데 이 책박이년은 나를 가만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대뜸 검을 뽑아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이런 씨발.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죽어라!”
아무래도 저 엘프는 평범한 책박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칼을 들고 달려드는 모습이 마치 미친년 널뛰는 것 같아서 심각하게 두려웠다. 심지어 이년은 신체강화를 배운 무투파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애초에 내가 누구인가?
세계관 최강자 악룡 아지다하카의 환생체다.
그래. 저딴 깐프의 검술따위는 나에게 있어서 어린이가 덤비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내 검술 기술머신을 준 사람이 바로 무신이다. 그런 내 앞에 나대는 깐프를 보니 화가 치밀었다.
퍽!
“아아아악!”
자궁까지 자극하는 강력한 배빵을 날려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