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대가가 있을 텐데
조심스레 건네져 오는 박율의 목소리 앞으로 상태 창이 떴다.
「<힐러가 도울게요!> 선택받은 용사 ‘박율’
치료하기 / 가져오기」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지금까지 지켜보니, 이 사람들은 어디를 다쳐서 와도 영 말하지를 않았다. 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치료하기를 선택했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안 한다면 내가 찾아서 치료하는 수밖에.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박율의 옆구리와 무릎 부근을 둥글게 감싸던 푸른빛이 나에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상태 창 옆쪽으로 저번에 봤던 막대 모양의 게이지가 다시 떠올랐다. 붉은색이 살짝 더 채워졌다.
“아, 이한아. 별로 심각한 건 아니었는데.”
고마워, 하고 작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심각한 상처는 뭐고, 심각하지 않은 상처는 뭘까. 일단 상처가 있다면 작든 크든 치료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저도 별로 힘들게 치료하는 건 아니에요, 율이 형.”
다시 눈꼬리를 접어서 맑게 웃는 박율을 향해 말을 이었다.
“라엔 형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방금 박율과 라엔 둘이 밖에 다녀왔으니 라엔도 상처를 달고 왔을 듯싶었다.
“아마 방에 있을 거야. 찾을 때면 항상 방에 있더라.”
하긴, 나라도 그런 분위기의 방이라면 온종일 들어가 있고 싶을 거였다.
박율이 조심히 들어가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물뿌리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건물로 들어가는 내 등 뒤로, 꽃잎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
똑똑.
라엔의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송하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을 맞게 찾아온 건지 다시 확인했다. 라엔의 방이 맞았다. 곧이어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견, 아주 자기 방이죠…. 어, 이한? 들어와요. 무슨 일이에요?”
라엔은 커다란 벨벳 의자에 앉아서 몸을 반쯤 틀고 있었다. 송하견은 라엔의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채였다.
방 한가운데에 빛으로 그려진 커다란 지도가 떠 있었다. 송하견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지도가 빛 알갱이로 흩어져서 사라졌다.
라엔의 바로 앞에 있는 책상 위에는 저번에 봤던 수정구와 큐브처럼 보이는 네모나고 알록달록한 상자들, 그리고 열린 잉크병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책상 위 공중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 여러 장이 떠 있었다. 차곡차곡 모인 종이가 책상 위로 가지런히 올려졌다.
“앉아요, 이한.”
라엔이 자신의 옆으로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왔다. 그러고는 송하견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하견. 바로 옆에 탁자 서랍 좀 봐 줄래요? 거기 은색 통이 있나요?”
“…응.”
“고마워요.”
송하견이 이제 가려는 듯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섰다.
라엔이 손을 가볍게 까딱이자 탁자 위에 놓였던 투명한 유리잔과 서랍 안에 있던 은색 통이 둥실 떠올랐다. 그러고는 이쪽으로 부드럽게 날아왔다.
“이한. 단 거 좋아하나요?”
“네, 좋아해요.”
라엔이 작게 웃으며 원형 통을 스륵 돌려 뚜껑을 열었다.
“나도 좋아해요.”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라엔은 날카로운 표정보다 이렇게 옅게 미소 지은 모습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어느새 허공에 둥둥 뜬 작은 수저가 통 안에서 갈색 가루를 한 움큼 담아 유리잔에 옮겼다. 라엔이 흰색 주전자를 소환해 유리컵 안으로 부드럽게 기울였다.
주전자 입구로 우유가 쏟아져 나오며 유리잔에 김이 서렸다. 라엔이 수저로 그걸 몇 번 휘젓고는 나에게 건넸다.
손에 닿아 오는 유리잔이 따뜻했다. 한 모금 마시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초콜릿 맛이 났다.
“맛있어요, 형.”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라엔이 내 머리칼을 살짝 쓸며 말했다.
“음…… 다음에는 내가 타 줄게요, 형.”
가진 게 없으니 코코아 가루도 내 건 아닐 확률이 크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그때 침대 쪽에서 송하견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까 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던 송하견은 침대에 여전히 앉은 채였다. 라엔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견은 단 거 싫어하잖아요.”
“…싫어하지는 않아.”
“언제부터요? 아니,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
라엔의 목소리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들렸다.
송하견과 라엔이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다고 했으니 서로 아는 것도 많은 듯했다. 나중에 송하견에게 물어봐야지. 라엔의 의심을 단번에 풀 수 있는 말을 혹시 알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하고 있다가 송하견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정말이었다. 송하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견 형, 내 거 같이 마실래요?”
“응.”
송하견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라엔이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뺏어 먹을 생각하지 마요.”
“…응.”
“대답이 조금 건성인데요.”
송하견을 빤히 바라보던 라엔이 가볍게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뭐, 따로 못 만들어 줄 건 없긴 한데요….”
송하견이 나와 잠깐 시선을 맞추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럴 것 같았어요.”
라엔이 예상했다는 듯 조그맣게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송하견이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머리를 가볍게 다독였다.
“갈게.”
라엔에게도 고개를 끄덕인 송하견이 순식간에 방 밖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엔이 다시 옅게 웃고는 말을 꺼냈다.
“이한. 그래서 왜 왔어요?”
아차, 단 것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릴 뻔했다. 라엔에게로 한 손을 뻗었다.
“라엔 형, 손잡아 주세요.”
라엔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맑은 금색의 눈동자에 내 모습을 담은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눈썹을 살짝 올린 라엔이 멋쩍은 듯 미소 짓고는 손을 뻗었다.
“이렇게요?”
라엔이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듯이 쥐었다. 부드럽고 단단한 손이었다. 어쩐지 달콤한 향기가 훅 밀려오는 듯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라엔’
치료하기 / 가져오기」
상태 창이 제대로 떴다. 라엔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치료하기를 선택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푸른 빛무리가 라엔에게 연하게 퍼져 있다가 내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걸 바라보고 있을 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
고개를 들어 마주 본 라엔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진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치료 마법의 대가는 뭔가요?”
대가? 그런 건 딱히 없었는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자 라엔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전히 내 손을 꼭 잡은 채였다. 힘이 좀 더 들어간 것 같았다.
“잘 생각해 봐요. 정말 아무런 대가도 없었나요?”
라엔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글자마다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인과율의 법칙. 원인 없이는, 결과도 없어요.”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표정에서 언뜻 불안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평소에 나를 바라보던 라엔의 경계 어린 표정도, 실은 짙은 의심이 아니라 불안함이었을지 모르겠다. 단단히 힘을 주어 잡은 손에서 걱정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이한은 그 원인이 되는 ‘뭔가’를 분명히 선행했을 거예요. 어떤 형태로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끔히 치료하는 대신 그 ‘뭔가’를 위해 지불한 대가가 있겠죠. 많이 고민해 봤는데, 정말이에요.”
솔직하게 말해 줘요, 하고 덧붙이는 라엔에게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형.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쓰는 건 치료 마법이 아니라 시스템의 힘이기에 대가가 필요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어서 대가를 피해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깜빡.
빛나는 막대 모양의 게이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남겨 두고 진한 붉은색이 채워져 있었다.
그 모습이 갑자기 거슬려 보였다. 어쩌면 라엔이 말한 대가라는 게 차곡차곡 쌓이는 중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중 일은 나중 일이었다. 미리 걱정하면서 움츠러들 필요는 없었다. 그건 오만한 게 아니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이 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니까.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라엔을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유리잔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손을 뻗어서 라엔의 손등을 덮었다. 힘을 주어 잡으니 반대로 내 손을 감싸고 있던 라엔에게서는 차츰 힘이 풀렸다.
“이한. 나중에라도 대가가 뭔지 알게 되면, 꼭 말해 줘요.”
라엔의 목소리가 어딘가 간절한 것처럼 들렸다.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차가워 보였다.
◇
그동안 몇 날이 더 흘렀다.
다들 바쁘게 바깥으로 다녀오고 있었다. 물론 나도 바쁘게 모두를 찾아다니며 틈틈이 치료했다. 어지간한 부상이 아니면 먼저 말해 주지를 않으니까.
치료하기 막대 게이지에는 아직 약간의 틈이 남아 있었다. 미세하게 남은 공간을 흘겨보며 2층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문을 여니 노을로 붉게 물든 방 안이 눈에 담겼다. 또 이 시간이었다. 미래시 사용 쿨타임이 24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스킬! 업그레이드> 진행 중!
‘미래시’ 초급 >> ‘미래시’ 중급
진행 상황 (9/10)」
이제 이번 한 번만 더 스킬을 사용하면 이런 지긋지긋한 일과도 작별이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살갗에 하나둘 늘어나는 베인 자국이 달갑지는 않았다.
마침 지금은 다들 밖에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까 점심때 이후로 마주친 적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기쁜 마음에 설핏 미소가 지어졌다. 감겨 있던 붕대를 풀어내고 칼을 들었다. 칼날을 팔뚝에 대는 순간,
“이한?”
라엔이 문가에 서 있었다.
어, 라엔은 밖에 안 나갔었나? 그보다 내가 방문을 안 닫고 들어왔나? 명백히 내 부주의였다. 라엔이 떨리는 발걸음을 이쪽으로 천천히 옮겼다.
“왜…. 아니, 이한. 잠깐, 잠시만 기다려요.”
동요하듯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도 라엔을 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가만히 행동을 멈췄다.
후두둑.
이미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행동을 멈추기는 했다.
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별로 보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라엔이 안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려 웃었다.
바닥을 물들이는 핏방울 위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었다.
“…이한.”
라엔이 울먹이듯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