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히로인을 공략함-66화 (66/331)

〈 66화 〉 64. 무신의 편린(2)

* * *

* * *

상황을 정리해보자.

일단 나와 한수지는 무신의 편린. 기억의 조각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세시대 군인이 와서 나와 한수지에게 척자매라 하더니 성을 점령하러 가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건 퀘스트다.

[퀘스트: 한수지와 함께 성을 점령하라.]

그래서 그 성이 뭔지 봤는데, 말 그대로 성이다.

돌로 쌓은 성. 그걸 나와 한수지. 단둘에게 함락시키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본래 우리 둘의 자리를 대신해야 할 존재가 성 점령하겠다고 호언 장담한 것 같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아? 나 이런 건 머리 아파서 아무것도 모르겠어.”

“음.”

사실 나도 그리 많이 아는 건 아니다.

일단 대충 상황을 살펴보자면 무신은 척준경. 척준경의 편린이라면 척준경이 경험한 기억을 의미한다.

척준경이 활동하던 시대는 고려시대. 그리고 그가 활약했던 때는 여진정벌.

시발. 그런데 척준경이 성 하나를 점령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국사를 어깨 너머로 배운 내가 뭘 더 얼마나 알겠냐마는.

“아카식 레코드. 지금 상황에 대해 알려줘.”

[1107년 고려의 군주 예종이 아버지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 윤관을 원수로 삼아 17만의 별무반을 출정시킨 2차 여진정벌. 고려의 군대는 석성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때 척준경이 윤관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단신으로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적병들을 죽이고, 사기가 오른 고려군이 석성을 점령합니다.]

뭐야, 시발. 지금 그 상황이라고?

[무신의 편린은 그 시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니, 아마 비슷하면서도 다를 것입니다. 제일 먼저 무신이 아니라 마스터와 한수지가 그 자리를 대신한 ‘척자매’이며, 당시 기록에서 나오는 위인들도 무신의 바람으로 원역사의 인물들을 모티브로 삼았을 뿐이지 다른 인물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런 모방한 세계에서 잘 해보라는 건가.”

하지만 척준경은 활약할 대로 했잖아. 그런데 뭐가 한이 맺힌 거야? 그런데 더 케묻기에는 머리가 또 지끈거린다.

여기서는 아카식 레코드를 사용하기 힘들다.

남의 기억이라 그런가. 어쩔 수 없다. 후딱 끝내는 것이 모범답안이다. 나와 한수지가 무신을 모티브로 한 인물들이 되었으면 장난에 어울려줘야지.

“우선은 성을 점령하자.”

“미쳤어? 우리 둘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밖에 알아보니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한심하게 쳐다보면서 고전하고 있는 성이라던데?”

그걸 대체 왜 물어봐.

그리고 그건 일반인들이라서 그렇다. 제 아무리 잘 훈련받은 정예라 해도 미래에 능력을 가진 인간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 혼자 들어가도 성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시련은 한수지를 위한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양어깨에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주 매혹적인 느낌으로.

내 눈길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넌 내가 인정한 불꽃창녀 한수지야.”

“어. 그.그렇지.”

“나는 백염의 검희고. 능력을 사용하면 그만이야.”

박준혁도 해낸 것이다. 한수지가 못할 리가 없다.

“잠깐. 그래도 나 사람은 죽여본 적이 없는데.”

“익숙해져야지.”

나 혼자 죽일 수는 없겠지. 슬슬 한수지도 살인에 익숙해져야 한다.

원작에서는 처음에 살인을 할 때 잠깐이나마 망설인다. 차라리 이 편린에서 사람을 죽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한수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따른다. 그게 무슨 일이라도, 자기가 믿는 사람이 정의라고 여긴다.

솔직히 한수지도 정상은 아닌지라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면 죽일 것이다. 다만 그렇게 죽이는 것이 누구의 도움을 받느냐겠지.

나는 한수지를 나에게 의존하게 만들 셈이다.

“상대는 적이야? 아군을 죽이는 적이라고. 우리는 척자매로서 적들을 무찌르는 거야. 빌런이라고 생각해. 또는 괴수라던가.”

“아니, 그게 말이 쉬워야지.”

그렇지. 인간과 괴수는 다른 법이니까.

눈으로 딱 봐도 저건 인간, 저건 괴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한수지는 인간을 막상 죽이라 하면 못할 수도 있다.

조금 자극제를 줄까?

“너 훈련에 들어간 사이 나 유정선배랑 잤다?”

“읏.”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레이나와도 잤지. 그리고 최시우와도.”

“??? 시.시우까지?”

한수지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어이가 없겠지. 설마 수컷이었던 시우가 암컷이 된 것도 모자라 자기보다 빨리 나와 관계를 가졌으니까.

한수지 입장에서는 NTR이라도 당한 기분일까.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갑과 을의 관계를 명확히 할 때다.

어, 그런데 나기 조금 걸레 같지 않나? 뭐 어때. 삽입이 아닌 비비는 것은 노카운트다.

내가 삽입하는 것도 쥬지가 아니라 꼬리다.

“정확히는 다른 인격이지만 지금은 암컷이잖아. 정말 개처럼 따먹었지. 다시 말해서 너만 나와 진도를 안 뺀 거야.”

그저 단순히 히로인 중 하나라고 하는 격이다. 그러나 한수지는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의지할 곳이 필요하고, 의외로 단순한 생물이니까. 원작의 최시우에게 하렘엔딩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의 히로인들은 하렘에 대해 의외로 관대한 부분이 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자, 쟤네들 복장을 봐. 그냥 털난 인간형 괴수라고 생각하자.”

나는 막사 밖으로 나와 저 멀리 성벽 위에 있는 털달린 호복차림의 사내들을 가리켰다.

“으음. 해볼게.”

편린을 공략하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 * *

나와 한수지는 원 역사대로 성의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위에 오르자마자 보이는 너저분한 여진족 남정네. 나와 그 사내는 서로 눈을 맞췄다.

이것이 바로 운. 명.

“웬 놈이냐!”

“놈이 아니라 년인데요.”

우연히 허리춤에 있는 도끼로 여진족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빠직!

그래. 죽는 운명이라고.

보기 좋게 갈라지는 소리에 다른 무리들이 몰려들었다. 아직 그 수는 적지만, 여기서 더 난리를 피우면 수가 더 늘어나겠지.

저 정도야 잡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수지 역시 딱히 적들과 싸우는데 주저함이 없다.

“저 차림은? 고려의 계집들이다! 죽여라!”

“말많으면 죽어야지.”

빠각!

자기 들 만의 언어로 지껄이길래 시끄러워서 도끼로 또 부수었다.

그렇게 잡다 보니 어느새 우리 주변에는 도끼를 든 어린 애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다. 의외로 한수지는 사람을 쉽게 죽였다.

그 어린 애는 한수지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어린 애 놀아주는 것도 아니고 한수지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어이가 없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잠깐, 너 왜 가만히 있어?”

“야. 아.아무리 그래도 이런 애를 어떻게 죽여?”

단순히 어린 애가 아닌데. 저거 봐라. 눈에 독기오른 오랑캐놈이다. 손에 쥔 도끼로 기회가 생기면 우리를 죽이고 싶어하는 얼굴이다.

“어린 애라도 적이야. 심지어 너를 죽이려고 무기를 빼 들었잖아.”

“그래도.”

안 되겠어. 이렇게 나약해서야 빌런짓을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나중에 싫어도 어린애도 죽여야 한다. 진짜 어린애라고 하기에는 어린애 모습의 괴수나 빌런들이다.

직접 현실을 깨닫게 해줘야겠지.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못 본 척하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척했다. 너무 강압적으로 하면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저.정말?”

“그래. 이 녀석이 정말 아무 생각 없다면.”

“에잇! 죽어라!”

예상대로 건방진 꼬맹이가 뒤에서 도끼를 휘둘렀다.

한수지를 향하던 도끼를 쳐내고 꼬맹이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쓰러트렸다.

“켁!”

일부러 힘 조절을 했다. 내가 해주면 발전이 없으니까. 여기서 한수지가 직접 죽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했지? 얘네들은 죽여야 하는 적으로 봐야 한다니까? 그리고 여긴 무신의 편린. 이놈들은 죽어도 상관없어. 현실에는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해. 그때도 이럴 거야? 자, 검을 들어.”

내 명령조에 한수지는 검을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한테 달려들다 나한테 얻어맞아 피를 줄줄 흘리는 어린 애한테 겨눴다.

“으.으으으. 사.살려줘.”

"하아아."

한숨을 쉬면서 또 망설이네.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은데.

원작에서 시우는 한수지를 꽤 챙겨줬다. 지금의 최시우는 회귀 전에 열심히 히로인들과 떡쳐서 현자가 되는 바람에 세계를 구하겠다는 일념하나로만 회귀해서 히로인들에게 관심이없고, 자기 자신도 암컷타락하다 색욕이 되었다.

한수지는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라는 느낌이다. 색욕이 된 최시우는 머리에 성욕밖에 없을 테니 더 안 챙겨주겠지. 보빔 쪽으로는 관심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챙겨줄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진작에 최시우는 한수지를 어떻게 했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주워먹을 생각이다.

김재수라는 기둥이 사라진 탓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양이고. 이틈에 나만 믿는 순종적인 암캐로 만들어야지.

나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순종하는 암캐 한 마리는 있어야지. 안 그래?

나는 그녀의 귀에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제대로 죽이지 못한다면 난 너한테 크게 실망할 것 같아. 그럼 나는 너를 버릴 지도 몰라.”

지금 한수지에게는 내가 없으면 최악의 경우가 될 것이다. 기껏 나를 따라왔는데, 이대로 내가 버린다면 빌런의 제자라는 손가락질만 게속 받으면서 어디 의지할 곳 없다가 쓸쓸하게 죽겠지.

“!! 하. 할 수 있어!”

푸욱!

결국 스스로 꼬맹이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뒤늦게 본인도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고개를 저었다.

꽤 충격일 거다. 꼬맹이의 두 눈이 마치 원수를 쳐다보는 것 같았으니까. 저 놈 입장에서는 우리는 침략군에 불과하다.

“주.죽였.죽였어. 정말로. 한참 어린 애를.”

“어쩔 수 없어. 이게 당연한 거야.”

일반인들은 몰라도 헌터세계에서 이런 일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지금 한수지는 엄청 불안할 것이다.

뭔가 의지할 곳이 필요하겠지.

여기서 적당히 마인드컨트롤. 세뇌를 해야 한다.

“잘 들어. 한수지. 내 말은 무조건 옳아. 알겠어?”

“옳아?”

“그래. 나는 빌런이 되어버린 네 스승도 참살하고 벌써 한국에서 제법 유명한 헌터후보잖아. 그치?”

신검사용자 최시우는 신검 하나만으로도 사실상, 한국에서 인정받는 몸이고, 내 경우도 단순히 유진석의 동생으로 후광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오히려 특이한 백염을 다루는 검사로 유진석 아카데미 시절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

정령화살 레이나는 나와 최시우 만큼은 아니지만, 회귀한 이계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인기가 있고. 오직 한수지만이 유명하지 않다.

그나마 김재수 제자라는 타이틀이 있었으나 김재수가 빌런으로 나한테 죽고 완전히 명성이 땅에 떨어졌으니까.

그러니까. 떨어질 대로 떨어진 너는 나만 따르면 된다 뭐 이런 의미다.

“으.응.”

“그런 내가 빌런일도 하는 것도 옳고, 내가 사람을 죽이라하면 그 역시 옳은 결정이야. 너는 내 말만 믿고 따르면 돼.”

바보 최시우는 한수지의 이런 속성을 너무 안 써먹었다. 나처럼만 써먹었으면 한수지는 더할 나위없는 암캐가 될 텐데.

“아니, 그래도 옳지 못한 일이라도.”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너에게 있어 정의야. 그걸 명심해.”

나는 꼬맹이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훑어 손에 묻혔다.

그리고 그것을 한수지의 볼에 발랐다.

앞으로 날 따라오려면 온갖 짓을 다해야 하는데, 여기서 망설이면 곤란하다.

“정의?”

“그래. 네가 믿을 건 나 밖에 없어. 알겠지?”

아직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치지만, 감정이 앞서는 여자다. 나에 대한 사랑이 차있는 그녀는 나를 믿고 따를 것이다.

“자, 그럼 다른 놈들도 다 죽이자. 일단 우리는 여기서 고려사람이니까. 척자매로서 이 성을 점령해야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