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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28화 (28/150)

028화.

밤이 내린 숲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잠깐 굳은 것 같았다. 모두가 침묵하는 틈을 타서 내가 같이 가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중간에 잠깐, 하면서 내 말을 멈추려고 한 것 같았으나 꿋꿋하게 목소리를 냈다.

원래 이런 건 강하게 주장해야 했다. 그리고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모두에게 이득일 터였다.

이런 내 생각이 먹혔는지, 결국에는 나도 함께 가기로 결론이 났다.

어쩐지 착잡하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민주혁에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앞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아. 우선, 방해돼서 남으라고 한 게 아니야.”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덧붙이며 박율이 나와 눈을 맞춰 왔다.

“가도 바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힘들면 언제든 말해 줘.”

고개를 끄덕이는 내 옆으로 라엔이 다가왔다. 라엔이 내 어깨를 사뿐히 감쌌다. 라엔의 로브가 내 등을 부드럽게 덮었다.

“이한, 지금 이동할 거예요. 많이 어두울 텐데, 겁먹지 마요.”

순간 센 바람이 불어왔다. 장소가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청량하지만 약간은 눅눅한 숲 냄새와 작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 새까만 암흑을 배경으로 파란 상태 창이 눈앞에 떠 있었다.

「‘밤이 내린 숲’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밤이 내린 숲? 그래서 이렇게 깜깜한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상태 창이 일그러지듯 깜빡였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던 상태 창에 순간 검은 글씨가 반짝 지나갔다.

「기억해 줘.」

짧은 문장을 끝으로 상태 창이 훅 꺼졌다. 푸른빛이 불시에 사라졌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던 밝은 빛이 한순간에 사라져서일까, 깊은 어둠에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내 등 뒤를 단단히 받쳐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한.”

라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여기 혼자 남겨진 게 아니었지. 갑자기 막혔던 숨이 다시 쉬어지는 듯했다.

앞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화악 퍼져 왔다. 송하견이 하얗고 반듯한 상자를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송하견의 눈동자에 걱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선이한, 그냥 돌아갈까?”

민주혁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이제 괜찮았다. 더 이상 어둡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 이 장소에 홀로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하고 가만히 대답하는 내 앞으로 박율이 한 손을 뻗어 왔다.

“그러면 같이 갈까, 이한아.”

나뭇잎조차 새까맣게 물든 어둠 속에서 홀로 녹음을 담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박율의 손을 잡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박율이 내 손을 힘주어 잡는 게 느껴졌다.

“가요.”

먹먹했던 귀가 풀린 것처럼 다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겁먹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발아래로 바스락, 하고 풀이 자란 땅이 밟혔다.

조금 걸어가자 평평한 땅이 보였다.

박율은 한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마법을 써서 그 앞에 적당한 크기의 텐트를 순식간에 만들어 냈다. 익숙해 보였다.

라엔과 함께 주위를 빙 돌며 넓게 마법을 펼치던 민주혁이 내게 뛰듯이 다가왔다.

“앉아 있어.”

민주혁이 마법으로 어디선가 커다란 통나무를 끌어와 순식간에 잘 다듬었다. 역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매번 이렇게 해 왔던 걸까. 멍하니 생각하는 내 앞으로 민주혁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우수수 쏟아 내렸다.

“야, 선이한. 잘 봐 봐.”

민주혁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동시에 불길이 화르르 솟았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가 타올랐다. 불길 위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옅게 나무 타는 냄새가 퍼졌다.

신기했다.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신기하긴 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길을 눈앞에서 보니 더 놀라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주혁을 바라보자 민주혁이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내 옆에 털썩 앉은 민주혁의 얼굴에 모닥불의 붉은 빛이 얼비쳤다.

“어때?”

내 반응을 보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민주혁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원래 표현을 그렇게 큼직하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핏 스쳐 지나간 민주혁의 표정이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인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마법으로 빛을 만들 수 있는데 왜 굳이 불을 피우지?

내가 물어보자마자 민주혁이 키득 웃더니 바로 대답했다.

“낭만이지!”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민주혁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민주혁이 여전히 생글 웃는 얼굴로 내게 눈을 맞춰 왔다.

정말 그것 때문에? 아니, 물론 숲속에서 모닥불 피우는 게 낭만이 있긴 한데…. 그때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런 이유도 있고, 이렇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기도 하니까요.”

라엔의 목소리였다. 내 옆에 사뿐히 앉은 라엔이 말을 이었다.

“마법을 유지하는 작은 마나라도 아껴 두는 편이 나아서요. 만약을 대비해서요.”

아, 그렇구나. 이제야 완벽히 이해됐다. 민주혁은 처음부터 이렇게 설명해 주면 될 것을 왜 굳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 형님, 효율보다는 운치 있다는 게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진심이었구나.

민주혁의 말처럼 운치 있는 것도 맞았다. 서서히 수긍할 무렵 옆에서 라엔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주혁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죠. 나도 좋아해요.”

민주혁이 만족한 듯 끄덕였다. 라엔이 차분하게 다음 말을 뱉었다.

“그래도 뭐가 더 중요한 건지는 변하지 않아요.”

“…!”

민주혁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라엔을 바라봤다. 충격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표정이 참 풍부했다.

민주혁이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라엔 형님, 이건 박율 형님 의견도 들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더 형은 둘 다 똑같이 중요한 이유라고 할 텐데요.”

“그러면 송하견 형님한테도….”

“이유 같은 건 별로 상관없지 않느냐고 할걸요.”

라엔의 말이 그럴듯했다. 박율과 송하견이 내어놓을 만한 대답이었다.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민주혁이 내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선이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 나한테도 물어볼 줄 몰랐는데.

민주혁이 내게 믿는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 눈빛을 가만히 마주하니 괜히 민주혁이 바라는 정반대의 답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해 버릴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라엔을 바라봤다. 라엔이 나를 바라보며 옅게 웃고 있었다. …아하.

민주혁, 정신 차려. 지금 여기서 너만 진지해….

자그마한 안타까움을 담아 민주혁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가장 무난한 대답을 꺼냈다.

“각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다르니까 둘 다 맞는 얘기지.”

“그렇지. 그래서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뭔데?”

민주혁이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럴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물러설 수 없는 일이 몇 가지쯤은 있는 법이니까. 물론 민주혁의 물러설 수 없는 일이 이런 것일 줄은 몰랐지만.

결국 그럭저럭 말을 뱉었다.

“글쎄. 낭만도 좋고, 효율적인 것도 좋지. 어쨌든 뭐라도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 가장 중요한 건 그거 아닐까.”

민주혁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게 끝인데?

“왜 그렇게 생각해요?”

라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라엔은 여전히 입가에 연한 웃음을 띤 채였다. 그러나 불길이 어른거리는 금색 눈동자가 어쩐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 보였다. 생각해 둔 건 없었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이유가 된다면, 그건 더 이상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시선을 돌려 눈앞의 모닥불을 바라봤다. 작은 불씨가 어둠 속으로 조그맣게 튀었다.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왔다. 불길이 이곳에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꽤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라엔을 처음 만났던 날에 한마디 말도 제대로 못 뱉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사람이 이렇게 성장하는구나 싶었다. 뿌듯했다.

“야, 선이한.”

민주혁이 한 손으로 내 머리칼을 헝클였다. 더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민주혁의 얼굴이 묘했다.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라엔이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놓았다.

“이한. 세상의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누군가의 이유 말고, 존재하는 그 자체만이 가지는 중요한 이유가요.”

“…네?”

라엔의 말이 갑작스러웠다. 옆에서 민주혁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의미 없이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야.”

“맞아요. 그러니까 이한도 이한만의 이유를 찾아냈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을 바라본 민주혁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내 볼을 잡아서 늘리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래. 어렵게 생각하지 마. 뭐, 이왕이면 그 이유가 낭만이면 더 좋고.”

“…아.”

“라엔 형님, 들으셨습니까?”

들을 게 뭐가 있었다고? 빨리 손이나 떼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곡해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시스템도 처음에 내 대답을 멋대로…. 아니, 이건 생각하지 말자.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민주혁의 손을 떼어 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 대답도 안 했어.”

“들었나요, 주혁?”

“…예.”

민주혁이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이번만 봐주는 거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싫다고 한 적도 딱히 없어. 생각은 해 볼게.”

일렁이는 모닥불을 바라봤다. 마음이 다시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 뜨거운 열기가 녹아들어 있었다. 몸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흰 연기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흩어지듯이 서서히 올라가는 연기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하늘이 눈에 담겼다.

밤이 내린 숲. 딱 맞는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어두울 무렵의 밤이 내린 듯이 새까만 허공이 펼쳐져 있었다.

짓눌러 오는 것처럼 깜깜한 하늘로 한 손을 높이 뻗어 보았다. 당연하게도 손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깊은 암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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