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40화 (140/150)

140화.

흔적

민주혁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그 자리에서 굳은 채로 멍하니 바라봤다. 한밤중에 내가 찾아온 게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놀라는 건 과하지 않은가 싶을 정도였다. 내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나.

“엣취.”

“야, 일단 들어와.”

공기가 쌀쌀해서인지 재채기가 나와서 입가를 가리자 민주혁이 그제야 정신을 조금 차리고는 나를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내가 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형님들은 다 어쩌고 네가 혼자 여기 있어. 그리고 너 왜 아직도 안 자? 어디 안 좋아? 할 말이라도 있어?”

“…형들은 내가 잔다고 해서 다 돌려보냈고, 나는 괜찮아. 그냥 너 보러 온 거야.”

괜한 걱정을 하느라 그런 거였나. 안절부절못하는 민주혁을 슬슬 밀어서 침대에 앉혔다. 그는 내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자기 앞에 서 있는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의 눈동자에 어려 있는 건… 공포와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었다.

‘대체 왜?’

처음에는 내 몸 상태가 걱정돼서 그러나 싶었지만, 그런 거라면 그가 이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공포심이라면 이해가 됐다. 내가 바다에서 의식 없이 축 늘어진 채 박율에게 업혀 나온 게 충격적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팔찌를 이용해 내 위치를 찾아내 준 민주혁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항상 활기차 보이던 표정이 어둡게 그늘져 있어서 마음이 쓰렸다. 뭐 때문인지 나한테만이라도 살짝 알려 줄 순 없는 걸까. 해결은 못 해 주더라도 위로는 해 주고 싶은데.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양손으로 민주혁의 뺨을 천천히 감쌌다.

“무슨 일 있어?”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고개를 갸웃하며 허리를 숙여 그의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살폈다. 치료라도 하면 조금 나을까 싶었는데 어쩐지 안색이 더 나빠진 것 같기도 했다.

“응? 민주혁?”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답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민주혁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가 이러는 게 흔치 않은 일이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다가 문득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시스템이 오류라도 나서 치료가 안 됐나?

“몸이 안 좋아? 누울래?”

“…….”

안 되겠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내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치료할 수 없는 거라면 송하견을 불러서 약이라도 먹여야 했다. 급하게 몸을 돌리다가 내 손목을 감싸는 차갑게 식은 손에 멈칫했다.

내가 돌아보자 민주혁은 그제야 제 행동을 자각한 듯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아….”

“가지 말까?”

“…어디 가는데?”

“하견 형한테. 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말하려고.”

“내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민주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힘들면 말하라고 했잖아.”

“나?”

“그래, 너. 나랑 약속했잖아. 죽지 않겠다고. 너는 왜 항상 그렇게 혼자서….”

떨리는 손으로 내 소매 끝을 잡고 있던 민주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내 얘기는 왜 하는 건지, 대체 이게 어떤 맥락에서 나온 얘기인지 사고가 따라가지 않아서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까 내가 네 위치를 찾아냈었어. 내가 데려갔던 그 절벽 바로 앞에 있는 바닷속이더라.”

“응, 그랬지.”

“근데 너를 구하러 들어갈 수가 없었어. 내가 너무 늦었을까 봐 무서워서 몸이 안 움직였어. 네 위치가 바닷속으로 잡혀서, 그래서 나는….”

민주혁은 나를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세게 끌어당겨 안았다. 자세 때문에 어정쩡하게 안겨 있다가 나도 그의 몸을 껴안아 너른 등을 찬찬히 다독였다. 아무래도 민주혁은 내 생각보다 더 놀랐던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드문드문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상황이 이해됐다.

‘내가 스스로 뛰어내린 줄 알았구나.’

박율이 나를 바다에서 끌고 나온 후에는 곧바로 응급 처치를 하느라 상황 설명을 할 새가 없었고, 민주혁은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하자마자 곧장 여관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니 오해를 풀 기회가 없었던 게 당연했다. 박율이 바다 아래에서 신력이 느껴졌다고 얘기했던 것도, 내가 내 의지로 뛰어내린 게 아니라고 확실히 말했던 것도 못 들었을 테니까.

해명하기 위해 곧바로 민주혁의 등을 톡톡 친 후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음, 민주혁.”

“나 때문인 것 같았어. 네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걸 내가 몰라서, 그 절벽을 네게 알려 줘서 네가….”

“죽으려고 뛰어내린 거 아니야.”

“…어?”

그의 옆에 앉아서 상황을 다 말하고 나자,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듣던 민주혁이 고개를 돌려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오해하고 있던 게 민망해서 그러는 건가. 그가 내게 어떻게 장난을 치곤 했는지 생각하다가 그의 한쪽 뺨을 살짝 잡아서 주욱 늘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팠어?”

“아니.”

하긴 그럴 리가 없긴 했다. 민주혁은 내게 몸을 기대며 나를 끌어안았다. 목에 민주혁의 숨결이 닿아서 간질간질했다.

“다행이다. 네가 스스로 뛰어내린 게 아니어서. 계속 살아가고 싶어 해서.”

“살고 싶지 않았던 적 없어.”

“응. 앞으로도 그러겠지.”

“그럴 거야.”

바다처럼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가 내게 파고들 듯이 기대 오는 탓에 그의 머리칼이 내 뺨을 간질였다.

그 모습이 잠깐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묘하게 어리광 피우는 듯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키 때문인지 평소에는 동갑인데도 민주혁이 더 성숙한 느낌이었는데. 그가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로 말을 이었다.

“따뜻하다. 네가 바다에서 나와서 정신을 차리기 전에 살짝 닿았을 때는 몸이 차가웠단 말이야.”

“이제 괜찮아.”

“네가 전에 나 대신에 칼에 찔렸을 때가 떠올랐어. 피로 물들어 축축했던 옷과 차갑게 식어 가던 몸. 눈을 뜨지 않고 있는 네 모습까지 전부.”

지금 민주혁이 이마를 기대 오는 목 언저리가 흉이 진 자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번에는 반대로 네가 나를 구한 거잖아.”

“…응.”

“너는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후회했지만 사실 네 덕분이었던 거지. 나한테 팔찌를 준 것도, 위치를 빠르게 파악해서 박율 형이 나를 구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전부. 네 선택과 행동 덕분에 내가 산 거야. 고마워. 아, 그리고 절벽을 소개해 줬던 것도.”

“마지막 거는 왜?”

“한번 가 봤던 길이어서 강제로 걸으면서도 좀 안심했거든. 모르는 길보다는 아는 길이 낫잖아.”

그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큭큭 웃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 번이라도 구하러 갈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직접 뛰어들 거야. 너는 살고 싶다는 생각만 버리지 마.”

그가 얼굴을 파묻고 있던 목 언저리에서 말캉하고 따뜻한 게 닿는 느낌이 났다. 더운 숨이 스치는 감각이 생생해서 허리를 바짝 세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스템의 알림음이 들려 눈을 크게 떴다.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 성공!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민주혁을 나도 마주 안았다.

“고마워.”

“당연한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데. 뭐, 정 고마우면 내 마음이나 알아주든지.”

“뭔데?”

“됐다. 네가 짐작도 못 하는 것 같아서 지금은 말 안 할래. 나중에.”

“그런 게 어딨어. 힌트라도… 아야.”

민주혁이 이를 세워서 아까 입술을 댔던 목 부근을 물었다. 아픔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묘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제야 몸을 떨어뜨리고는 내 뺨을 잡아당겼다.

“볼이 빨개졌네.”

“네가 꼬집으니까 그렇지.”

혼자 두고 싶지 않다며 기어코 나를 제 옆에서 재우려는 민주혁에 못 이기는 척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해도 아까 민주혁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난 후였으니 나도 그가 잠드는 것까지 보고 나서 나가고 싶었다.

“선이한, 안 졸려?”

“졸려. 너도 얼른 자. 안 피곤해?”

기껏 나까지 옆에 눕혀 놓고서는 내가 옆에 있는데 자기가 잠이 올 리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민주혁에 기가 찼다. 그렇지만 피곤하긴 했는지 내 몸이 따끈해서 잠이 솔솔 온다는 소리를 잠꼬대처럼 하고선 결국 잠들었다.

따끈하기야 하겠지. 나를 끌어안고서 놓아주지 않은 채였으니까. 침구를 매번 갈고 있으니 베개와 이불에 그의 체취가 배어 있을 리 없을 텐데도 청량한 향이 몸을 감싸듯이 주변에 은은하게 났다.

‘정신 차리자. 나까지 여기서 잠들면 안 되지.’

몽롱해지는 의식을 애써 깨웠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박율의 방에도 가서 그를 치료해야 했다. 민주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품에서 조심조심 빠져나왔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자마자 한기가 느껴졌다. 몸이 좀 처지는 것 같기도 했다. 민주혁이 내가 따끈하다고 하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걸 보면 지금은 열이 없는 듯했지만 잠시 후에도 괜찮을 거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자다가 열이 오를 수도 있는 거고.

‘불길한 예상은 잘 맞는 편이니까.’

며칠간 고생했을 박율에게 괜히 내 몸 상태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발걸음을 틀어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졸려서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아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푹 덮었다.

끼익, 달칵.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선 잠에서 얼핏 깼다. 아직 주변이 어두운 걸 보니 해도 뜨지 않은 듯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누가 들어온 건지 생각해 봤지만 다들 각자 방에서 자고 있을 테니 짚이는 바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내가 방문을 안 잠가 뒀었나?’

몸을 일으켜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몸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이마 위로 누군가의 손이 가볍게 얹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한아. 잠깐 일어나 볼래?”

“…율이 형?”

“응. 깨워서 미안해. 일어나서 앉을 수 있겠어?”

박율이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한순간에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일어날 수 있다고 대답은 했지만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박율이 나를 천천히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게 했다.

“열이 좀 있어서 힘들 거야. 몸살인 것 같은데 머리는 안 아파? 차가운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으니까 걱정돼서 와 봤….”

순간 말을 멈춘 박율이 손끝으로 내 목 부근을 살짝 눌렀다. 힘을 별로 들이지 않은 것 같았음에도 열이 나서 그런지 감각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이건 뭐지? …누가, 언제 이랬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