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39화 (39/200)

#38.

확증편향確證偏向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경구로 요약되는 인간의 심리적 기재 중 하나다. 확증편향이 심한 사람은, 아무리 옳은 증거를 들이대도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고집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구평면설을 믿는 사람들을 들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은 수많은 위성사진과 아폴론 우주 계획 등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리 증거를 들이대도 믿지 않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확증편향의 이유 중 하나는 인간 뇌의 구조적 문제라고 한다.

“…다른 걸 받아들이는 건 수고스러운 일이거든요. 칼로리가 든다는 거죠.”

한다은은 책상 위에 놓인 사탕을 하나 까서 자신의 옛 선배에게 내밀었다.

“구연산과 당분. 훌륭한 뇌의 연료죠. 하나 드실래요?”

“비꼬는 게 많이 늘었네.”

“…비꼬는 게 아니라 그냥 먹으라는 건데.”

한다은은 기껏 까 놓은 체리맛 사탕을 그대로 자기 입에 쏙 넣었다. 천병옥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르소설 과목을 만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나요? 제 올해 목표 중 하난데.”

“제정신이 아니야.”

“…왜 그렇게 장르소설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네. 선배님께선 쉬쉬하는 것 같다만, 선배 딸도 장르소설 쓴다면서요? 그것도 꽤 유명한.”

“…괜한 이야기는 하지 말지.”

“괜한 이야기는 선배가 먼저 했죠.”

한다은이 보란 듯이 사탕을 와작, 하고 씹었다.

“어린 학생한테 문단까지 들먹이며 협박을 하다니. 좀 그렇지 않아요?”

“협박이 아니라 충고다.”

“내가 보기에는 협박이었어요. 뭐, 선배랑 제 생각이 서로 다른 거야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으니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한다은이 테이블을 살짝 두드린 순간, 천병옥은 순식간에 방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제 학교에 있는 제 학생들은 건들지 말았어야죠.”

“한다은!”

참다못한 천병옥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한테 이러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나?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이 아직 많아.”

“누구요? 민 교수님?”

한다은이 하, 하고 웃었다.

“선배님 뭐, 자기가 아직도 10년 전 문단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말 나온 김에 민 교수 이야기 좀 해 볼까요?”

한다은은 그대로 커피를 머금으며, 남은 사탕 쪼가리를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10년 전, 펜 꺾은 선배한테 민 교수님이 연락한 거, 그거 정말로 민 교수가 갑자기 선배가 생각나서 그런 거였을까요?”

* * *

“걱정하지 마라. 천병옥 선생님이 널 해코지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한다은의 말에, 형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이다.’

대한민국에서 넓은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문학판은 그중에서도 좁은 걸로 유명하다. 아예 생판 모르는 사람도 세 다리만 건너면 대충 면식을 익힐 수 있을 정도랄까.

그런 좁은 판에서, 천병옥 정도 되는 거물에게 찍히는 건 무조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한테도 안 찍히는 게 제일 좋았다.

“…오늘 일이 좀 많았구나. 발표만 하고 곱게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결과 발표가 언제였지?”

“일주일 뒤요.”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는 1주일에 걸쳐 진행된다. 학교 내부의 과만 해도 80개가 넘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 있니?”

“솔직히 크게는 없어요.”

“난 좋았다.”

한다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설과 연설문, 겉으로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지.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네 글은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다은 교수님에게 글을 보여준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극찬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고맙습니다.”

“됐다. 긴장했을 텐데, 가기 전에 밥이라도 먹고 가렴.”

“알겠습니다.”

“…어디서 짜장면 같은 거 대충 먹지 말고, 좋은 거 먹어. 고생했잖니. 생각 같아서는 나도 같이 가고 싶다만, 나는 일이 좀 있어서.”

천병옥과 관련해서, 한다은은 오늘 할 일이 좀 많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한다은은 지갑을 뒤져 지폐 몇 개를 꺼내 형우한테 내밀었다.

“내가 밥 사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걸로 뭐라도 먹거라.”

“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빨리 받아. 나 늙어서 팔 아프다. 내 팔 떨어지는 꼴 보고 싶니?”

“헉.”

형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교수님이 내민 현금 뭉치를 받았다.”

“다 쓰거라.”

“예?”

“한 끼 식사로 다 쓰라고.”

“이 많은 걸요…?”

“좋은 걸 먹어. 아주 럭셔리하게.”

한다은은 자신의 제자를 잘 알았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분명 손을 벌벌 떨면서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이나 사 먹고 말 놈이었다.

“혼자 어떻게… 이렇게 비싼 밥을 먹어요?”

“누가 혼자 먹으래? 연수도 같이 먹어.”

“연수요? 걔 밥 먹었다던데….”

“…같이 먹으라고.”

한다은이 윽박지르듯 대답했다. 형우가 우물쭈물 물었다.

“…세 끼에 걸쳐 쓰면 안 될까요?”

“자꾸 그럴 거니?”

다른 애들은 밥값 내 준다고 하면 신나서 방방 뛰던데, 이 녀석은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지.

“…한 끼에 먹어. 영수증 보내라. 돈 비면 그만큼 학점에서 깐다.”

“허억.”

연수야! 외치며 형우가 재빨리 후다닥, 달려 나갔다.

‘나도 잠시 쉴까.’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낸 한다은은 형우의 <전설의 보안관>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바쁜 탓에 이번 화를 읽지 못한 것이다.

“역시 재밌어. 갈등 만드는 솜씨도 점점 늘어나고… 라임도 잘 썼군.”

하지만 좋은 점만 나오지는 않았다.

“…여성 캐릭터 묘사는 여전히 어색하군.”

나쁘지는 않다지만, 딱 나쁘지 않은 수준이랄까. 음식으로 치자면 동네 맛집이 아니라,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프렌차이즈 음식 수준이었다.

“너무 아는 맛만 나와. 가끔은 모르는 맛이 나와줘야 하는데….”

베아트리체는 그나마 좀 괜찮은 편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캐릭터인 ‘캐서린 존스’라는 캐릭터는 뭔가 어색한 느낌이 솔솔 났다.

“…여자 마음을 모르는 거지.”

창밖으로, 연수와 함께 걸어 나가는 형우의 모습이 보였다.

“선배, 같이 가요!”

연수가 은근슬쩍 형우에게 붙으려고 했고,

“붙지 마. 나 땀 많이 났어. 너도 냄새 밸라.”

형우는 그런 연수를 슬쩍 밀어냈다. 한다은은 조금 질렸다는 느낌으로 그런 둘을 바라봤다.

‘…분명히 연수는 형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저 자식은 글 말고는 관심이 없으니.’

처음에는 귀엽게 봤었는데, 그게 벌써 이 년이다. 가끔 보면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연수도 문제야. 한쪽이 둔탱이면 좀 밀어붙일 줄도 알아야 하는데, 저렇게도 확신이 없으니. 어머.’

정말로 나이가 들어버린 건지. 어느새 중매쟁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쟤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형우와 연수의 모습이 멀리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한다은은 약간 서글프면서도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시대는 끝났어요, 선배. 이제 쟤네들이 새로운 문단을 이끌겠지요.’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교수실에서 한다은은 홀로 남아 남은 커피를 마셨다.

“…후우.”

커피를 마셨는데도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와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속에는 30년 전의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병옥 선배, 오늘 수업 어땠어요?’

‘도중에 나왔어. 꼰대 수업은 도저히 못 들어 주겠더라. 너는?’

‘저도 같은 이유로 나왔죠! 그나저나 걔네들은요?’

‘어디서 몰래 손이라도 잡고 있겠지. 아니면 참새 밥이나 주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

‘…찾아서 놀려 줄까요?’

한다은과 천병옥. 그리고 다른 두 명. 한국 대학교의 문제아라고 불리며 나돌아다녔던 멍청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괜히 주책은.”

한다은은 손을 들어 눈물을 대충 닦았다. 연민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대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민성훈 교수님. 한다은입니다. 예. 아, 다름이 아니라, 시립대에서는 이번 학기 교수진 편성이 완료되셨나 해서요….”

에어컨이 너무 차가운가. 한다은은 팔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 * *

교수님이 주신 돈은 신사임당 셋, 그러니까 15만 원이었다.

“1인당 7만 5천 원으로 밥을 먹으라니… 그게 가능해?”

학교 다니는 내내 편의점 도시락과 몽구스 밥버거를 애용하고, 짜장면은 기분 좋은 날에 먹는 특식 정도로 취급했던 형우는 이 거금으로 대체 뭘 먹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삼겹살에 소주는 어때?”

“선배. 삼겹살이랑 소주로 15만 원 채우려면 저희 푸드 파이팅 해야 돼요. 다섯 명이 가도 배불리 먹고 나올 걸요.”

“아이디어 없어?”

“흠, 꼬치구이에 소주 한잔 어때요?”

“꼬치구이는 옷 버릴 것 같은데….”

형우가 지금 입은 양복은 아버지의 유품이다. 괜히 얼룩 같은 걸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깔끔한 거라… 그럼 초밥은 어때요?”

“초밥?”

“네. 마침 아는 데가 있거든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곳인데, 어때요?”

“뭐, 상관없어.”

“그럼 결정!”

호쾌하게 외친 연수가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 어귀로 형우를 잡아끌었다. 잠시 후, 둘이 도착한 곳은 <울트라 초밥>이라는, 조금 민망한 이름을 가진 가게였다.

“…요즘 SNS에선 이런 감성이 대세라서.”

“요즘 애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종업원이 큰 소리로 형우를 반겨 줬다.

“이랏샤이마셰!”

“하, 하잇.”

형우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종업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니혼진데스까?”

“이에, 칸코쿠진데스.”

“…근데 왜 일본말로 대답하세요?”

“아, 그게 어쩌다 보니….”

“푸흡.”

형우와 종업원의 요상한 행동을 보고 있던 연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대애박.”

“…조용히 해.”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어요?”

“교양 일본어 회화 시간에… 야, 너 계속 놀릴 거야?”

“하잇!”

연수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둘은 주문을 했다.

“어… 모듬초밥 하나씩 주시고요. 술 마실 거지? 맥주? 사케?”

“사케 한번 먹어보고 싶었어요. 사케로 하죠. 여기 있는 어… 간바루 오카상인가, 이거 시켜요. 이름이 마음에 드네.”

“그걸로 하나 주세요.”

음식은 금방 나왔다.

“이게 1인당 5만 원짜리 초밥이라는 거지?”

“엄청 맛있게 생겼어요. 선배 생각은 어때요?”

“…맛있어 보여.”

사실은 마트에서 파는 세일 타임 7천 5백 원짜리 초밥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 많은 음식점에서 그렇게 말할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하기야, 쌀에 생선을 올리기만 하는 간단한 음식인데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어. 일단 돈이 아까우니 먹기야 먹는다만….’

형우는 초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와.”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마치 쌀이 아니라 눈으로 빚은 듯, 초밥은 입에 닿자마자 첫눈처럼 사라져 버렸다. 형우의 표정을 본 연수가 쿡, 하고 웃었다.

“어때요, 맛있죠?”

“이게… 초밥?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건 대체…?”

“많이 먹어요, 선배. 오늘 고생했잖아요.”

그렇게 말한 연수가, 자기 앞에 놓인 초밥 몇 개를 덜어 형우의 접시로 옮겨 줬다.

“…너는 안 먹어?”

“저는 아까 좀 먹어서, 그렇게 배고프지는 않아요. 저는 밥보다는 요게 조금 더 땡기네.”

연수가 들어 올린 건, 우유팩처럼 생긴 곽 안에 담긴 사케였다. 형우가 그 모습을 요리조리 살폈다.

“팩에 담아 주는구나, 신기하네.”

“가끔 일식집에서 이름은 몇 번 들어 봤는데 시켜 본 건 저도 처음이에요.”

“뭔가, 중국집 메뉴판에 있는 난자완스나 지삼선 같은 느낌이잖아.”

“맞아요, 딱 그거네. 뭔가 엄청 있긴 한데, 결국 일식집에선 맥주 시키고 중국집에선 탕수육 시키잖아.”

그렇게 낄낄거리며, 둘은 잔을 채웠다. 짠! 둘의 잔이 호쾌하게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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