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74. 시노하라와 핑 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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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본가
시노하라 유즈키는 아카데미를 마치고 포탈을 통해 시노하라 본가로 돌아왔다.
목욕탕에 몸을 담아 피로를 풀던 시노하라 유즈키는 뒤에서 닌자처럼 나타난 마리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악에 대해서는 뭐 알아본 건 있어?”
“아니오. 전혀 없습니다.”
“한국 헌터협회는?”
“역시 죄악에 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역시 없는 건가.
“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 하정석은 몰라도 한국의 헌터협회는 깨끗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거야 알고 있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것은 없다. 적어도 죄악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냥 한국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당장 혼돈의 오니 때만 해도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미친 작자들 때문에 초기에 대응하지 못한 탓에 일이 커졌다.
그 결과 동일본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동일본에서 멀쩡한 지역은 일본의 엘리트 헌터들이 주둔하고 있던 도쿄였다.
“혼돈의 오니 사태를 잊으면 안 된다. 아버님이 늘 말씀하셨지. 늘 다가올 위협을 조심하라고. 일본을 지키라고. 당장 한국에서 터진 죄악이 일본으로 건너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죄악에 관해 알아봐야 하는데. 한국 헌터협회에서 발표한 대로 죄악에 대한 정보는 굉장히 적었다.
“협회장 최철식이 숨겼을 리는 없어. 그렇다고 유진석에게 접근하기에는 미묘하고. 그러면 역시 유은하겠지.”
유진석은 애초에 이번 죄악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은하다.
정작 유은하의 반응은 꽤 미적지근했다.
어쩌면 죄악에 관해 깊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헌터협회 측에서는 유진석 때문인지 유은하를 털지 않는 듯했으나, 이번에 잘 만 하면 한국 헌터협회조차도 모르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은하에 대해 알아는 봤고?”
“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라니?”
유은하가 빌런이라도 되나?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게. 유은하라는 아카데미 생도는 그. 백합입니다.”
마리코는 언젠가 유은하와 함께 던전도 돌았었다.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꽤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이것을 당주에게 말해야 할지 깊게 고민했는데.아카데미 익명게시판을 확인하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주도 여자고, 일본 제일의 미녀로 불리고 있을 정도니까.
유은하의 덫에 걸리면 위험하다.
“백합? 한국 백합길드?”
백합길드라면 들어 알고 있다.
한국에서 아름다운 여성 헌터들로만 이루어진 길드.
소문으로는 그 길드의 마스터 꽃의 노아는 일반인이라도 예쁜 여자라면 들여서 거의 반강제로 헌터로 만든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 길드에 유은하라.
“아니오. 그, 여자들 동성연애. 그러니까 레즈비언이라는 뜻입니다.”
“어. 그래?”
백합. 레즈비언.
설마하니 신검의 여동생이. 지금 한국에서 가장 기대를 받는 생도 중 한 명이 레즈비언이라니.
대격변이 일어나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시노하라 유즈키도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 사랑만 있으면 동성끼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친하게 지내려고 한 여자가 레즈비언이었다니.
“네. 유은하를 공략하려면 여자로 유혹을 해야 합니다. 소문으로는 학장 이영희도 유은하에게 시선강간을 당했다고도 하고.”
“미친.”
고귀하기 짝이 없는 시노하라 당주의 입에서 조차 미친이라는 단어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존재. 바로 그런 존재가 유은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화하면서 유은하가 얼굴과 가슴을 자주 번갈아보다가 다리도 훑어보기도 했던 것 같다.
잠깐, 이거 위험한 거 아닐까.
“심지어 유은하는 염화의 창 한수지, 정령 화살 레이나와 이미 애인관계이며, 2대 신검인 최시우를 여자로 만들었다는,”
“왜?”
“그, 익명게시판에서는 최시우를 여자로 만들어 레즈비언 연인관계를 맺으려 했다고. 물론 추측이고 아카데미 신문에서는 이렇게 나왔습니다만.”
"나가서 보지."
시노하라 유즈키는 욕실에서 나와 마리코로부터 그 날의 한성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일면에 장식된 문구가 눈에 띄었다.
U 최시우의 성전환은 나와 관련 없어……무책임한 언행. 이것이 나쁜 여자인가?
“……아니,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역시 그렇죠? U가 아니라 Y일 텐데. 그냥 성을 그대로 알파벳으로 썼나봐요."
"이름이 아니라."
아니, 아무리 봐도 정치인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젊은 나이에 시노하라 가문의 당주가 된 시노하라 유즈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문과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 살고자 영재교육과 더불어 제왕학, 헌터로서의 가르침 마저 받아왔다.
그런 그녀조차도 충격적이었다.
‘신검을 가지겠다고 신검사용자를 여자로 성전환 시켰다? 남자가 아니라 굳이 여자로 연인관계가 되고 싶어서?’
시노하라 유즈키. 일본의 사실상 실권자이자 이미 세계에서는 시노하라 막부라고 불리는 가문의 주인으로서 그녀는 인생 처음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한참 손가락을 굴리며 고민에 빠진 시노하라 유즈키는 잠시 실익을 따져보았다.
어쨌든 죄악을 무찌른 것은 유은하다. 아니, 그걸 떠나서 훗날 한국을 책임질 존재가 될지도 모르는데. 친해져야만 한다.
‘그래.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다. 어디까지나 일본을 위해서. 그리고 그 정도 외관이면 여자들이 반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 당장 익명게시판만 보더라도.’
시노하라 유즈키는 휴대폰을 들어 한성아카데미 익명게시판에 유은하 관련 글들을 확인했다.
제목: 유은하 존나 따먹고 싶다.
존나 보비고 싶어! 시발! 난 노말인데 그년이 나를 레즈로 만들었어!
그래서 함?
ㄴㄴ얼굴 보니 갑자기 꼴리더라. 그때부터 비비고 싶어짐
백합빌런들 왜 이리 늘었냐? 진짜 한성은 빌런 아카데미가 맞다. ㄹㅇ
시끄러워. 니들도 좆비비던가.
그래. 이런 기이한 글도 올라올 정도다.
이 정도라면 뭐 상관없지 않을까? 잘만 꼬여내면 시노하라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백문이 불여인견이라고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실력을 믿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지켜보는 것이 좋다.
미리 준비는 해두는 것이 좋겠지.
“그러니까 유은하라 친해지려면 레즈비언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는 말인가?”
“예?”
“마리코. 일단 레즈비언 관련 소설이나 만화 가져와 봐.”
“네. 알겠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유은하에 대해 알아보자.
친구가 될지, 적이 될지. 그도 아니면 그저 그런 관계가 될지. 죄악을 알아보는 동안 그녀에 대해 탐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 *
한성 기숙사
한성 아카데미의 여자 기숙사에서 치파오 차림의 단발 여성이 마도기어를 통해 누군가와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핑 타오. 일본의 시노하라 코토네, 미국의 로즈마리와 달리 반에 전혀 녹아들지 않는 해외파 생도였다.
오로지 중국을 위해, 중국만이 위대하다고 배운 그녀는 한국인이나 다른 외국인과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었다.
죄악에 관해 알아보고 있나?
“예. 그런데 지금 한국도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애초에 소일본 놈들처럼 비열하게 첩보 전문인 놈들은 우리에게는 없으니 죄악에 대해서는 그저 형식적으로 물어본 거다. 내가 왜 전화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죄악은 형식적인 것이다. 세계헌터연합에도 알려지지 않은 것을 굳이 파낼 이유도 없고, 지금 중국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유은하 때문이로군요.”
고작 반도의 조그마한 나라에 신검사용자 유진석이 등장하는 바람에 우리 대중화는 한국따위에게 밀렸다. 그런데 그 동생이 유진석보다 더 대단하다면 중화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네가 이길 수 있겠나?
“아직 유은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틈이 매우 많습니다. 언제든 기습도 허용할 정도로 어리숙한 계집입니다.”
핑 타오가 보기에 유은하는 그저 언제든 공격하면 자빠트릴 수 있을 정도로 틈이 많았다. 그저 한국 언론과 아카데미에서 유은하를 너무 크게 추켜세운다고 여겨졌다.
정작 유은하는 기습당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그런다는 사실을 핑 타오는 알지 못했다.
신검 사용자 최시우는?
“최시우는 적의를 보이면 틈은 없으나, 유은하만 보면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와도 같습니다. 도무지 무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신검사용자. 성좌인 신검으로부터 검술과 막대한 성속성 기술을 부여받은 존재. 무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인 신검사용자 최시우는 유은하만 보면 목을 쳐도 모를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한국 최강의 루키라 할 수 있는 그 둘의 꼴을 보니 다른 헌터들도 알 만하다.
유진석세대의 한국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이길 수 있다는 뜻이로군.
“예.”
대련이든 뭐든 절대 최시우나 유은하에게 지지 말아라. 시노하라도 거슬리는데 대중화가 또 다시 오랑캐놈들에게 질 수는 없다.
“예 장군님!”
핑 타오는 마도기어를 끊고 서쪽을 향해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핑 타오. 중국 북경 군벌에 속한 헌터로 그녀의 목표는 최시우와 유은하를 이겨 중화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이 헌터시대에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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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를 다시 등교하고 며칠. 한성 아카데미 A반은 주로 실전이나 길드에 대한 공부만 했다.
남은 애들이 전부 어지간한 지식을 알고 있으니 당연한데. 이럴 거면 아카데미를 정말 왜 다니는 걸까.
진짜 탈주하고 바로 빌런생활로 할까?
아니다. 나는 헌터와 빌런을 양립해야 한다. 그래야 유진석 세대의 길드를 이용해서 죄악에 맞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시아와 빌런조직 백화의 힘으로 인천지역의 빌런들은 이제 정리되거나 포섭했으니, 이제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한다.
“자, 오늘은 던전실습을 가겠다.”
간만에 불방망이가 그럴 듯한 훈련프로그램을 통보했다.
어차피 협회에서 시킨 일이겠지만.
“던전에요?”
“이번엔 조금 달라. 이 반 애들 수준이 너무 높으니까. 길드가 가지고 있는 던전에 보낼 거다.”
길드가 가진 던전? 이 무렵이라면 백합 길드 밖에 없을 텐데.
“길드가 가지고 있는 던전이라면.”
“백합길드가 소유한 유리던전이지.”
백합길드. 한성을 후원하는 기업이 천산이라면 백합은 한성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인연이 있는 길드다.
오죽하면 학교 문양이 백합을 본뜬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리던전은 백합길드가 소유한 던전 중 하나다.
유리로 만들어진 괴수들이 나타난다.
사실 별거 없다. 보스를 제외하면 그냥 괴수들의 수만 많다. 던전 내부도 메카던전처럼 미로 형식도 아니고.
원작 최시우가 처음으로 들어간 길드 던전이 유리던전이었다.
다만, 이 던전은 인해전술이 엄청나다. 괴수들이 하나같이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몰려온다.
“유리던전이 혹시 그 어마어마한 물량?”
“그래. 뭐 너 대충 알고 있구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심지어 보물상자마저 유리로 되어있어서 최시우와 히로인들이 아쉬워했던 설명까지 기억난다.
“아, 네.”
“그럼 은하가 있으니 설명할 필요도 없겠네?”
뭐 이년아?
“야. 교관.”
이년이 지금 누구한테 맡겨. 진짜 월급루팡인가. 최근 보면 나한테 전부 맡기고 있다.
심지어 실력있는 애들은 아예 따로 길들도 빼려는 것 같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교관으로서의 의무는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뭐 이번 시간 끝나고 밖으로 나가라. 백합길드에서 보낸 차량이 올 테니 그거 타면 유리던전으로 갈 수 있을 거야.”
“교관님은?”
“나? 놀아야지.”
이년이 진짜 사람이 맞나? 어디서 노가리를 깔 생각을.
“야, 당신 교관이야.”
“아 몰라 아쉽지만 죄악일로 바빠서 나는 협회에 들러가야 하니까.”
불방망이는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더니 그대로 창문을 열더니 밖으로 뛰었다.
그래. 도망쳤다는 뜻이다.
저 인간 언젠가는 반드시 보벼버린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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