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3 >
안국동 빌딩에 노태유 민정당 대표와 그의 최측근인 김정열 사무총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댄 채 차기 정권 창출에 관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두한은 최소 10년 이상 권력을 유지할 속셈이 분명합니다."
김정열의 단언에 노태유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놈은 나름 약속을 잘지키는 편이라고. 그러니 미리 부터 너무 속단하지마라."
"그렇지만 전두한의 측근 그룹들은 입만 열면 단군 이래 최대 성군이라고 나발을 불어대고 있습니다. 박정후 처럼 장기 독재의 발판을 열려는 수작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흠..."
노태유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근간에 청와대에 들어가셔서 담판을 지으십시오. 그 길이 최선입니다."
"김총장은 그놈의 성격을 몰라서 그런 속편한 소리를 하는구만. 곧이곧대로 87년에 나에게 정권을 이양하라고 들이댔다간 그날부로 나를 당대표직에서 내칠 것이 뻔하단 말일세!"
노태유가 격한 언성을 내뱉자 김정열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내걸렸다.
'이 자는 왜, 이리 배포가 작단 말인가? 최고 통치권자가 되고 싶다면 전두한과 자웅을 결할 만한 뱃심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남자한텐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구나.'
정열이 그러거나 말거나, 노태유는 자기 할만만 길게 늘어놓았다.
"장일동을 조심하게. 그놈이 나는 물론이고 자네 역시 도감청을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 매사에 처신을 바로하게."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김정열은 그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바람 처럼 사라졌다.
그날밤.
청와대 관저에 장일동 안전기획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한 전두한 대통령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곧바로 긴급 현안을 보고했다.
"민정당의 노태유 대표와 그의 최측근 인사인 김정열 사무총장이 안국동 빌딩에서 밀담을 나눴습니다."
"내용을 파악했나?"
"도감청 결과 차기 정권 창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순간 전두한의 얼굴에 불쾌한 심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럴 육시랄 새끼를 봤나! 벌써 부터 내 자리를 탐하는 건가?"
"헛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있는 김정열을 이번 기회에 단단히 손을 보심이 가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문제는 장부장이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노태유한테 가서 처신을 각별히 조심하라고 전하고."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그자 역시 이번 참에 대표직함을 떼어내시죠."
그러자 전두한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이 친구야. 노태유는 내 30년 지기 친구라고. 그런 자식을 하루아침에 내치라는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각하께 불충을 저지른 사실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죽마고우라 하나 일국의 지존이신 각하께 연일 불충을 저지르는 자를 여당의 대표로 어찌 인정할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전두한의 얼굴에 싫지않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에게 절대충성을 다하는 장일동이 참으로 믿음직했다.
"역시 장부장 밖에 없구만. 우하하하..."
그의 입에서 호탕한 광소가 터져나왔다.
한참 동안 호쾌한 웃음소리를 흘려보낸 전두한이 정색한 얼굴로 명을 내렸다.
"장부장의 충언대로 돌아오는 6월달에 노태유의 대표직을 박탈할테니 쓸만한 차기 당대표를 알아봐."
"명하신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각하!"
다음날.
남산 서빙고동 대공분실에 김정열 사무총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기부의 고문기술자들은 김정열의 옷을 모두 벗긴 뒤 묵직한 몽둥이로 무참한 매질을 가했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으아아아아아악....제발.....그만......쿠아아아악....
허나, 고문 기술자들은 김정열의 비명 소리에 눈썹하나 까딱안한 채 다음 수순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피곤죽으로 전락한 김정열을 물이 가득한 욕조로 끌고간 뒤 그의 얼굴을 욕조 깊숙이 밀어넣었다.
정열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전신을 격렬하게 발버둥 쳤지만, 그의 어깨와 머리를 짓누른 남자들의 완강한 손길에 금새 움직임이 잦아졌다.
그날 이후, 정열은 장장 1주일 동안 가혹한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두루 섭렵했다.
***
내 목표는 정연희와 결혼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그러자면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어야했다.
최소 수천억대의 자산을 보유한 재벌로 거듭난 뒤 연희에게 근사한 프로포즈를 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나름 각오를 다진 탓인지 학업에도 힘을 쏟았다.
그 덕분에 단 1년 만에 중고등학교 과정을 순조로이 이수했다.
그 무렵 병무청에서 입영 통지서를 고시원에 발송했다.
놀랄 노자였다. 나는 진즉에 군대를 면제받은 상태였다.
곧바로 병무청에 이의를 제기하자 놀란 만한 답변을 해왔다.
"이태수씨의 학력사항이 고졸로 확인됐기 때문에 방위병 복무대상자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나에게 왜, 소집영장이 발송됐는지 이해가 됐다.
원래 내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군면제 대상자였다.
허나, 검정고시를 통해서 고졸학력 시험에 합격하자 방위병 대상자로 신분이 변경된 탓이었다.
고등학교 학벌이라도 얻자고 벌인 일이 군입대라는 최악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씁쓸한 심경이었다.
그렇지만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는 격언대로 국방의 의무를 이수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주일 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방동 공군대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4주간의 방위병 훈련이 예정된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나는 방위병들의 천국으로 널리 알려진 보라매 공군복지단에서 근무할 예정이었다.
보라매 공군 복지단은 현역 사병보다 방위병들의 숫자가 더 많은 탓에 사병들의 텃세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방위병들을 잘못 건드리면 사병들이 도리어 작살이 나는 탓이었다.
4주간의 방위병 훈련을 무사히 끝낸 뒤 고시원에서 출퇴근하며 방위병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보라매 복지단으로 출근하자 선임병들이 방위병들을 각조에 발빠르게 배정했다.
나는 복지단의 노가다를 책임지는 건설중대에 배속을 명받았다.
다음날 부터 부대 내의 각종 노가다와 잔디 뽑기, 수목 관리에 매진하며 나름 보람찬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
보라매 복지단에서 방위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야간과 주말을 이용해 미장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날 건설중대의 군무원이 나를 호출했다.
복지단 행정실로 들어가자 선임병이 군무원이 있는 사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군무원 아저씨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커피를 권했다.
커피를 차분히 음미할 무렵 군무원 아저씨의 입에서 은근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이일병 주특기가 욕실 미장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냐?"
"사회에서 하던 일이었습니다."
"와! 우리 건설중대에 쓸만한 인재가 들어왔구나. 하하..."
그가 웃음을 흘려보내며 말을 이었다.
"복지단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가 장군님들 관사를 관리하는건데 말이지. 쓸만한 공관병이 없더라구. 그래서 내가 이일병을 추천할 생각인데, 마음이 있나?"
공관병은 놀고 먹는 보직이었다.
관사에서 수목이나 각종 허드렛 잡일을 도맡으며 거의 날마다 맥주파티를 일삼는 꿀보직이었다.
"당연히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자 군무원이 그럴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날 이후, 보라매 복지단 인근의 장군 관사를 전담하는 공관병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
공관에서 일한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쓰리스타 장군님의 따님이 공관에 나타났다.
그녀는 성격이 까달스러운 탓에 욕실의 타일을 이쁘장한 사제 타일로 교체해 달라고 쓰리스타님에게 날마다 요구했다.
결국 나는 장군님의 딸내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제에서 긴급히 공수한 이쁘장한 타일로 욕실을 새로이 단장했다.
그런 내 노고가 마음에 들었음인지 정원의 수목을 다듬는 내 앞에 쓸만하게 생긴 장군님의 여식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얼음이 동동 띄워진 오렌지 쥬스가 들려있었다.
"니가 우리집 욕실을 수리한 애니?"
그녀는 오렌지 쥬스를 나에게 건네며 다짜고짜 반말 짓거리를 내뱉었다.
말하는 싸가지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의 싹둑머리 없는 언사를 묵묵히 감내하며 오렌지 쥬스를 입안으로 벌컥벌컥 들이킨 뒤 그년에게 쥬스잔을 되돌려 주었다.
"이름이 뭐야?"
당연히 그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관계로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런 탓인지 그년이 성이 난 얼굴로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이자식아!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잖아!"
결국 '똥이 무서워서 피하지, 더러워서 피하냐'는 마인드를 마음 한켠에 묻은 채 나름 친절한 태도로 내 이름을 밝혔다.
"이태수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년이 화가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내가 물으면 그때그때 바로 대답하라고. 명심해."
"넵. 충성!"
장난스레 경례를 올려부치자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길게 베어문 채 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5시 종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고시원으로 퇴근했다.
방위병은 이래서 좋다.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이 기본이었다.
그뿐이랴. 주말과 빨간날 마다 꼬박꼬박 휴일을 챙겨먹었다.
당연히 사병들은 그런 우리들을 시샘이 그득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허나. 보라매 복지단은 방위병들의 숫자가 사병들의 2배가 넘은 탓에 현역들은 감히 우리에게 말 한마디 조차 함부로 할수 없는 처지였다.
더군다나 복지단에서 근무하는 방위병들 중에는 한주먹하는 동네 불량배가 아주 많았다.
공군 사병들이 당해내기에는 애시당초 역부족인 셈이었다.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어제끼며 분당으로 내려갔다.
정자동과 서현동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기 위함이었다.
돈은 이미 준비해둔 상태였다.
떡방에 들어가자 유현종 사장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우리 이사장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셨을까?"
그는 분당 일대의 토지를 50만평이나 매입한 나를 전도유망한 사장으로 우대하고 있었다.
내 덕분에 수백만원에 달하는 중개 수수료를 챙긴 탓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그가 내온 달달한 커피를 음미하며 입가에 담배를 베어물었다.
그러자 유사장이 친근한 얼굴로 내 담배에 라이터불을 붙여주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용건을 꺼냈다.
"서현동과 정자동의 토지를 매입하고 싶으니까 알아서 거래를 해주세요."
"서현동과 정자동은 나름 땅값이 있는 곳인데, 감당할 자신이 있나?"
"평당 얼마죠?"
"아무리 못해도 평당 5천원 안팎이라고 봐야지."
"그럼 급한대로 2천평 정도만 구해주세요."
그리 말하며 천만원이 들어찬 돈가방을 유사장에게 내밀었다.
그가 사람 좋은 얼굴을 과시하며 이곳저곳에 전화를 넣기 시작했다.
그날, 유사장의 도움으로 정자동과 서현동 일대의 토지를 2천평 정도 추가 매입했다.
< 시작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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