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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히로인을 공략함-65화 (65/331)

〈 65화 〉 63. 무신의 편린

* * *

* * *

눈에 익숙한 천장이다.

나는 내 방 침대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내 방이면서도 내 방이 아닌. 그러니까. 내 심상세계 속 작가 유은하의 히키코모리 생활을 위한 방이다.

뭔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요염하게 꼬면서 나를 차갑게 바라보는데. 내가 무슨 잘 못이라도 했나.

“도대체 그까짓 여자가 뭐라고 그렇게. 아니 그래도 몸은 여자인데 여자가 그렇게 좋아요?”

몸이 여자라고 쥬지가 꼴린다는 법은 없지. 나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뷰지가 꼴린다 이 말이다.

“그럼 지금 이몸을 남자로 만들어줬어야지. 남자의 정신을 가진 내가 여자와 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남자가 된 여자는 남자랑 하게요?”

“눈 버리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론상 맞지 않을까.”

적어도 이론은 맞다. 취향은 존중. 나는 어떤 여자가 ts되어 열심히 BL을 추구해도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BL목표가 된 상대가 받아주느냐의 문제겠지.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당신 예전에도 악룡으로 위세 떨치던 시절에도 여자 좋아했거든요. 아지다하카. 당신은 애초에 남자 여자 의미가 없어요.”

그야 여자에서 남자, 남자에서 다시 여자가 된 꼴이니까. 의미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냥 남자랑도 하는 걸 보고 싶다고?”

암컷타락은 질색인데 말이야.

“아니, 내 말은 그렇게 질리게 여자랑만 했으면서 여자 하나 구하려고 100년이나 그 서고에 있겠냐는 뜻이잖아요. 나는 그게 어이가 없어.”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모녀덮밥은 그 누구나 꿈꾸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하아, 누구나 꿈꾸는 거라고 해도 이건 조금 심각하다고 봅니다. 아니, 잠깐만 애초에 모녀덮밥을 모두가 꿈꿔요?”

확실히 정말 보기 싫은 중년 아줌마가 상대라면 고민도 안 하겠지만. 레이첼을 보면 20대다. 20대 외모의 어머니와 그 딸. 먹지 않고 배기겠는가?

심지어 가슴을 제외하고는 무려 같은 피를 이은 뷰지가 복사가 되는 격이다.

이건 못 참지. 암.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 걸로 사람을 괴롭혀?”

“아니,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100년이라니. 덕분에 골치아파졌다고요.”

100년을 보내는 것은 난데? 설마 여기서 내가 보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것을 꿈으로 보기라도 하나.

“아니, 100년 버티면 되는 거잖아.”

“아지다하카. 당신도 나라는 걸 잊지 마요. 한마디로 인간적으로 굉장히 지루한 시간이 될 거 같거든요. 그렇다고 내가 직접 간섭하기에는 제약이 따르고.”

간섭한다고 해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인데. 뚝딱 하고 100년을 끝내버리면 레이첼의 호감도를 올리기 힘들잖아.

“어쩌라고?”

“뭐 정공법이 아니어도 되려나. 좋아요. 심부름 하나 해주시면 제가 조금은 줄여줄게요. 자요.”

작가 유은하는 혼잣말을 하더니, 내게 책 한권을 던져줬다.

[용사와 마왕]

용사와 마왕? 뭐지 이 책은.

“이 책의 내용을 완성하세요. 보상으로 시간 쭉쭉 지나는 마법이 걸려있을 테니까. 레이첼의 마음을 사로 잡는데도 문제없을 거에요.”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심심하면 자급자족 할 일이지 나한테 시켜먹는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 책을 폈다.

* * *

100년이라는 시간을 서고에서 보내고 마침내 본래 세계로 돌아왔다.

심부름을 끝냈더니, 보상이랍시고 준 것은 10년을 하루라는 체감이 들게 만드는 아주 기이한 마법이었다.

아니, 뭔 수작을 했는지 몰라도 10년이 지났는데 정작 내 체감상 24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그 마법은 나한테만 적용된 건지 레이첼은 실제 100년을 나와 함께 보낸 거 같다.

그야 그렇지. 고작 10일만이면 지금도 내 옆에서 내 손을 잡고 애틋하게 바라볼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나도 모르게 나와 레이첼의 사랑의 결정체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그렇게 10일이 지난 나는 마침내 레이첼을 데리고 송도의 팬트하우스로 왔다.

“소개할게. 레이나의 어머니인 레이첼 실버류크야.”

다들 휴게실에서 늘어져 있을 무렵. 당당히 내 여자가 된 레이첼을 소개했다.

“““…….”””

다들 벙찐 표정. 그중 레이나는 진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혹감, 당황, 반가움. 그리움. 시시각각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것을 보니 웃기기까지 하다.

“아니, 의미를 모르겠는데. 잠깐 어디 갔다 오더니, 5분도 안 되어서 갑자기 무슨.”

바깥에서는 5분도 시간이 안 지난 모양이다.

게이트를 연결하고 다시 서고에 들어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거의 든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심부름하겠다고 이 세계에서 좆빠지게? 봊빠지게? 아무튼 빠지게 열심히 했는데. 밖에서 5분이라니.

아니, 나도 이런 게 좋다. 100년이 지나있으면 괴인인 레이나나 색욕인 시우는 살아있을지 몰라도 지구는 멸망해있을 테니까.

“어.어머니!”

“딸…….”

레이첼과 레이나가 서로 껴안았다. 참으로 눈물겹고 감동적인 가족상봉이다.

특히나 레이나는 어린 시절 갑자기 열린 게이트로 인해 이쪽으로 흘러들어온 케이스니까. 정부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고 지금에 이르렀으나, 가족이 없는 외로움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제 어머니랑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모녀덮밥을 얻게 되었지.

“저기 그런데 그건 뭐야?”

“끼륙!”

이유정이 어느새 내 옆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드래곤을 쳐다봤다.

하얀색에 빛나는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다.

나를 잘 따르는 용이다. 그리고 레이첼의 자식이기도 하지.

그래. 더 말해 무엇하랴. 이건 나와 레이첼의 사랑의 결정체다.

“이건 그러니까. 어, 음. 나와 레이첼의 마력.”

“사랑이 만들어낸 결정체야.”

레이첼이 그렇게 말하더니 양손으로 볼을 만지며 얼굴을 붉혔다.

좆됐군. 벌써 레이나가 나를 째려본다.

처음에는 마력이라고 해서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머리채잡히지 않을까?

나는 레이첼과 함께 서고에서 생활하면서 서로의 마력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딱히 내가 하고 싶어서 만든 것이 아닌데, 저절로 만들어지더라. 나랑 레이첼의 마력이 섞여 있으니 버릴 수도 없다.

만일 버린다면 아이를 낳고 버리고 도망친 못난 어머니가 되는 것 같아서 일단 챙겨오기는 했다.

“이름은 레이야. 뭐 아이 낳듯이 낳은 애는 아니고 마력과 사랑의 힘으로 만들어졌달까?”

“딱 봐도 은하 자식이네. 은하가 그 용의 힘을 가지고 있잖아.”

유정이가 내 자식(?)을 품에 안았다.

크기가 딱 아직은 조금 큰 기니피그 만하다.

어디까지 클지는 모르겠지만, 저 용이 전투능력은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뀨르륵!”

좋다고 하품하면서 유정의 품에서 잠드는 모습을 보니 애완동물이 따로 없다.

그런 용을 바라보면서 어머니로서 자애로운 시선을 보내는 레이첼과 자기 동생이나 다름이 없는 용에게 질투를 하고 있는지 레이나는 레이를 째려보다가 나한테 화살을 돌렸다.

“그래도 그렇지. 하다하다 내 어머니를 건드려요!?”

“너무 그러지 마. 이유가 있으니까.”

나한테 달려드는 레이나를 레이첼이 막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호감도가 떨어지기 전에 레이나에게 전부 설명해야만 했다.

내가 사실 서고에서 100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이다.

내 설명에 레이나는 물론이오. 레이를 안고 있던 이유정이 입을 벌렸다.

“나를 위해서? 심지어 서고는 100년의 시간이었다고요?”

"뭐 한수지나 유정선배도 그런 일이 있으면 나는 똑같이 100년을 함께 했을 거야."

적당히 이미지 관리도 했다.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럼 하지 말라고 했을 테고, 레이첼도 계속 거기서 갇혀있었을 테니까.”

기록은 절대 나올 수 없다.

누가 불태워서 기록이 담긴 책을 지워서 없애지 않는 이상은, 기록이 그 서고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기록은 못 나온다면서요. 어떻게?”

“괴인.”

“어머니를 괴인으로 만들었다고요?”

“글쎄 은하가 나와 재회하고 대뜸 가슴에 코어를 박지 뭐니.”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지. 기록 상태에서 생명체로 되살리려면 코어를 박아야만 했다.

정확히 육체를 가진다는 의미와는 다르기는 한데.

그 결과, 본인이 본인의 시체를 수습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내가 내 뼈를 치우는 꼴이 우스운데.

­그래도 살아있으니 이건 중요하지 않지.

­아무리 그래도 이 뼈도 나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부수는 것은.

­뭐래. 나한테 레이첼이란 존재는 너 하나 뿐이야.

그때도 유혹하면서 열심히 키스했었지.

문제는 괴인이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몸을 종이로 만드는 능력. 그래. 일본의 어떤 닌자만화에서 나온 여캐릭같은 능력이기는 한데. 정확히 말하면 서고에 있던 기록들이 적힌 종잇장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텔포능력이 생겼다.

한마디로 팬트하우스에 있는 책에 들어가서 내 집에 있는 작가 유은하의 책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

꽤 유용한 능력이다.

모녀덮밥은 당분간 참을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고 보니 한수지가 없잖아?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이유정에게 물었다.

“한수지는 아직 나오지 않았죠?”

“응.”

설마, 그 돌대가리 박준혁도 했던 이벤트를 한수지가 깨지 못할 리 없는데. 오히려 한수지 쪽이 더 강하기도 하고.

이벤트에 관해서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내가 따로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 테지.

“일단은 레이첼과 레이나는 모녀의 시간을 가져. 나도 좀 피곤하니까 잠 좀 자게.”

의외로 피로가 쌓였다. 서고에서 진짜 매일같이 레이첼과 민달팽이놀이를 한 것만으로는 피로는 없다. 애초에 그런 걸로 악룡에게 체력적 한계는 없다.

문제는 빌어먹을 아카식 레코드를 너무 과하게 사용한 탓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를 계속 빼려니 머리가 아프더라. 일단 엘리느 마망의 세계와 레이첼의 세계를 지금 이 세계에 연결하는 정보를 얻는 데만 편두통이 왔다.

그리고 심부름도 빨리 끝내려고 남용하다 보니 돌아오니까 두통이 한 번에 몰려온다.

스토리완성을 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써댔는지 모른다.

“피곤하다니 네가 웬일이야?”

“100년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니까.”

아직 아카데미 가는 날도 아니니까. 조금은 쉬어도 될 것이다.

나는 휴게실에 히로인들을 두고 팬트하우스에 마련된 퀸사이즈 침대에 몸을 던졌다.

* * *

얼마나 잠을 자고 있을가. 두통이 잘근잘근 뇌를 씹어먹는 듯하다.

한참 몰려온 두통에 뭔가 잠을 자고 있다. 아니다라는 애매모호한 경계의 선에 섰다는 것을 느낄 무렵. 나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기이한 일이로다. 너까지 나의 편린에 들어오다니.]

이것은 무신의 목소리다. 에이 설마?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본래 적색 머리의 소녀에게 힘과 경험을 주기 위해 내 편린에 보냈으나, 나를 한 번 받아들인 너도 끌려온 모양이다.]

설마 나도 이 귀찮은 것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럼 나도 함께 이곳에서.”

[그래. 너도 함께 이 편린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 보아라.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잠깐. 아아악!”

내가 뭔가 말하려는 틈도 없이 저 빌어먹을 무신은 나를 편린으로 빠트렸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나는 사극에서나 볼 법한 막사에 있었다.

“? 여기는 어디. 한수지?”

내 옆에는 멍청한 표정의 한수지가 있었다.

입은 복장은 정말 야시꾸리하게도 노출도가 있는 갑옷인데. 마치 삼국지게임의 여캐릭터들이 입는 분위기의 갑옷이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무신님 정말 취향 특이하시네.

“은하?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무신께서 나에게 마련한 공간인데.”

“나도 끌려온 모양인데. 나도 한 번 인연이 있던 탓에 끌려온 모양이다.”

잠깐, 한수지랑 그렇게 대화의 장을 열다가 문득 밖에서 대뜸 막사로 갑옷차림의 사내가 들어왔다.

뭐지 저놈은?

놈은 우리를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척자매.자네들 뭐하나? 얼른 가게.”

어디를?

“성을 점령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을?

“단둘이 점령한다고 했으니, 잘 다녀오게.”

뭔 미친 개소리지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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