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12월의 중순, 창밖에는 눈이 내렸다.
“바쁘네.”
‘바쁜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신조를 갖고 생활하는 형우였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이번 12월은 좀 이런저런 일정이 많았다.
이번 주만 해도 한국대학교의 기말고사 기간이고, 다음 주에는 네이비 웹소설 연말 시상식이 있었다.
게다가 정수와의 약속도 있으니 한번은 만나야 할 테고,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연참도 한번 때려야 하니,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는 하루였다.
“오늘은 제발 아무 일 없이 글만 썼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 전화가 왔다.
“…중요한 사람 아니면 안 받아야지.”
중요한 사람이었다.
랭크를 매기자면, 거의 어머니와 편집자인 지원과 동급인 사람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스승과 부모와 사장님은 최고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지원은 따지면 사장님에 가깝고, 어머니는 말 그대로 부모님이고, 남은 한 사람.
“한다은 교수님?”
형우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몸이 저절로 곧추섰다.
“어, 그래. 바빴니?”
그 말이 꼭 ‘왜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았니?’ 처럼 들렸다.
“아, 아닙니다. 별로 바쁘진 않았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러면 혹시 지금 시간 되니? 좀 급한 일이라서.”
“지금이요?”
형우는 쓰다 만 소설을 확인했다.
오늘 자를 아직 다 못 썼는데, 아무리 교수님 부탁이라지만 그래도 글이 먼저다 싶었다.
그래서 거절하려는 찰나,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널 꼭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말이다.”
“…절 뵙고 싶어 하는 분이요?”
“주민호 선생님이라고, 교보재 문고에서 일하시는 분이신데….”
“그분이 저를요?”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교보재 문고는 종이책을 전문점으로 취급하는 오프라인 서점이라, 웹소설 작가인 형우와는 인연이란 게 별로 없었다.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저랑 접점이 있을 만한 영역이….”
“있지.”
교수님이 딱 잘라 말했다.
제자에 대한 자부심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축하한다, 형우야. 네 소설이 올해의 소설에서 표를 받았단다.”
* * *
작가 77인이 선정하는 올해의 소설.
올 한 해,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소설을 뽑는 장이다.
“이거 순문학만 받는 거 아니었어요?”
“하하, 아닙니다. 아무래도 심사위원단이 순문학 작가님들이다 보니 그런 경향이 있긴 한데, 꼭 순문학만 주라는 법은 없지요.”
주민호 선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사람은 선생이라는 직함을 달고는 있지만, 작가보다는 사업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총투표 결과, 형우 님의 <아이언 타이거>가 총 3표를 득표했습니다. 순위는 8등이고요.”
“순위를 볼 수 있을까요?”
“아, 물론이지요.”
순위표를 보자마자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쭈르르 보였다.
모조리 순문학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중간문학 작품도 두어 개 섞여 있었다.
웹소설은 형우 한 명밖에 없었다.
“사실 중간문학, 그러니까 장르 느낌이 들어간 소설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본격 웹소설이 순위를 차지한 것은 좀 이례적인 일이기는 하지요.”
“아하.”
형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문학을 배웠던 형우였기에, 교보재문고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소설이 문단 내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았다.
8등이라는 순위가 애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는 순문학에게만 줬던 상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순문학 작가가 네이비 시리즈나 달피아에 순문학을 써서 8등을 한 거나 마찬가지인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조금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차를 한잔 홀짝거린 후, 주민호가 말을 이었다.
“저희 교보재 문고는 매년 주기적으로 ‘올해의 소설’들을 선정하고, 그 코너를 따로 만들어 책을 판매합니다. 일종의 연례행사지요.”
“아, 본 것 같아요.”
교보재 문고에 자주 들렸던 형우도 종종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올해의 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하늘 높이 트리처럼 쌓여 있는 책들이 얼마나 멋있었던지.
“하지만 올해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형우 작가님 때문이지요. 허허.”
작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소설은 총 16권이었다.
1위는 77명 중 29표를 받은 최윤희 작가의 <돌을 사랑하는 여자>였고, 그 뒤로 최고의 감성 작가로 꼽히는 윤도명 작가와 여행작가인 연지우 작가가 뒤를 이었다.
그렇게 7위까지는 각각 수상에다가, 3표를 받은 8위가 형우를 포함한 세 작품, 2표와 1표를 받은 9, 10위 작품이 여섯 편이다.
“이 16권의 책으로 코너를 구성해야 하는데, 실제로 책은 15권뿐이란 말이지요. 제가 형우 작가님을 찾아온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아이언 타이거>를 종이책으로 출판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종이책? 그 말을 들은 형우의 눈이 커졌다.
모든 작가들은 종이책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형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약 출판하시겠다고 약속만 해 주시면, 저희 서점 측에서도 팍팍 밀어 드리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코너를 구성하는데 작품 하나가 쏙 빠져 있으면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주민호는 특히 그런 것에 대한 강박이 좀 심한 편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형우가 물었다.
“<아이언 타이거>는 아직 완결도 안 났는데 종이책이라니….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주민호는 주저하지 않았다.
“제가 설명을 좀 잘못 드렸군요. 당연히 <아이언 타이거> 웹소설을 그대로 써 달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각색을 부탁드린 거지요.”
“각색이요?”
“그렇습니다. 종이책으로 어레인지하는 거지요.”
보통 시중에 판매되는 종이책 한 권을 웹소설 분량으로 치환하면 50화에서 60화 정도가 나온다.
“그러니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아이언 타이거>의 1화부터 60화까지를 종이책 한 권 분량으로 묶어서 기승전결이 있는 작품으로 출판하면 어떻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요컨대, 애니메이션의 극장판 같은 거지요.”
극장판이라고 하니 이해가 확 됐다.
예를 들어 <신세계 에반게리온>의 TV 판은 20분짜리 애니메이션 26화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히 곱하자면, 520분이다.
하지만, <신세계 에반게리온>의 극장판은 저 모든 내용을 100분 남짓한 시간 안에 담아낸다.
‘영화’라는 매채에 맞게 어레인지하는 것이다.
“솔직히 저희 입장에서도 그 많은 시리즈를 서점에 다 진열하기란 무리가 있으니까요.”
“흐음, 만약 하기로 한다면,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적어도 3월까지는 완료해 주셔야겠지요.”
형우는 고민했다.
요즘은 진짜 숨 돌릴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 3월까지 종이책 한 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지금 컨디션대로 조절하면….’
어떻게 가능은 할 것 같았다.
아니, 이 정도면 불가능해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교보재 문고에서 직접 푸시해 주는 종이책이라니,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일단 출판사랑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출판사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닌 이상, 이런 건수를 거절할 리가 없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흔쾌히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민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게 웃는 주민호를 보다 보니, 형우는 문득 궁금증 하나가 생겼다.
“그나저나, 이런 걸 물어보실 거면 출판사 쪽으로 연락하시는 게 빨랐을 텐데, 왜 학교로 연락을 하셨죠?”
“이런 말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주민호가 한다은 교수님을 힐끗 쳐다봤다.
“교수님 말씀을 한번 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김형우라는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그리고 한다은은 형우를 극찬했다. 오랫동안 한다은과 알아 온 주민호는 한다은이 그저 자신의 제자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덮어놓고 칭찬할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형우 작가님을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하지 않습니까? 뭔가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게 그냥 하하 호호 교우관계였으면 모를까, 하나의 사업을 벌이는 입장에서 이 정도로 기분이 꽁해 있을 정도로 형우는 세상 물정을 모르지 않았다.
* * *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의외네요. 포차라니, 뭔가 교수님이면 우아하게 와인 바 같은 데 가실 줄 알았습니다.”
“와인은 떫어서 싫어해요.”
주민호가 하하 웃었다.
한다은은 그런 주민호를 향해 막걸리를 한잔 권했다.
테이블 위에는 동래식으로 살짝 질척하게 구운 파전과 구수한 번데기탕이 자리했다.
학교 근처에 위치한 대폿집이었는데, 한다은이 학창 시절부터 애용하던 공간이었다.
“다은이 또 왔구나.”
나이가 지긋하신 사장님이 아는 체를 했다.
예전에 한다은이 학교를 다닐 때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요즘은 자식에게 가게를 물려준 후, 가끔 얼굴을 비추는 정도였다.
“서비스 좀 안 주시나요?”
“그런 건 없다.”
“피이, 사장님 저 학교 다닐 때는 서비스 팍팍 줬었는데.”
“그때야 네가 돈 없는 학생이니 그랬고, 지금은 나보다 더 잘 버는 교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장님은 푸근한 인상으로 시키지도 않은 쥐포를 하나 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민호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좋은 작품이 나올까요?”
“나올 겁니다.”
“아까도 그렇고, 김형우 작가를 믿나 봐요.”
“안 믿을 이유가 없지요. 성실하면서도, 글도 잘 쓰고, 그러면서도 배우는 데 주저함이 없잖아요. 그런 녀석, 진짜 오랜만에 봅니다.”
“오랜만이라면?”
“으흠, 하나하나 생각은 안 나는데 윤희가 딱 저런 느낌이었지요.”
윤희라면, 이번에 <돌을 사랑한 여자>라는 작품으로 29표를 득표해서 올해의 소설 1위에 등극한 최윤희 작가를 말하는 거였다.
“그 정도라고요?”
“네, 느낌상으로는 그래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최윤희 작가는 너무 거물인데….”
“모르죠. 윤희가 이번에 등단한 지 7년 차니까, 형우도 7년쯤 지나면 그 정도로 큰 작가가 되어 있을지도요.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한 건 맞지만, 1년 차로 본다면 어마어마하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그리고 솔직히 주 선생님도 지금 별로 걱정 안 하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제가요?”
다 안다는 듯이 한다은이 말했다.
“주 선생님, 원래 작품 들어가기 전에는 완전 전전긍긍하시잖아요. 저번에도 한 번 터지셨지, 아마?”
“<폭군전기>요? 그 이야기는 진짜… 말도 꺼내지 마세요.”
얼마 전, C&N에서 터졌던 초유의 표절사태.
그 일의 여파 탓에, 교보재 문고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입고된 책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인테리어도 새로 해야 했다.
C&N 측에서 나름의 보상을 해 주기는 했지만, 단순히 물질적인 것들을 제하고도 서점의 이미지 문제나 투자된 인력 손실 등을 감안하면 분명한 손해였다.
“그 점은 사과할게요. 어찌 됐건, 태준이도 제 제자니까.”
“뭐, 그런 것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에이, 그것 때문에 저 찾아오신 거잖아요?”
“…귀신이시네.”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주민호가 말을 받았다.
<폭군전기>의 실패 이후에 ‘한국대학교 문창과’라는 명함을 한 번 더 봤더니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교보재 문고의 중역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한다은을 찾아오고 형우를 직접 만나는 수고를 들인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제 이야기만 했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형우 보고 든 생각 없어요?”
“뭐, 한 시간 만난 건데 뭘 알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주민호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확신 같은 게 보였다.
20년 넘게 교보재 문고에서 일해 왔던 그의 사업 감각이 이 책은 무조건 성공한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 * *
휴일이 무엇인가?
월화수목금 다음에 오는 ‘토, 일’이 휴일이다.
거기에 더하면 빨간 날 정도?
그러니까, 세간이 말하는 ‘휴일’은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휴일의 개념이 다르다.
작가의 장점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는 거고, 작가의 단점은 남들 쉴 때 못 쉰다는 거다.
작가에게 휴일은 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삘을 받아서 두 편을 쓰면 내일이 곧 휴일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오늘 안 써지면 내일도 일해야 한다는 거다.
다행히 형우에게 오늘은 글이 좀 술술 나오는 날인 듯싶다.
“이 텐션이면 3일치도 만들 수 있겠네.”
마음 같아서는 그 이상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예전에 하루에 4일 치를 했다가 과로로 쓰러질 뻔했으니 딱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진짜 졸업생들 중에서 내가 제일 바쁘겠네.”
형우의 그 말은 반만 맞았다.
형우보다 더 바쁜지는 모르겠으나, 형우만큼은 무조건 바쁜 형우의 친구가 있었으니.
“…몇 컷 남았어요?”
“세 컷!”
…도곡동에 위치한 한 화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의재는 땀을 뻘뻘 흘렸다.
“선생님! 다음 화 갑니다!”
“여기 4컷부터 8컷까지 구도 몽땅 고쳐! 그리고 완성된 거 선 따고!”
“넵!”
“의재야! 태블릿 맛 갔는데?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거 설정 들어가셔서요!”
매주 금요일 연재되는 <전설의 보안관>의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 끝내면 2주 쉰다! 힘내자!”
주문처럼, 의재가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