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
창밖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수많은 커플이 손을 잡고 하하호호 걸어간다.
그러니까, 오늘은 성탄절이다.
“……하아.”
사무실 구석에서, 큰 한숨 소리가 들린다.
턱을 괸 채로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우희였다.
“언니, 오늘 같은 날 꼭 소집을 해야 했을까요? 내일 해도 되잖아요.”
“오늘이 쉬는 날이라서 다들 모이기 쉽잖아요.”
“…언니는 ‘쉬는 날’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더 놀라운 건, 자기 말고는 이걸 따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죄다 일 중독자들이야.”
천우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회의 시작하죠.”
천우희가 탁자에 둘러앉은 다섯 ‘공동대표’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일단…… 지금 사정은 대강 아시죠?”
“네. 형우 선배한테 들었어요.”
그렇게 대답한 건 연수였다.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공태준… 아니, 윤태준이 C&N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는 거랑, C&N의 견제가 들어왔다는 거 말하는 거죠?”
“맞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연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혜선이 뭔가를 가득 안고 나왔다.
<스패로우 팩토리 3개월 프로젝트>.
꽤 그럴듯한 제목이 붙어 있는 책자였다. 요 며칠간 밤을 새우며 꾸린 이정표다.
“……허어.”
그 방대한 양을 본 천우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딱 봐도, 장난 아닌 내용이다.
“아직 결정 난 건 아니고, 청사진일 뿐이에요. 일단 첫 번째는 이겁니다.
지원이 ‘스페셜 위크’라고 적힌 큼지막한 글자를 강조했다.
“설명을 해 줄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설명을 드리려고 했어요.”
천우희의 질문에 지원이 스크린을 띄웠다.
“스페셜 위크는 이번에 스패로우 팩토리에서 제작할 플랫폼의 이름입니다.”
“플랫폼 제작?”
“네. 이번에 스패로우 팩토리에서 자체적으로 플랫폼을 개발해 볼까 해요.”
천우희가 고개를 살짝 꺾었다.
“……그게 가능해?”
“지금으로서는 가능 불가능을 따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C&N이 견제를 넣었으니까요.”
“흠.”
C&N이 플랫폼을 틀어쥐고 협박을 해 오니까, 아예 스스로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만약 저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스패로우 팩토리는 작품을 잘 못 파는 무능한 회사로 낙인찍히고 말겠죠. 그랬다가는 진짜로 다 끝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스패로우 팩토리만의 플랫폼, 스페셜 위크를 제안합니다.”
그럴듯하네, 라고 중얼거리던 천우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그나저나 왜 하필 스페셜 위크야? 독자들에게 특별한 한 주를 선사해 주고 싶다는 뜻인가?”
“그것도 있긴 하지만….”
천우희의 질문에,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플랫폼 이름에서 저희 회사가 연상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아아, 그래서 이름을 맞춘 건가?”
“맞아요. 스페로우 팩토리와 스페셜 위크, 둘다 스페-로 시작하잖아요.”
의외로 디테일이 있는 이름 선정이다. 그때까지 말을 듣던 형우가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저기, 편집자님?”
“네.”
형우가 A4용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플랫폼을 제가 하자고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냥 플랫폼 하자! 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시장은 아니지 않아요?”
“그렇죠.”
지원이 그대로 인정했다. 플랫폼 시장은 솔직히 말해, 반쯤은 레드오션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당 플랫폼만의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3대 플랫폼은 그 역사와 자본 자체가 특별함이다. 그 외의 플랫폼들도 비슷하다.
요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노빌피아’는 자의건 타의건 아예 성인형 웹소설을 장기로 내세웠고, ‘레디북스’같은 곳은 다른 곳에서 1화씩 판매되는 웹소설을 1권 분량으로 파는 것으로 플랫폼만의 경쟁력을 구축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가 만들 플랫폼. 그러니까 ‘스페셜 위크’만이 갖고 있는 경쟁력이 뭔지가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요.”
“…정확해요.”
지원이 조금 놀랍다는 듯이 형우를 바라봤다. 형우는 천우희와 달리, 입문한 지 1년도 안 되는 신인일 텐데. 시장을 보는 눈이 꽤 날카로워졌다.
“그 대답은 제가 아니라 혜선 씨가 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혜선 씨?”
“네.”
기다렸다는 듯이 신혜선이 말을 받았다.
“저는 예전에 플랫폼 사업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유니버스’라는 이름의 플랫폼이었는데,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유니버스요?”
혜선의 말에 반응한 건 의외로 연수였다.
“유니버스가 선배가 만든 거였어요? 대박, 나 완전 좋아했는데!”
“……뭐, 마지막엔 망해버렸지만.”
망했다기보다는, 빼앗긴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와, 와, 저 진짜 놀랐어요.”
“……유니버스가 대체 뭔데 그래?”
형우의 질문에 연수가 신나서 대답했다.
“선배, 미국 코믹스랑 일본 만화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세요?”
“으음, 잘 모르겠는데. 그림체?”
“당연히 그런 것도 있기는 하겠지만, 사실 제일 큰 차이는 세계관이라고들 흔히 말해요.”
“세계관?”
“네. 일본 만화는 서로 세계관이 겹치는 경우가 많이 없잖아요? 고무인간이 닌자세계에 가는 일도 없고, 키 작은 배구선수가 거인이랑 싸우지도 않죠.”
“……당연한 거 아냐?”
“이게 미국 코믹스에서는 당연하지 않거든요.”
연수가 가장 유명한 코믹스의 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 예시를 들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는 모두가 알아요. 선배도 알죠?”
“빨간 쫄쫄이 입고 다니고, 손목에서 거미줄 뿜고, 삼촌이 죽었고, 명대사로는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가 있다는 것 정도는.”
“정확해요! 그러면요, 선배. 혹시 <스파이더맨> 작가가 누군지는 알아요?”
“스탠 리?”
형우는 마블 코믹스의 대부의 이름을 꺼냈다. 하지만 연수는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반만 맞았어요. 스탠 리는 정확하게 <스파이더맨> 캐릭터의 창조자죠.”
“……창조자가 작가랑 뭐가 다른데?”
“이게 미국식 코믹스의 재밌는 점이에요. 미국 코믹스는요, 하나의 캐릭터를 갖고 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거든요!”
“……응?”
“스파이더맨 작품은요, 진짜 한 수백 개가 있어요. 제가 알기로만…….”
까만 스파이더맨, 여고생 스파이더맨, 로봇 스파이더맨, 스파이더피그까지…….
수많은 파생작들의 이름이 좌르르- 나열됐다.
“이런 시스템을 미국 사람들은 ‘멀티 유니버스’나 ‘스핀오프’라고 불러요.”
그중에서, ‘유니버스’라는 단어가 유독 튀었다. 혜선이 만들었다던 플랫폼과 같은 이름이지 않은가.
“그러면 혹시, 혜선이가 만들었다는 ‘유니버스’라는 게…….”
“맞아요! 미국 코믹스에서 사용하던 법칙을 웹소설에 적용한 플랫폼이었죠!”
* * *
크로스오버(Crossover).
한 창작자가 다른 창작자가 만든 창작품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창작 기법이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별개의 이야기였던 스파이더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서로 만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떠올리면 쉽다.
스파이더맨은 스탠 리가 만든 창조물이고, 캡틴 아메리카는 잭 커비의 창조물이지만, 크로스오버 장르는 그런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크로스오버의 기법 속에서 캐릭터는 원작자가 만들어 놓은 틀을 넘어, 스스로 성장하며 지평을 넓힌다.
“그러니까, 웹소설 산업을 넘어서 캐릭터 산업을 위주로 하는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뜻이네.”
그 긴긴 설명을 한 문장으로 일축하며, 형우는 혜선을 향해 물었다.
“……코믹스 말고, 웹소설에서의 성공 사례 혹시 있어?”
“정확하게 웹소설은 아니지만…… 일본 라이트노벨이 이런 식으로 성장을 많이 했어. 하나의 유명한 작품을 베이스로 두고, 거기에 다른 작가들이 달라붙어 스핀오프를 만드는 식으로.”
“……흐으음.”
혜선의 설명은 꽤 그럴듯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테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캐릭터 산업을 진행하느냐는 점이었다.
“내 생각에, 이 플랫폼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굉장히 많아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베이스가 되는 작품도 있어야 할 테고.”
“첫 베이스는…… 아마 <아이언 타이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혜선은 태블릿PC를 톡톡 두드렸다. 그 위에 도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첫 번째 세계관인 ‘서울’은 <아이언 타이거>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관이야. 당연히 첫 작품은 <아이언 타이거>고, 둘째 작품은 <빌런의 뒷골목>이지.”
“<빌런의 뒷골목>?”
“이거야.”
그렇게 말하며, 혜선은 작품 하나를 띄웠다. <아이언 타이거>에 등장한 빌런인 ‘재중파’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2만 자 정도의 이야기였다.
“누가 쓴 거야?”
“정진욱 작가님한테 부탁했어.”
“……오호.”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보니 뭔가 그럴듯해 보이기는 했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끊임없이 확장 시켜나갈 거야. ‘도시’는 그 첫 번째 발판이 되겠지.”
“으음, 모델이 뭔지는 얼추 이해했어.”
하지만 역시 근본적인 질문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재밌을까?”
“형우 너, 예전에 나랑 만화방 갔을 때 기억해? 그러니까, 한창 <사냥꾼X사냥꾼> 읽을 때.
“<사냥꾼X사냥꾼>이라면……. 푸흡.”
형우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만화에는 꽤 우스운 일화가 있었으니까.
형우와 혜선이 학교에 다닐 때, 둘은 종종 학교 근처 만화카페에 들렀다. 그러던 중, 하루는 둘이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무려 만화 내용 때문에. 정확하게는 만화의 등장인물인 헌터협회 회장 네테로와 주인공인 곤육몬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얼마나 목에 핏대를 세우게 되던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네. 내가 졌어.”
형우는 두 손을 휙, 들어 올렸다.
“얘랑 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얘랑 쟤랑 만나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게 크로스오버의 본질이라는 거잖아.”
“맞아.”
혜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건 언제 해도 재밌잖아. 안 그래?”
* * *
스패로우 팩토리의 정기회의를 마친 후, 형우는 밖으로 나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라봤다. 반짝거리는 트리에서는 머라이어 캐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12월 25일에는 저 노래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뭔가 기쁜 마음보다는 착잡한 마음이 앞선다. 스패로우 팩토리의 새로운 도전 때문이다. 그게 단순한 도전이었다면 조금은 즐거웠을지도 모르나, 그 근본적인 이유는 C&N의 견제 때문이니. 그냥 내가 참고 넘어갔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 순간, 목 뒤에 뭔가 뜨뜻미지근한 것이 닿는다. 돌아보니 방금 꺼낸 듯한 뜨끈한 캔커피다.
“여기서 뭐 해요, 집에 안 가고?”
“아, 편집자님. 언제 나오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캔을 퐁- 하고 딴다. 추운 공기와 만나니 캔의 온기가 유달리 선명하다. 형우는 그대로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이 정도 카페인으로는 뇌하수체에 기별도 안 가지만, 그래도 뭔가 포근한 느낌이 든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혹시 막 크리스마스인데 나는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그런 생각한 건 아니죠?”
“……플랫폼 말인데요.”
쓸데없는 말을 무시하며, 형우가 말했다.
“진짜로 잘 될까요? 예산적인 부분부터가 문제일 것 같은데.”
스패로우 팩토리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새로운 사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아까 이야기에서 쏙 빠져 있던 부분이었다.
“……일부러 이야기 안 한 건데. 사실은 제 돈으로 충당하기로 했어요.”
“그 정도로 가능성 있는 사업인가요?”
“일단 지금 사업을 안 벌이면 영영 못 벌이게 되는 것도 있는데…… 제 생각엔 가능성이 있어요.”
“그, 일본과 미국에서의 성공 사례 때문인가요?”
“그것도 있지만, 형우 작가님 덕분도 있지요.”
“예? 그게 무슨 말이죠?”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나와 당황한 형우를 보고, 지원이 씩 웃었다.
“이번에 타타룬, 그러니까 김정수 작가님 작품 봤거든요. 며칠 사이에 진짜 좋아졌던데. 들어 보니까, 형우 작가님이 키웠다고 하더라고요.”
“기본기는 있어서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주제만 찾아주면 됐었으니까요.”
“……글쎄요, 한 번이면 그랬겠지만. 연수 작가님 때도 그랬고 정진욱 작가님 때도 그랬죠. 아세요? 정진욱 작가님 요즘 순문학 공부 시작하신 뒤로 작품 질 엄청 올라간 거?”
“……허어.”
“그 덕분에 사업 구상한 거예요. 유니버스식 작법이라는 건, 결국 작가의 질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리고, 스패로우 팩토리에서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움직이기만 하면 다른 작가들의 레벨을 팍팍 올려주는 형우라는 다크호스가 있었다.
“애초에 작가님이 없었으면, 제 돈을 아무리 쏟아붓는다고 해도 엄두도 못 냈겠죠.”
그렇게 말하며, 지원이 손을 꿈지럭거렸다.
“……그러니까, 작가님도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이라뇨?”
“괜히 나 때문에 스패로우 팩토리가 고생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에 궁상떨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허어, 귀신이 따로 없다.
“알고 있었어요?”
“에이, 저희가 알아 온 게 거의 1년인데. 척하면 척이죠. 아무튼, 작가님 없었으면 스패로우 팩토리도 없었으니까. 그 점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지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는 알겠다. 그리고 형우 또한 그만큼 지원을 믿었다. 자신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사람들 중 가장 큰 공로를 한 사람은, 어떻게 봐도 지원이니까.
“……지금까지 편집자님 말을 들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결론은요?”
“……한 번밖에 없더라고요. 기억해요? 여름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31개의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에서 만났을 때, 지원은 ‘여기는 쿼드러플 민트초코가 진짜 맛있어요!’라며 형우에게 추천했었다.
“그리고 결국 못 먹고 다 버렸죠.”
그때를 제외하면, 지원의 말이 틀린 적은 없다.
“그건 작가님 입맛이 이상한 거거든요!”
멀리서 산타 분장을 한 아저씨가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게 보였다.
부디 이 결정이 내년의 선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 * *
지원은 반격을 위한 프로젝트를 3개월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말했지만, 의외로 반격의 기회는 그것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참새치 작가님! 빙그레게임즈의 유지태 팀장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어워드 대상 타신 <아이언 타이거>를 게임으로 만들고 싶어 연락드렸는데, 혹시 생각 있으실까요?”
오늘은 12월 26일. 크리스마스가 하루 지난 날이었지만.
“당연히 좋습니다.”
약간 뒤늦은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