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 216. 살아남은 내 승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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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와 합체, 또는 내가 먹히는 것.
결국 흡수와 합체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만일 내가 여기서 너를 흡수하면 정말로 네가 이 세상에서 보낸 영겁의 세월이 내 머리 안으로 들어오는 거야?”
“그렇겠지. 정신력이 강하지 못하면 성격은 서서히 이전의 너처럼 변하고 말걸?”
흠. 확실히 그건 조금 고통스러울지도.
“하나가 된다면?”
“하나가 되면 내 정신까지 너와 하나가 되는 것. 그러니 정신적인 충격은 없겠지. 대신 인격의 변화는 남겠지만.”
그렇겠지. 아마 나는 구 아지다하카의 성격이 생길 것이다.
거기에 크싸레의 성분이 섞이겠지.
“반대로 내가 너에게 먹히면?”
“네 기억을 온전히 내가 가지는 것. 너의 일부였던 내가 본체가 되는 거지.”
“한마디로 어둠의 용용이가 본체가 되는 건가.”
오,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먹힌다.
이런 중2병 같은 설정을 또 어디서 볼까.
솔직히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재밌게만 보인다는 뜻이지 실제로 먹힐 생각은 없다.
가만히 보니 이년도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고.
“내가 먹히는 거나 내가 너를 먹는 거나 결국 어느 것도 상관없어. 누가 겉의 베이스가 되냐가 문제인 것뿐.”
“호오. 그렇구나.”
그렇다면 하나로 합치는 것도, 내가 얘에게 삼켜지는 것도 둘 다 좋지 못하다.
역시 흡수가 답인 걸까.
아니면 이대로 서로 분리되어있는 것은?
“이대로 서로 분리되어있는 것은?”
차라리 분리되어있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나?
“그게 가능할 거로 생각해? 내 존재 자체만으로 결국 세상은 침식되어버리고 만다니까? 결국 내 자신도 사라지고 말 거야.”
그건 또 안 될 문제인데.
그럼 결국 하나가 제일 좋은 걸까.
“그건 또 아쉽네.”
“그러니까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이거 꽤 곤란한 것이 아닐까.
어느 쪽으로든 내게 변화가 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정신력을 믿을 수밖에 없을까.
본체로서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흡수하는 방법밖에 답이 없겠지.
하지만 만약 흡수가 실패한다면?
흡수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건 이것대로 도박이다.
그렇다면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인가?
“그럼 하나가 답이라는 건가.”
아무런 리스크가 없어지려면 그것이 답이라는 것.
“뭐 확실히 차이는 날거야.”
어느새 기괴하게 웃고 있는 파편.
“어?”
“서로 이렇게 정신이 반은 융합되어있는 상태니까 말이야.”
슬쩍 눈을 아래로 내려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네.”
어느새 내 몸도 시꺼멓게 변했다.
끈적한 검은색의 물질로 내 몸이 칠해져 있다.
“이미 융합은 시작되고 있거든. 결국 네 덕이야. 서로 절정에 이르면서 우리의 정신은 하나로 융합되고 시작한 거지.”
그런 거 같기는 하다.
뭔가 감각이 새롭다.
내 눈으로 파편을 보고 있는데, 파편의 시야로 내 모습을 보는 것이 공유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가 된다는 걸까?
“음. 결국 그럼.”
“너의 그 변태적인 성격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후우. 이거 정말 미치겠네.”
자업자득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으음. 그것도 좀 상관없을지도.
이렇게 기분이 좋다면야.
애초에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참 융합되던 파편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데 이제 보니 너. 조금은 다른 거 같네.”
“어?”
다르긴 뭐가 달라?
설마 뭐 다른 거라도 있다는 거야?
“뭐 상관없나. 뿌리는 같으니까. 오히려 물들일 수 있으니 나쁘지 않지.”
그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무슨 소리야?”
“한 마디로 너는 본체가 아니지만, 본체가 될 거야.”
본체가 아닌데 본체가 된다? 그렇다면 나는 그럼 다른 사람이란 거야?
“그. 그게 대체 무슨 소.”
그 말과 함께 파편이 녹아 내 몸에 들러붙어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이 무너졌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알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아니,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지옥인가?”
설마 지옥치고는 뭔가 눈에 익숙하다.
그래. 마치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그 파괴된 고대인의 세계 같다.
“지옥이 아니야. 본체가 처음 이 세계 왔을 때의 장면이지. 거울을 봐.”
파편은 전신거울을 하나 꺼내 내게 보여줬다.
그런데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어떤 금발의 꼬마애다.
“뭐야, 왜 어린 애인데?”
“본체는 죽은 여자아이에게 빙의했거든.”
“빙의할 필요가 있었어?”
이미 육체도 있는 년이 뭣 하러?
“세상을 넘나드는 것은 신의 권능이야. 아무리 본체라도 힘들었지.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세상의 육신이 필요했어.”
“그래?”
“때마침 죽은 여자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에게 빙의한 본체는 그 아이처럼 살았지.”
화면이 바뀌었다.
이전의 나. 아지다하카는 고대인의 세계에서 빙의한 꼬마애의 몸으로 살았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저 몸으로 살면 어떻게 자라는 걸까?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외모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해?”
“남자가 여자 이야기 나오면 예쁘냐? 묻는 거나 비슷한 거야.”
궁금하잖아.
과연 저 상태로 크면 어떤 모습이 될까?
“네 예상과는 달리 커가면서 원래의 외모로 돌아가는 거야. 그냥 죽은 아이의 몸은 그릇일 뿐이었지.”
“신기하네.”
“그리고 본체는 함께 커서 혼인 약속까지 한 사내를 배신하고 세상을 멸망시켰지.”
파편이 손을 흔들자 장면이 바뀌었다.
세상을 파괴하는 아지다하카와 그를 막으려는 한 사내.
마치 마왕과 마왕을 막으려는 용사와도 같다.
제발 정신 차려!
뭔가 착각하고 있어 에이든. 애초에 이게 나야.
뭐?
네가 좋아했던 애는 8살 때 이미 죽은 몸이었거든. 그 몸을 차지한 것이 나고. 아, 오해하지는 마. 죽은 아이 몸에 깃든 거뿐이니까.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의 몸을 차지했던 아지다하카에게 분개한 사내가 아지다하카에게 덤비다가 그대로 목이 썰렸다.
“뭐야, 저거 무섭잖아.”
어우야, 끔찍하다. 용용이는 저런 끔찍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정말로 그래?”
“어?”
“너는 본체가 아니라도 뿌리는 같아서 똑같을 텐데?”
그러니까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는 거지.
“그게 무슨.”
“자, 다시 봐. 절망감에 빠진 저 사내를.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들을.”
파편이 내 얼굴을 잡고 절망한 사내와 고대인들을 보게 했다.
그래. 확실히 징그럽다.
“아니, 잠깐 나는.”
“기분 좋잖아. 안 그래?”
좋을 리가 없다.
“그런. 아니, 나는 이런 사이코가.”
“맞다니까? 결국 뿌리는 같은데 아닌 척하지 마.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 없다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지옥도를 보고 마냥 좋아하는 미친년은 아니란 말이다.
여기서 저 말을 더 듣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나는 있는 힘껏 파편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순간 얼굴이 옆으로 돌아간 그녀는 “어떻게 네가.”라는 말을 금방이라도 할 거 같은 배신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씨발 조금 전까지 치고 박고 싸웠으면서 배신당한 척 개쩌네.”
조금 전까지 더 심하게 싸웠는데 뭔.
나는 이런 것으로 절대 즐기는 변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것이 내 대답이야.”
“뭐?”
“확실히 나는 뿌리가 같아서 좋아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지금의 나는 저런 짓을 할 시간에 보비는 게 더 좋다고.”
굳이 한다면 길거리 여자 헌팅해서 반강제로 보비는 것?
크싸레의 정석이 아닌가?
그게 낫지 뭔 갑자기 살인이 좋니 어쩌니 해도 정신병자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그런 건가.”
“그래. 그런 거지.”
뭔가 씁쓸하게 웃는 모습이 영 느낌이 좋지 않다.
“다를 수밖에 없는 거겠지.”
“응.”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파편의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면 지금은 나를 완전히 노리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두 눈이 나를 콕 쏘아붙이듯 쳐다본다.
“무슨 소리야?”
“사실 그냥 흡수당할 생각이었는데. 말했잖아. 너는 달라.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물들여야겠어.”
“어?”
파편이 내게 달라붙더니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버티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힘이 빠진다.
다시 의식이 멀어져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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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사라진 것도 잠깐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려가듯 끌려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작가 유은하와 마주 앉았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불린 것 같은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모습은 마치 예전의 모습과도 같은데요.”
작가 유은하가 내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한숨을 쉴 일은 아니잖아.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뭐 그렇게 되었네.”
“뭐 사람을 죽이고 싶다던가. 그런 마음이 들어요? 막 식인하고 싶다던가. 그런 거 말이에요.”
글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다.
“아니? 전혀.”
“흐음. 예상보다도 파편의 의지보다는 당신의 변태성이 더 강했나 보네요.”
“그럴까.”
어쨌든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이런 것 같은데.
“어째 아지다하카의 외모에 더 가깝지만요.”
“글쎄 전과는 크게 다른 거 같지 않은데.”
뭔가 가슴이 더 커진 느낌?
가슴이 웅장하다! 이전의 그 찐따 같던 용용이가 맞나?
이 말하면 레이첼에게 머리채 끌어당겨져서 한 달간 뱀탕 먹을지도 모른다.
그런 결과는 맞이할 수 없지.
“느껴지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잖아요. 전에는 그냥 단순히 변태 같다는 생각만 드는데. 지금은 뭐랄까. 모르겠네요.”
작가 유은하는 내 몸을 위아래로 빤히 쳐다본다.
“뭐 아무려면 괜찮은 거 아니야?”
“뭔가 몸이 더 음탕해진 느낌?”
뭐야, 그게. 사람을 변태로 만들고 있네.
“그런 걸 잘도 말하네.”
“원래 아지다하카의 몸은 상당히 이상적이거든요. 물론 당신도 내 몸인 이상 예쁠 수밖에 없지만, 특유의 스타일 그런 거 말이죠. 아, 그래 그런 분위기에요. 예전엔 엄청 예뻐도 그냥 레즈비언으로만 보였는데.”
그럼 지금은 뭐 더 다르다는 건가?
“그런데?”
“지금은 둘이 합쳐진 묘한 상태? 쥬지뷰지 전부 꼴리게 하는 그런?”
“아니, 원래 나 보고 안 서는 수컷들은 병신 아니야?”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한데.
나도 남자 인생 살아봐서 알거든.
솔직히 나 같은 암컷 보고 안 서는 새끼가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니라, 분위기에서 수컷을 유혹하는 느낌이 들어요. 특유의 그런 게 있어요 하여튼.”
아, 그런 분위기 알지.
유혹하는 건 아닌데 움직임이라던가 분위기 자체에서 암컷의 페로몬을 풍기며 수컷을 유혹하는 그런 거 말이지.
그게 나한테서 느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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