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16화 (116/200)

#115

형우는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니라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기회라는 건 참 야속한 구석이 있어서, 썸타는 연인처럼 잡기 편한 곳에 ‘나 잡아봐라!’식으로 있지도 않는다. 녀석은 대부분 저울의 한쪽 끝에 있다.

정수의 경우, 반대쪽에 있는 건 자존심이었다.

가끔은 기회를 버리고서라도 잡아야 하는 자존심이라는 게 있긴 하다. 신념이나, 긍지라고 부르는 것.

하지만 방금 정수가 붙잡은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객기일 뿐이다.

“잘은 모르긴 하는데, 아마 본인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를걸요.”

“흐음, 사춘기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게 원인이 될 수는 있어도, 이유가 되기엔 좀 부족하죠.”

형우가 지원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일이 잘 안 됐네요.”

“어쩔 수 없죠, 뭐.”

지원은 아쉽기는 했지만, 그 일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비즈니스적인 안목이다. 회사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타타룬’보다는 ‘참새치’가 훨씬 중요했으니.

“그래도 무슨 일이 있는지 정도는 말해 주실 거죠?”

그리고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형우라는 사람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가님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오진 않았을 것 같거든요.”

“음, 일단 제가 말을 좀 세게 하기는 했어요.”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정확한 타이밍을 재자면, 정수가 ‘글은 잘 썼는데 독자가 안 붙는다.’라는 말을 했을 때가 시작이었다.

“제가 듣기에는 독자를 조금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더라고요.”

“아, 그러면 안 되죠.”

독자를 욕하는 작가, 얼핏 들으면 줏대 있고, 예술혼 넘치는 꼬장꼬장한 장인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말을 한 주체가 정수가 아니라 진짜 뭔가를 일궈낸 장인이었다면 형우도 그토록 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걔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장인은커녕 잘나가는 작가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작가조차 아니다.

그저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일 뿐인데,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건방진 데가 있었다.

“포부가 큰 거랑 건방진 건 비슷해 보여도 아주 다르거든요.”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될 거다, 하면 그건 포부가 큰 거고. 위대하지 않은데 이미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굴면 건방진 거다.

“일단은 지켜볼게요. 계약기간도 남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지원이 씩 웃었다.

“저도 엄청 건방졌다가 정신 차리고 잘된 작가를 한 명 알고 있거든요.”

“으음, 왠지 제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정말요? 이런 우연이!”

“혹시 그 사람이 한창 건방졌을 때 쓴 작품 제목이 <서울낭인괴담> 아닌가요?”

적당한 농담에,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오늘 오라고 한 이유가 그 이야기뿐이에요?”

“에이, 아니죠.”

지원이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지원은 형우를 늘 최고로 존중했다.

김정수와의 일 정도는 거의 ‘사소한 사건’ 정도에 불과하다고 할까.

“사실은요, 오디오북 일정이 잡혔거든요.”

제나와 조명윤. 사랑꾼처럼 보이는 둘이었지만 일 처리 하나는 기막히게 빨랐다.

하기야, 둘이 결혼한 것도 연애 시작 후 3개월 만이라고 했으니, 빨리빨리 정신이 몸에 밴 사람들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원래는 출시 2주 정도 전부터 광고를 들어가는데, 형우 작가님 작품은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조금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시도하더라고요.”

“으윽….”

오디오북 광고지를 보던 형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지만, 아무리 공격적인 마케팅이라지만….

[한국 문단 100년의 편견을 깨트린 작품, <아이언 타이거>가 오디오북으로 재탄생하다.]

…뭔가, 너무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다른 건 없어요?”

“아, 샘플 보내준 거 좀 있어요. 보실래요?”

지원이 카피라이팅을 내밀었다.

[순문학에서 태어나 장르로 떠나, 다시 순문학을 정복해버린 천재적인 재능의 작가, 참새치!]

태어나고 떠나고 돌아와? 무슨 오이디푸스 왕도 아니고.

[평론가는 참새치를 좋아해. 30년 순문학도도 반해버린 화제의 그 소설!]

앞부분은 촌스러운 옛날 광고 같고, 뒤 문장은 프렌차이즈 국밥집 광고 문구 같다.

[소설의 울타리를 부순 바로 그 소설! 오디오북이 되어 당신의 고막을 부순다!]

고막을 대체 왜 부숴?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형우가 물었다.

“이거 대체 무슨 감성이에요?”

“에이, 모르셨구나. 요즘 인싸들은 다 이런 감성 좋아해요.”

요즘 인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뒤에 세 개를 보고 나니, 차라리 첫 번째 광고문이 좋아 보일 지경이었다.

‘이거 그거 아닌가? 개판 전략?’

자기가 준비한 의견을 보여주기 전에 일부러 하자가 있는 것들을 준비해서 시선을 끄는 말하기 전략이라는데.

그런 것 치고는 순서가 거꾸로 되기는 했다.

“이제 두 번째 2차네요. 축하드려요.”

“아, 그렇죠.”

<전설의 보안관>이 웹툰으로 2차 창작이 된 선례가 있으니, 지금이 두 번째가 맞았다.

“오디오북이라, 상상도 못 했는데….”

소설의 2차 창작으로는 기본적으로 웹툰이고, 그보다 더 스케일이 커지면 영화나 드라마 정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오디오북이라니, 시장이 점점 많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치이익, 뒤에서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가 났다.

“아, 다 됐다. 잠시만요.”

지원이 완성된 원두커피를 들고 왔다.

“비싼 거예요. 드셔 보세요.”

“혹시 루왁은 아니죠?”

왠지 불안한 느낌에 물은 거였는데 지원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루왁이요? 루왁 좋아하세요? 그거 준비해야 하나?”

형우가 뭐라 말하기도 전혜선이 먼저 끼어들었다.

“사장님, 저희 회사 아직 그런데 쓸 만큼 돈 없어요.”

“혜선 씨. 제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안 돼요.”

혜선이 딱 잘라 말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사장이든 누구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농담한 거였는데.”

지원이 투덜거렸다.

C&N에 있을 때만 해도 스스로가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혜선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바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식의 캐릭터 변화를 바란 적은 없는데.’

오늘따라 커피가 유달리 쓰게 느껴졌다.

* * *

어느새, 1년의 마지막이라는 12월이 찾아왔다.

카페에서 선뜻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기 망설여지는, 그런 추운 날씨.

“으으, 좋다.”

형우는 새로 장만한 전기장판 위에 걸터앉아서 귤을 까먹으면서 글을 썼다.

개인적으로는 <짱구는 못말려> 에 나올 법한 일본식 코타츠를 사고 싶었는데, 인테리어적 면모를 빼면 그다지 쓸모가 없는 애물단지라기에 그만뒀다.

“코타츠가 다 뭐냐. 전기장판에 온돌이면 그만이지.”

“뺘악.”

참치도 동의한다는 듯이 기쁘게 우짖었다.

녀석은 오늘 귤을 두 개나 까먹었다.

사람한테야 귤 두 개가 작지만, 참새에게는 귤 하나가 거의 자기 몸통만 한 법이니. 과식을 해도 단단히 했다는 거다.

“참치야. 너 솔직히 못 날지?”

“뺘악?”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참치가 날개를 활짝 폈다. 그리고, 퍼덕퍼덕.

퍼덕퍼덕퍼덕.

퍼덕퍼덕퍼덕퍼덕.

날갯짓 소리가 계속 난다는 건 그러니까.

“…진짜 못 날아?”

“뺘악? 뺘아악…?”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참치가 자기 날개를 바라봤다. 깃털은 이상이 없다. 윙컷? 그런 건 한 적도 없었다.

그냥, 순전히 살이 쪄서 못 나는 거다.

“시즈모드구나?”

“뺘악!”

“으악! 내 손가락!”

…잊고 있었다.

시즈모드를 하면 공격력이 올라간다는 걸.

“…지금은 12월이니까, 내년 되면 다이어트 하자.”

그렇게 말하며 형우는 그대로 전기장판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노곤노곤하게 몸이 녹아드는 게, 프라이팬 위의 계란 후라이가 된 느낌이랄까.

“너, 글은 안 써도 되냐?”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었다.

오랜만에 본 건 아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전직 형사이자 현직 건물주님이셨다.

“오늘 종일 누워만 있는 것 같은데.”

“아아, 전기장판은 너무 사기라니까요.”

“하기야, 나도 겨울에는 출동 나가기 싫었지. 그냥 전기난로 앞에 앉아 있으면 하루가 다 가.”

“…뭐.”

공감은 되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역시 글을 쓰기는 써야 한다.

작가로서의 의무감 같은, 성스러운 자기 의지 같은 게 아니라 습관화의 힘이다.

천우희로부터 배운 루틴을 실천하기 시작한 지 어언 3개월. 형우의 몸은 이제 루틴에 맞춰 생활하지 않으면 뭔가 찝찝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덕분에 건강은 꽤 좋아졌지만.”

소위 말하는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육각형 몸매는 아니었지만, 철봉을 한 번 잡으면 턱걸이 서른 개는 족히 할 정도 몸은 됐다.

턱걸이 서른 개,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누구나 하는 거 아냐? 싶지만 실제로 해 보면 힘들다.

“나는 오십 개는 했다만.”

물론, 형사 출신인 이 인간에게는 해당 안 되는 말이겠지만.

“오늘따라 말이 좀 많으시네요?”

“나야 너랑 말하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는걸. 자꾸 그러면 집세 올린다?”

“임대차보호법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거 감안해도 네 집세는 상당히 싼 편이란다.”

“헉.”

형우는 결국 주님께 굴복한 롱기누스처럼 건물주님의 앞에 두 손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다. 그리고 너 어차피 그 루틴인가 뭔가 지키느라 2시부터 글 쓰잖아?”

“아, 평소에는 그런데….”

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은 좀 할 게 있어서요.”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늙었긴 했지만 노망난 건 아니니. 한창 일해야 할 놈 붙잡고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

“헤헤, 감사합니다. 건물주님! 살펴 가세요!”

나가는 건물주님에게 인사를 꾸벅 한 다음, 형우는 노트북을 펼쳤다.

시간은 1시 30분.

루틴대로 글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30분 이른 시간이다. 평소보다 빨리 글을 쓰려고 한 건 아니고, 뭘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랬다.

달이 빛나는 서재.

약속대로, 조명윤과 제나는 11월 말부터 새로운 오디오북 어플을 런칭했다.

오늘 하루도 지친 당신에게.

들어가자마자 꽤 감각적인 문구가 형우를 반겼다.

“내 카피라이트는 구리던데, 이건 좋네.”

그 아래 있는 글씨는 더 반가웠다.

12월 첫 주 인기작 1위 : 참새치 - <아이언 타이거>.

형우는 사이트에 아이디를 타닥타닥 쳤다.

조명윤과 제나는 특별히 형우를 위해서 100개월어치가 선결제된 아이디를 선물로 줬다.

이 사업을 100개월 이상 지속하겠다는 포부의 표현이라나.

“한번 들어 볼까.”

형우는 천천히, 귀에 헤드폰을 썼다. 제나한테 선물로 받은 거였는데, 방송국에서도 쓰는 전문 제품이라고 들었다.

“…오.”

과연, 막귀인 형우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가 났다.

고급 음향기기가 주는 특유의 중후한 음색을 느끼며, 형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뭐야?”

바로 다시 떴다.

포탈이 열리는 소리,

몬스터들이 외치는 괴성.

칼과 창이 맞물려 부딪히는 소리.

수많은 소리들이 귀 근처에 휘몰아쳤다.

“퀄리티 뭐야.”

성우진을 초청한다기에, 그냥 좋은 목소리로 낭독을 하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형우의 귀에 들려오는 것들은 ‘낭독’의 범주를 아득히 넘었다.

“이건 낭독이 아니라 연기잖아?”

‘서걱’이라고 서술한 부분에서는 성우의 목소리 대신 진짜로 칼로 무언가를 써는 듯한 효과음이 나왔다.

폭력배를 연기한 성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실감 나서, 소름이 돋을 뻔했다.

“이 정도면 오디오북이 아니라… 거의 드라마 수준인데?”

각색 없이 원본을 그대로 따라가니 오디오 드라마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오디오북이라고 뭉뚱그려 부르기에는 미안할 수준으로 정성이 들어간 수작이었다.

“전문 연기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애초에 방송국에서 오디오북을 런칭한 이유부터가 방송국 소속 무명 배우들과 신입 PD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취지라고 들었다.

과연, 성우의 퀄리티부터 효과음의 배분까지. 걸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끝내주네.”

혹시라도 퀄리티가 별로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뒤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원작자인 형우조차도 흥미롭게 즐길 정도였으니.

위잉-

그렇게 소설을 음미하고 있던 중, 알람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30분이 흘러 소설 쓸 시간이 된 것이다.

남은 권수도 충분히 있었고 더 듣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2시는 집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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