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191. 레이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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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막부의 쇼군 시노하라 유즈키는 사도 앞에서도 그 기세를 잃지 않았다.
“무슨 착각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나태의 죄악이 우익세력을 선동하여 일본에 내전을 일으킨 것을 수습한 것도 전적으로 막부였으며, 전후 피해복구에 백화교가 도왔습니다. 서로 전쟁의 아픔이 있으니 뭉치는 것인데. 그간 아무것도 안 하신 사도들이 숟가락을 얹겠다니요.”
“아무것도 안 하다니.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는 말이네!”
나름대로의 사정이라, 그거 좋다.
그 사정 중에서 놀고 먹고 뒤에서 정치인 뒷담이나 까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그럼 보조나 하시던가요. 사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조사와 토벌을 비롯한 대책들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곳의 정보 역시 넘길 수 없습니다.”
“뭐라고? 이봐.”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이 몸은 막부의 쇼군입니다. 사도라 해서 막말할 수는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사도는 정의로운 세계경찰이지 그 권한을 이용해서 나라의 위에 설 수는 없는 일이다.
“크윽.”
“정 돕고 싶으시다면 우리가 정보만 ‘가끔’전해드릴 테니 그때 숟가락을 얹으시던가요.”
이건 나름대로 타협이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숟가락만 얹는 꼴이 우습지만, 분노의 죄악 탓도 있고, 사도의 명성이 땅에 추락하면 분노의 죄악이 어떻게 굴지 모른다.
그러니 사도의 명예를 떨어트리려도 최소한으로 떨어트리는 것.
분노가 나대지 않을 정도로만.
그리고 사람들이 이전만큼 사도를 신임하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음, 그만들 하지. 알겠네. 정 그렇다면 물러나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도 뭔가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금발훈남이 대뜸 사도들을 중재하면서 우리에게 슬쩍 또 요구했다.
저런 식으로 은근슬쩍 받아가려는 거다.
이 새끼가 죄악이야. 죄악.
죄악 주제에 잔꾀만 있구나.
나는 금발훈남에게 찐따가 입다가 버린 거 같은 와이셔츠를 줬다.
“여기요.”
“이건?”
“죄악 놈이 있던 와이셔츠네요.”
내 말에 금발 훈남의 얼굴이 제일 먼저 일그러졌다.
그래. 그래야지 분노의 죄악답지.
내가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줄 것 같냐?
“뭐 좋아. 이것만 받고 가지. 그런데 혹시 시간.”
“꺼지라고.”
어디서 시발 외모로 어떻게 해보려 하고 있어. 뒤지려고.
결국 분노의 죄악은 가는 길에 한껏 인상을 찡그리더니 사라졌다.
불만 속에서 사도들이 사라지자 유즈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만일 이 일로 사도가 등을 돌린다면.”
“사도 전부는 아니겠지만, 사도 중에 죄악과 연결된 자가 있을 거야.”
아직 그녀에게 전부 말하기에는 이르다.
원작보다 더 판이 커진 시점에서 잘 못 말했다가는 인과율이 또 엉망이 될 테니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사도가 썩었다고 해도.”
“그러지 않고서야 나태가 그리 쉽게 일본에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지.”
“아.”
일본은 동일본의 재앙을 겪고 시노하라 가문을 비롯해 주요가문들이 주축으로 마도방공망을 만들어냈다.
특히 한국에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천산의 협조를 받아 서일본의 전역을 마도 방공망을 펼칠 수 있었는데. 죄악과 같은 강력한 마기를 느꼈다면 자연스럽게 방공망이 작동했을 것이다.
물론 죄악의 힘을 방공망이 당해낼 리는 없지만, 방공망이 파괴되면 시노하라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거라는 것.
그런데 방공망은 멀쩡하니 문제다.
그리고 그 방공망에 대해 아는 것은 사도들.
나태가 침입해야 한다면 그 사도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그 사도는 진작 사도들의 신임을 쌓아올린 분노였을 테고, 분노는 이번에 죄악이 일본에 침입한 일을 전 총리가 먼저 나태에 접근했다거나 또는 마도 방공망이 죄악을 감지하지 못했다고 했을 것이다.
“그냥 썩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묘하고. 아까도 정보를 가져가려 했잖아. 우리 손에 죄악의 정보가 들어오려는 것을 막으려는 거야.”
게다가 다른 사도까지 선동하는 모습은 정말 징그러울 정도다
“일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 꼰대들이 우리만큼 죄악을 잘 알아서 팰 수 있겠어?”
“그것도 그러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사도 세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 무시했으나, 분노를 제외한 다른 사도들은 멀쩡한 데다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분노가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나서지 않겠지.
나태가 이렇게 철저히 당해서 한국의 백화교와 막부가 인기를 얻으면 분노도 어쩌지 못하니까.
지금의 내가 죄악이 사도에 있다고 해서 잡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괜히 지금 저 새끼를 잡았다가는 뭔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특히 귀찮은 능력인 만큼 변수는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총리는?”
“오키나와에 처박혀 있더군요.”
“도망치지 않았네?”
아니면 도망치지 못한 걸까?
“도망치지 못한 겁니다. 이미 오키나와까지 수배전단이 퍼진 탓에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나태가 데려갈 일도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건 다행이다. 죄악을 끌어들여 매국노짓이나 했으니, 유즈키 입장에서는 죽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하면 끝이겠지.
“어떻게 했어?”
“고슴도치로 만들어 오니의 권능을 사용했죠.”
천검으로 검을 잔뜩 박고 그대로 열을 올려 녹여버린 걸까?
그거 조금 무서운데. 뭔가 상상이 간다.
“순식간에 백골이 되어버렸겠네.”
“아예 깔끔하게 지옥불에 재도 안 남게 해버렸습니다. 징그럽잖아요.”
“악인의 좋은 최후로군.”
역시 악당은 지옥불에 구워야지. 암.
“그러게 말이에요. 뭐 국제법에 따르면 당신과 저 같은 괴인들이 나쁘지만.”
어느새 유즈키는 인간이 아닌 스스로 괴인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니 막부를 성립하면 안 되겠다고 처음에는 생각한 모양인데. 결국 내 말을 들어준 것이다.
“들키지 않으면 범죄도 아니고 우리 나쁜 짓 안 했잖아?”
“아 그런가요? 아지다하카는 십억 이상을 잡고 오니도 일본인 수천만 이상을 잡았습니다만.”
오니의 코어가 융합된 이상, 그녀는 저 스스로 오니이면서 동시에 시노하라 유즈키라고 여기고 있다.
아마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로서는 뭐라 할 수 없지만.
너무 죄의식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자신은 혼돈의 오니라 여기는 거야?”
“제가 가진 능력이 그 증거니까요. 하지만 설령 지옥에 있더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나쁘지 않아요.”
“나도 그래.”
내 히로인들이 있는 곳이 곧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저 말고 여자는 잔뜩 있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할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내 여자는 단 한 명도 내주지 않는다. 딱 그 정도일 뿐이다.
지옥에 있다면 끌고 나오고 천국에 있어도 끌고 나온다.
오로지 내 옆에 둘 것이다.
“그거랑 이거는 다른 이야기지. 나는 내 여자가 단 한 명이라도 빠지면 참을 수 없어. 유즈키가 지옥에 있다면 억지로 끌고 나올 거야.”
“그것참 고맙네요.”
흥분했는지 어느새 뿔이 다시 솟아 오니 모습이 된 유즈키가 요망하게 웃었다.
“오늘은 시간 좀 비워두실 수 있나요? 아니, 그리 해야만 합니다.”
“왜?”
“날 꼴리게 해놓고 혼자 다른 여자 안으러 가면 참지 못해요.”
유즈키가 셜츠의 윗단추를 풀더니 음란한 가슴골을 드러냈다.
참을 수 없지.
“알았어.”
그래. 이것이 바로 동료이자, 애인이자 부인이 아닐까? 히로인들과 평생 함께할 생각 하니 행복하다.
* * *
유은하가 한참 유즈키를 공략했을 무렵. 레이는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놀고 있었다.
한성아카데미 중등부는 주로 강화계 헌터를 양성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신체단련이 주 수업이었다.
A반의 생도인 레이는 당연히 그 특유의 외모와 능력 탓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유은하를 닮아 미래가 기대되는 완벽한 백발 미소녀라는 이미지에, 신체능력 역시 뛰어나니 레이가 주목받는 것은 당연했다.
수업은 주로 팀을 꾸려 대전을 하거나 연습대전, 신체능력 테스트 등등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레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대인 격투와 팀전이었다.
“우효옷!”
“으아악! 레이무쌍이다!”
레이가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가 되었으며, 그 누구도 레이를 막지 못했다.
그녀와 친해진 드워프의 딸 류아와 매일 거지라고 놀림당하면서도 레이에게 ‘소매 넣기’를 당하고 있는 이흥순은 고민이 많았다.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네.”
“그러게. 얼굴도 예뻐, 집은 부자에, 부모님도 예쁘고, 힘도 강하고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아 성격이 있구나.”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가끔 침 흘리기도 하는 것이 좀 수상하기도 한데.”
“침흘릴 때의 눈은 마치 맛있는 걸 보는 얼굴이었지.”
“그러고 보니 최근에 몇몇 남자애들이 막 고백하고 그러던데.”
“이상하게 레이는 관심 없어 했지.”
그 고백현장은 두 소녀도 함께 봤었다.
레이!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줘!
싫은뎅.
레이! 우리 집은 대기업이야! 나랑 사귀면 행복하게 해줄게!
울 아빠는 천산기업과 친한뎅.
레이 반했다! 사귀자!
약골 새끼가 어디서 힘자랑이야?
잘생긴 얼굴만 믿고 접근하던 놈, 재산으로 접근하던 놈. 힘으로 접근하던 놈.
모두가 하나같이 레이에게 쫓겨났다.
운동을 끝낸 레이가 두 여자애에게 다가오자 곧바로 이상형에 대해 물었다.
“음, 내 이상형? 엄. 아니, 아빠인데?”
“응?”
“아, 그 아빠라면 뭐 그럴 만도 하겠지만.”
“아빠 자고 있을 때 몰래 따먹는 게 꿈이야.”
아빠를 따먹어?
순간 류아와 흥순은 저것이 한국말인지 의심스러웠다.
아빠를 따먹는다니, 세상 어디에 그런 자식이 있을까.
“네 머리를 가끔은 이해할 수 없어.”
“너희 따먹는 건 패시브고!”
그렇다. 레이의 궁극적인 꿈은 유은하를 따먹는 것이지만, 류아와 이흥순과도 연인처럼 지내고 싶었다.
마치 아빠와 다른 여자들처럼 말이다.
“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무서워졌는데. 레이. 일단 태클 걸 게 많지만 보통 결혼을 하면 부부는 남편, 아내 빼고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거나 잠자리를 가져서는 안 돼.”
류아는 드워프 아빠가 가르친 대로 레이에게 설명했으나,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울 아빠는 여자 많은데?”
“어. 어어. 진짜?”
당연하지. 당장 열명은 될 것이다.
심지어 엘리제랑 로즈마리 같은 모녀도 있다.
레이에게는 큰 꿈이 있다. 언젠가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유은하처럼 많은 여자를 품에 안겠다는 꿈이.
바야흐로 모녀 2대 큥큥시대를 여는 것이다.
일단은 이 비비는 거에 무지한 어린 양들에게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주기로 했다.
“엄마 공인이야!”
무려 엄마 공인 외도! 이것만 봐도 아빠는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자랑하는 격이다.
“심지어 공인이라고?”
류아와 흥순은 경악했다.
둘 다 정상적인 가족구성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레이 집안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아니, 애초에 딸이 아버지를 따먹는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비정상이겠지만.
“흥순이네 엄마도 울 아빠 여자 되면 참 좋을 텐데. 아빠가 좋아할 스타일이거든.”
“아니, 우리 엄마는 왜 나오는데?”
왜 나오기는 아빠가 노리고 있으니 그렇지.
‘음, 판을 좀 깔아줄까?’
친구인 흥순을 같은 편으로 만들면 아빠가 흥부 부인을 얻기 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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