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55. 엘프유적기록의 서고(4)
* * *
“레이나. 실버류크라니. 레이나는.”
“그래. 너와 같은 성씨네.”
대충 각이 나온다. 레이나도 엘프 왕가의 출신.
불현듯 잊고 있던 원작의 지식들이 떠올리면서 나는 레이나와 레이첼의 관계가 무엇일까. 머리를 굴려보았다.
생김새는 정말 닮았다.
레이첼이 조금 더 젊고, 귀가 인간의 것과 비슷하며, 가슴이 커지고, 유방이 부풀고, 흉부에 언덕이 생기면 레이나가 되었을지도.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사진 찍은 게 있는데. 자 이거.”
언젠가 레이나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꺼내 레이첼에게 보여주었다.
“이.이건.”
사진을 뚫어져라 보던 레이첼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흑.흑흑.”
“왜 갑자기 주접을.”
“레이나 실버류크는 내 딸이야.”
“어.”
레이나가 레이첼의 딸?
1.눈매가 좀 다르지만 비슷하게 생긴 외모.
2.실버류크라는 같은 성씨.
뭔가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설마 이럴 수가.
좀 닮았다 했더니, 확실히 모녀라면 닮은 것도 이해가 간다. 가슴만 빼면 말이다.
그럼 나한테 시어머니? 장모님?
아니다. 일단 내 몸은 여자니 시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설마하니 내 딸이 너와.”
“시어머니.”
나는 레이첼 앞에 다소곳하게 절을 했다.
이건 참을 수 없지. 앞으로 잘 보여야 한다.
“……뭐? 시어머니?”
장모? 아니 시어머니? 아무튼 이제부터는 잘 보여야지. 이래 보여도 내가 어른은 조금 공경할 줄 안다. 그것도 내 여자의 어머니라면 더 그렇겠지.
시어머니에게 인사를 마친 나는 레이나와 내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란 귀잡이는 또 내 멱살을 잡았다.
“내. 내 딸을 레즈로 만든 것도 모자라 나까지? 뭐 이런 귀축이 너. 너너. 그 말이 진짜라면 이거 큰일 날 일이라고? 모녀를 상대로 이런 장난을 쳐?”
확실히 한국이라면 문제가 될 요소다. 모녀를 따먹다니.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니잖아?
심지어 이런 서고라면 나를 막을 자가 누가 있을까?
서고에서 시어머니와 녹진한 가위치기.avi
상상만 해도 꼴리는 요소가 아닐까. 물론 시어머니가 레이첼 같이 젊고 예뻐야 하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꼴리면 시어머니고 뭐고 비비고 봐야지 뭔.”
꼴리면 일단 하고 봐야 하지 않는가. 좋지 아니한가.
모녀덮밥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지. 남자라면 꼴리는 모녀에게 박고 봐야 하고 레즈라면 꼴리는 모녀와 농후한 민달팽이 보빔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미쳤어. 미쳤어!”
“차라리 잘 됐군. 이왕 따먹었으니.”
시어머니라 부르기도 귀찮다. 그렇다면 선을 넘은 김에 열심히 따먹어야 하지 않을까.
면상이랑 몸매만 보면 여전히 꼴리는 20대의 몸인데. 이럴 때 맛봐야지 언제 맛보나?
“너 또 무슨 짓을. 야, 나. 레이나 어머니다? 너 나한테 잘 보여야 해?”
“잘 보여주려고 이러는 건데? 딱 대.”
결국 한 번 더 덮쳤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머리에 올라타서 커닐링구스를 받았다.
혓바닥을 몇 번 놀리더니, 처음에는 싫은지 머리를 흔들다가도 겨우 나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얼마 후. 내 체액에 얼굴과 머리가 젖은 레이첼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으으으으. 이런 게 며느리라니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하기 싫어도 몸은 솔직하게 반응하더만? 솔직히 좋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엉덩이를 조물거리니, 레이첼이 내 손을 쳐냈다.
“어떤 년이 자기 시어미 엉덩이를 조물딱거리고 얼굴에 그렇게 싸지르는 건데?”
“못 받아먹은 게 잘 못이지.”
싸지르다니, 며느리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내 말에 한 번 째려보더니 클린 마법으로 자기 몸에 묻은 것들을 닦아냈다. 그래도 나까지 닦아주는 것을 보면 며느리를 제법 챙겨주는 것 같다.
“아무튼 여기서 반드시 빠져나가야 해.”
“그렇겠지.”
“너 자꾸 반말할래?”
레이첼이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래. 21세기 한국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반말하면 아주 작살날 텐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
“해줬으면 좋겠어? 늙다리 취급해달라 그거지?”
“무슨! 나는 엘프 중에서도 젊은 편이라고!”
그래. 외모만 보면 젊다. 그래도 외부세계 시간으로 생각하면 족히 수천살. 또 그녀가 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의 세월만 따져도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지 않을까.
“네에. 네에.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모를 시어머님.”
“으으, 반말로 하던가!”
노친네취급은 싫어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낚이니 얼마나 재밌는가?
게다가 이미 저지른 것이 있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되기도 묘하잖아.
대체 어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가위치기를 하고,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 얼굴에 조수를 쌀까?
“레이첼. 여기 길 몰라?”
“나도 알고 있으면 나갔지. 지금껏 뒷문도 못 찾았어.”
탈출구가 뒷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구나.
“서고 구역배치도 안 가져왔어?”
“구역배치도? 이게 어디서 난 건데?”
“제어실.”
내 말에 그녀는 표정을 구겼다. 뭔 개소리하냐는 저 표정에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뭔 이상한 소리야? 여기 제어실 없어.”
“거짓말치면 자궁팡팡 펀치박을 거야? 안전수칙도 있거든?”
“미.미쳤어. 아니, 진짜로 없다니까? 애초에 제어실은 파괴되었다고! 안전수칙도 서고에 자꾸 폐기된 기록에 미친엘프들이 들러붙어서 서고를 점검하던 왕족이 안 되겠다하고 제어실 폭파시켜서 서고 아예 묻으려 했는데?”
그럼 안전수칙은 뭔데.
“음습한 놈들이 제어실 복구하지 않았어?”
“그 지식에 미친 엘프들이 어떻게 유지해보려고 제어실 복구하기는 했는데. 그때 총책임자 왕족이 직접 기록보관소 개혁할 때 서고는 그냥 함정용도로 쓰면서 제어실까지 폐쇄했어. 그런데 그게 제어실에서 나오다니 너 대체.”
레이첼이 내 손에 들린 배치도를 쳐다보면서 눈살을 떨었다.
그럼 내 손에 쥐고 있는 이 배치도는 대체?
머리를 조심스럽게 굴려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제어실
존재하지 않는 제어실에서 얻은 배치도.
이거 정말로 수상한데? 나 이상한 거 들고 온 걸까?
시발. 기분 나빠. 원래 이런 건 시어머니에게 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어머님. 이 며느리는 엘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이 배치도는 어머니께서 가지시지요.”
내가 일부러 두 손을 꼭 쥐어주며 배치도를 넘기자 그녀는 질색을 하더니 나한테 배치도를 돌려주었다.
“나도 싫거든? 필요할 때만 어머니라니! 난 너 같은 며느리 둔 적 없어!”
“그럼 섹파 소원 들어주는 셈치고!”
“섹파는 또 뭐야! 내 딸이랑 어울릴 거면 천박한 언어 쓰지 마!”
“님 딸도 섹파란 단어는 알고 있거든요?”
아, 잠시만.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왜 이거 가지고 겁내?
“아니, 잠깐만. 레이첼. 너 말이야. 이 근처만 어슬렁거린 거 아니야?”
“그래서 뭐?”
“방구석 은둔형 외톨이처럼 여기 찌그러져 있었는데 제어실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생각해보니, 이상하잖아. 약도없이도 이곳에 오랜 기간 머물었으면 뒷문 정도는 힌트라도 찾았어야 했는데. 찾지 못했다.
“그.그건.”
“에휴 그렇게 띨띨하니 이런데 갇혔지.”
“뭐라고?”
쯧쯧쯧.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시 배치도를 가져갔다.
레이첼이 살짝 볼을 부풀리는데, 저러고도 유부녀가 맞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아무튼, 일단 괴수? 몬스터? 아무튼 또 나올 것 같은데?”
“이거 확실한 거야? 나는 좀 찝찝한데.”
찝찝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이거 봐. 여기. 해골 만난 지점에도 해골이 그려져 있잖아.”
이 약도에 따르면 전방에 기이하게 생긴 몬스터가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슨 약도에 그림을 쳐넣었어 했는데, 해골그림이 있는 곳에서 해골더미가 나온 걸 보니 진짜 같더라.
“어, 그렇네. 그런데 이 생물은.”
“뭔데?”
“그 엘프왕국이 망할 때 당시 마왕의 간부들이 이곳에 갇혔다고 들었어. 그놈 같은데?”
아니, 그런 놈이 있다면 이 여자는 왜 여태 안 만난 거야? 진짜 이 구석에서 가만히 있었나?
저 몬스터 자체가 수상하다.
“이런 곳에 엘프와 인간이 있다니. 안 그래도 지금은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힘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생각이었는데. 재물들이 들어왔구나.”
거대한 몸집의 기사가 우리 앞을 막았다.
검은 갑옷이 제법 인상적이다.
“뭐야. 저놈은?”
“심연의 기사. 생명체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면 힘을 얻는 놈이야. 그리고 상처를 입어도 강해져.”
죽이면 죽일수록 강해지고, hp가 떨어질수록 강해진다라. 그런 설정 꽤 많지 않나.
상대하기 버거운 상대라는 뜻이다.
마왕의 간부라는데. 생김새만 보면 그저 그런 검은 기사 같다.
“한마디로 한 번에 족치면 된다는 뜻이잖아.”
“에?”
“무엇을 떠들고 있느냐? 계집들이어! 이몸을 두려워하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을 후회하라! 이 자리에서 너희들은 나 심연의 기사가 부활하는 재물이 될 것이니!”
심연의 기사의 몸이 점점 비틀어지기 시작하더니 근육이 막 생기기 시작했다. 우두둑뚜둑하면서 근육이 기이하게 꺾이는 그 모습은 돼지주물럭이 떠올랐다.
그런데 말이다.
“존나 시끄럽네. 헬파이어.”
“끄아아아아악!”
나는 앞에서 시끄럽게 변신하고 있던 검은 기사를 하얗게 불태웠다.
시발놈이 변신할 거면 미리 하고 오던가 기다려주기를 바라나? 아주 대놓고 상대에게 공격하라고 골든타임을 주는 바보같은 놈이다.
그 대단한 특성이 변신을 해야 가능한 거라니.
놈은 불에 타오르면서도 변신을 멈추지 않았는데. 아직 한참이나 남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변신 중에 재만 남기고 놈은 죽어버렸다.
그런 나를 레이첼이 입을 떡벌리고 쳐다본다.
“왜. 뭐요?”
“아니, 보통은 그런 거 기다려주는 게.”
“당신이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못 나오고 있던 거야.”
저런 게 마왕의 간부라니. 웃기는 소리도 정도껏이다.
그런데 마왕군 간부라는 심연의 기사는 죽기 전에 비틀거리면서 벽에 부딪쳐 죽었는데. 안전수칙이 보였다.
기록의 서고는 폐쇄로 관리자의 허락을 받은 한 명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허락을 구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있을시 즉시 서고를 나와 관리자에 연락하세요.
사람이 한 명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나는 사람취급인가? 레이첼은 엘프라 접근제한이 없는 건가?
아니다. 엘프들이 만든게 사람만 진입하는 구조일 리가 없잖아.
한마디로 이것도 깐프들이 적은 거구나.
이후에도 몬스터들을 몇 번 조우했다.
대부분은 책을 불태웠더니 사라졌는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그래?”
“간만에 이동하려고 하니까 발이 너무 아파서.”
레이첼이 몸을 숙이고 틈틈이 다리를 두드렸다.
뭔가 숨도 가빠보이는 것이 얼마나 걸었다고 저래? 엘프들은 체력저질인가.
“그러게 운동 좀 할 것이지. 딱 보니 혼자 있던 곳에 가만히 있었지?”
“으.으응. 어? 뭐해?”
“뭐하기는. 레이나 보고 싶잖아. 어서 업혀. 빠르게 갈 테니까.”
내 말에 레이첼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이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내 등에 올랐다.
“저기, 그런데 길이 막혀 있는데.”
확실히 앞이 막혀 있다. 약도에 따르면 옆으로 한참 돌아가야 하는데 레이첼의 몰골을 보니 빨리 쉬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레이첼을 데리고 이곳을 빨리 탈출하기로 했다. 기적 같은 모녀상봉 나쁘지 않잖아.
힘숨찐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로 가볍게 태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밖에서 기다릴 레이나도 있고. 어차피 빙빙 돌아갈 거라면 한 곳을 뚫는 게 나을 것이다.
화르르르륵
책장을 불태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혹시 며느리는 불지르는 걸 좋아하니?”
“여자랑 불지르는 건 좋아하지.”
따듯하게 녹진한 민달팽이. 아 꼴린다.
“너 진짜 내 딸을 어떻게 꿰어냈니?”
“세계수의 활 주니까 벌리던데?”
처음에는 아닌 척하면서 잘 벌려줬었지. 생각해보니 레이나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유정이랑 내가 없다고 슬퍼하고 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레이첼이 말이 없어서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밥 얻어먹으러 왔다가 한 대 얻어맞은 흥부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
“?”
왜. 뭐.
“세계수의 활이라니. 정말 농담도 잘하는 구나. 말하기 싫다는 걸 잘도.”
“나는 태어나서 거짓말이란 걸 해본 역사가 없으며, 내 섹파한테는 더더욱 하지 않아요.”
잠시 그녀를 내려놓고 침대에서 세계수의 활과 나란히 누워있는 짭엘프의 사진을 보여주자, 대뜸 내 멱살을 붙들었다.
“네가 훔쳐갔어!? 심지어 내 딸을 이런식으로!”
“상식적으로 내가 훔쳐갔겠어? 말했잖아. 수천년 지났다고. 우리 세계로 유적지가 흘러들어오면서 세계수의 활도 오게 된 거야. 오히려 인간들의 손이 아니라 레이나에게 줬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그런가?”
당연하지. 그 세계수의 활. 내가 레이나에게 안 줬다면 빌런이 가져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고마워하면서 몸을 대주지는 못할망정. 이거 참.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아니고 너무한다.
“그렇지? 그러니까 다리 벌려.”
“미쳤어! 중년아저씨도 아니고 왜 그래?”
아니, 회사원시절 포함해도 나이 그렇게 안 먹었는데.
수백번 회귀한다쳐도 아니지 않나?
“애미나 딸이나 여자 꼴리게 하는 몸을 한 주제에. 야한 몸탓을 해야지 내 탓을 하면 곤란해.”
“아까 전에 했잖아? 일단 나가고 나서 해줄게. 그러면 되는 거지?”
원래 사람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라고 들었는데, 사람이 아닌 엘프니까 취급은 달리해야 할까.
“나가고 나서라니. 지금 내가 마음껏 안을 수 있는 몸을 뭣하러? 모녀덮밥하게 해주면 잠자코 뒷문 찾을게.”
“모녀덮밥?”
모녀덮밥이라는 뜻도 모르다니. 하여간 엘프들은 얼마나 재미없게 살아온 거야.
몸이 쉽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놀랄 노자다.
“그래. 어머니와 딸을 같이 밥먹듯이 먹는 거지.”
그제야 무슨 뜻인지 깨닫고 레이첼은 내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미쳤어. 미쳤어 정말!”
아무래도 유부녀의 역린을 건드렸나보다.
뭐 굳이 강압할 이유까지는 없다. 지금은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지. 하지만, 레이나가 짭엘프인 상태를 보면 반은 인간의 피가 통하고 있다. 즉, 애비가 인간이라는 뜻이고, 미안하지만 수천년이나 지났으니 그 애비는 죽었다.
이틈을 교묘하게 파고 들면?
모녀덮밥을 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안 된다? 악룡 앞에서 그런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일단 신뢰를 받는 것이 우선이다.
결국 이 서고에는 레이첼과 나 단 둘만 있다. 못해볼 것도 없다.
호감도를 잔뜩 채우고 나가서 모녀덮밥을 해보자.
“좋아. 일단 빠져나가자. 지금까지는 장난이었어.”
나는 다시 그녀를 업었다. 뭔가 몸이 아까보다 가벼운 거 같다.
“장난으로 시어머니 가슴 주무르고 키스를 하고 엉덩이를 주무를 수 있나?”
“아니, 정말로.”
그녀를 업고 많은 책장들을 지나거나 불태웠다.
중간마다 이상한 괴수들이 나타났으나,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보니 뭔가 뒤에서 내 등을 가지고 노는 것이 느껴졌다.
“뭐해?”
“아.하하하. 딸이랑 만나면 함께 하고 싶은 목록 적고 있었어.”
거기다 ‘유은하에게 모녀덮밥을 당할 것’을 추 아니다. 지금은 열심히 판만 짜두자.
“이게 누구야. 레이첼 실버류크! 그리고 인간계집인가?”
“가지가지하네. 저건 또 누구야?”
“마왕군 사천왕 중 하나. 불굴의 리치. 고스트타입 마물이자 엘프왕국부흥군에게 최대의 적이야. 저놈도 여기 갇혀있을 줄은.”
레이첼이 내 등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더니 부르르 떨었다.
“뭐야, 너 여기서 탈출하려고? 네가 가능할 거 같아? 어리석은 년. 하지만 너와 달리 나는 인간계집의 신체를 얻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더럽게 시끄럽다.
“저것도 불태워?”
“응.”
리치가 나온 것으로 보이는 책장을 통째로 불태웠다.
저 리치로 보이는 로브차림의 해골은 죽어가면서 어쩐지 레이첼을 조롱하는 것 같이 턱뼈를 덜그럭거렸다.
대체 왜 허접들이 나대는 걸까?
“하아. 하아아. 하아. 유은하라고 했지?”
“새삼스럽게.”
“저기 말이야. 나는 내 딸이 어떤 성격인지. 어떻게 자랐는지 전혀 몰라. 알려줄래?”
나한테 업혀있으면서 잔뜩 지친 모습의 레이첼에게 나는 레이나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카데미에서의 첫만남. 그녀가 가진 엘프후손으로써의 긍지. 조금 깐깐하지만 좋은 여자라는 것까지. 처음에 설명할 때와 달리 보다 구체적으로 말이다.
여러 대화를 하면서 비교적 잘 정리가 된 책장들의 복도로 들어오자 이상한 시신을 발견했다.
복장은 레이첼이 입고 있는 제복과 비슷한 것으로 백골화가 진행된 것이다.
“나 좀 힘든데. 이것 좀 대신 챙겨줄래? 소지품이라도 챙기게.”
레이첼은 내게 저 시신의 가슴팍에 있는 이름표를 비롯해서 팬던트 등을 꺼내 챙기게 했다.
그런데 이 이름표는 어째서인지 읽을 수 없다.
역시 엘프들의 언어는 다른 것일까.
레이첼과 친했을지도 모르지.
“며느리라고 막 부려먹는 거 아니야?”
“아니야. 그 정도는 해야지.”
레이첼이 어린 애처럼 웃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레이나의 엄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다.
정말 놀랍게도 이 앞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방탈출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오래된 책냄새가 그윽하게 풍기는 공간을 지나자, 저 멀리 이 서고를 탈출할 수 있는 뒷문이 보였다.
“이제 거의 다 왔어. 레이첼.”
“…….”
“레이첼?”
“아? 응. 그래. 다 왔다고?”
왜 이렇게 정신을 못차려. 딸 만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응. 그러니까 레이나 볼 준비 하라고. 깜짝 놀랄 거야.”
“정말이네. 엄청 놀랄 거야. 너도.”
“응?”
“아니야. 저기 유은하. 여자애한테 이런 부탁하게 될 줄 몰랐는데. 앞으로도 내 딸을 사랑해줘. 약속해줄 수 있지?”
참나 그걸 부탁이라고 하고 있네.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 너도 사랑해줄게.”
“하아. 정말 이 바람기 많은 여자애를 믿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래. 그거면 됐어. 고마워. 너만 믿을게.”
나가려는 데, 뒷문에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록의 서고에 있는 그 어떠한 기록도 가지고 나갈 수 없습니다.
아, 도마뱀 메이드. 챙기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럼 나간다.”
"응."
나가면서 잠시 고개를 돌려 서고 내부를 살폈다.
깐프들이 기록보관소 진입을 막기 위해 함정으로 설치한 서고는 아무래도 나라는 존재가 너무 비상식적인 생명체였던 탓인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정말 예쁘고 강하고, 성격도 좋고 뭐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구나.
여운은 이제 됐고, 뒷문의 문고리를 열고 나갔다.
““유은하!””
나가자마자 나를 반기는 예쁜이들의 목소리.
어느새 내가 나왔던 뒷문은 사라져 있다.
내가 저곳에 다시 들어가면 음란한 도마뱀 메이드다.
“히사시부리? 오랜만? 오래 기다렸어?”
내가 예쁜이들을 너무 기다리게 했나보다.
“정말 걱정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어정쩡한 모습이에요?”
어정쩡한 모습이라니. 레이나는 내 등에 업힌 레이첼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 맞다. 내 어깨에 있는 엘프 레이첼이 네 어머니야.”
“네? 어깨에 누가 있는데요?”
“어?”
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등이 가볍다.
조금 전까지 레이첼이 업혀있던 내 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마지막에 뒷문 근처에서 봤던 게시판의 경고문이 떠올랐다.
기록의 서고에 있는 그 어떤 기록도 가지고 나갈 수 없습니다.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이름표를 떨어트렸다.
떨리는 손으로 떨어트린 이름표를 들었는데, 다시 보니그 이름표는 이제 내가 읽을 수 있을 수 있다.
[레이첼 실버류크]
그 엘프의 시신은 레이첼이었던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