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4 >
보라매 공군 복지단은 전국 각지에 산재한 공군 부대에 보급품을 지원하는 부대였다.
그런 탓으로 건설중대 한켠에 위치한 보급품 창고에는 미군이 기증한 각종 물품이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다.
그중에서도 고급 전투화와 버드와이저 맥주, 말보로 담배, 최고급 과일 통조림 등이 단연 압권이었다.
당연히 나는 잘나가는 공관병인 탓에 미군의 귀한 보급품을 날마다 섭취했다.
본적도 없는 귀한 과일 통조림을 안주삼아 버드와이저 맥주를 폭풍흡입하며 말보로 담배로 입가심을 했다.
아무도 우리 공관병들에게 딴지를 걸지 못했다.
중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하신 장군님을 모시는 탓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공관에 미국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가 나타났다.
그녀석은 나보다 계급이 높은 상병이었다.
그는 장군님 자녀들의 영어과외를 전담하는 공관병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우리는 금새 친해졌다.
공관에서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는 까닭이었다.
친해지지 않으면 서로가 피곤할 지경이었다.
그는 틈날 때마다 미국 유학시절 썰을 자주 풀었다.
녀석은 백마를 숱하게 따먹었노라고 허구한날 떠벌였다.
그러나 우리 공관병들은 그의 말을 거의 믿지 않았다.
160cm가 될까 말까한, 녀석의 왜소한 신체 사이즈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를 입만 열면 구라만 치는 녀석으로 치부했다.
그렇지만 나름 사이좋게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는데 집중했다.
***
드디어 1년 만에 상병 계급장을 달았다.
이제 6개월만 더 버티면 징집해제였다.
그런 탓일까?
괜스레 일이 하기 싫어졌다.
특히 야간과 주말에 하는 미장일에 진력이 났다.
그런 이유로 5시 종이 치자마자 선후임병들과 대방동 인근의 술집과 당구장을 몰려다니며 세월아 네월아했다.
오늘도 5시 정각이 되자마자 선후임병들과 부대 주변의 술집으로 직행했다.
우리는 각자 5천원씩의 돈을 갹출한 뒤 닭도리탕을 안주삼아 노가리를 까는데 열중했다.
선후임병들은 자기들 만의 화제를 들먹이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헤비메탈이 어떻고, 대학교 여친이 어쩌고, 클럽에서 원나잇을 즐겼다는 등의 대화를 길게 주고 받았다.
그 덕분에 본의아니게 술자리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여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뭘 알아야 말이라도 건네련만, 그들은 나와 전혀 다른 세상의 주제를 들먹이고 있었다.
이런 것이 군중 속의 고독인가?
선후배 동기들은 거의 모두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탓인지 돈벌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돈벌이에 관련된 얘기라면 얼마든지 끼어들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돈을 버는 일 보다는, 음악과 여자, 스포츠 등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친구들과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노가다에 열중하며 돈을 모으는 족족 분당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간혹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게 거의 전부였다.
친구, 여자 등의 존재는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다.
번듯한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했으니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술자리에서 나홀로 꾸역꾸역 술잔만 비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당구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이다.
내기 당구를 칠 때마다 거의 모두 내가 졌다.
그런 이유로 요즘에는 당구장에 가서도 큐대를 잡지 않았다.
돈이 아까운 탓이었다.
그렇지만 녀석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내기 당구를 즐기는 그들을 한켠에서 묵묵히 구경하는게 전부였다.
허나, 그런 나를 생각해주는 녀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방위생활을 하면서 만난 그저그런 쓸데없는 인연에 불과했다.
애석한 순간이었다.
***
85년에 들어서자마자 내 마음을 억수로 아프게 하는 슬픈 뉴스가 전해졌다.
나만의 아프로디테였던 정연희가 사업가 나부랭이와 백년가약을 올린 것이다.
그날, 내 방에 장식된 그녀의 사진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허망하게 스러졌다.
요즘 나는 공관에서 일과가 끝나자마자 선후배 동기들을 대동한 채 인근의 술집에서 세벽녁까지 폭음하는 일을 무한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술값은 내가 전부 부담했다.
그러했으니 인정머리 없는 그놈들이 얌전히 나를 따른 것이다.
술을 입에 댓다하면 정연희 타령을 끝도없이 길게 늘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녀석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기들끼리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데 몰두했다.
그런 광경을 목도할 때마다 마음 한켠에서 서러운 외로움이 격렬하게 치솟았다.
군중 속의 고독을 뼈져리게 절감한 탓이었다.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고시원에 도착했다.
후줄근한 침상에 눕자마자 절로 깊은 잠에 골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방으로 내려갔다.
숙취 때문에 골이 터질거 처럼 아파왔다.
주방 서랍에서 육개장 사발면을 꺼낸 뒤 그 안에 뜨거운 물을 부을 찰나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형님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만면가득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름 묵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박치영 검사님을 찾아와라."
박치영은 그의 이름이었다.
꼴을 보니 사법고시를 패스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그에게 축하의 변을 토해냈다.
"드디어 되셨군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넙죽 고개를 숙이자 그가 만족한 얼굴로 내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박치영은 고시원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시원섭섭한 심경이었다.
드디어 18개월 동안 이어진 지긋지긋한 방위병 복무가 끝이났다.
더불어 인정머리 없는 그놈들과도 모든 인연이 끝났다.
우리는 두번 다시 보지 않을 사이였다.
서로간에 별다른 전우애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간만에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을 내방했다.
시내에 바람 쐬러 나온 김에 교보문고에서 볼만한 책들을 두루 섭렵할 생각이었다.
허나, 내 기대는 얼마지나지 않아 산산이 무너져내렸다.
근처를 가득메운 매캐한 최루탄 가스와 전경들의 무자비한 몽둥이질 때문이었다.
결국 교보문고에 가보지도 못한 채 전철역 안으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마다 전경들과 대학생, 시민사회 단체 인사들의 숨바꼭질 장면이 무한반복되고 있었다.
시국이 나날이 격화되는 모양새였다.
총칼로 집권한 전두한과 그를 반대하는 민주시민 세력간의 치열한 전쟁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내 알바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건 하루빨리 노태유가 대통령에 등극하는 것이었다.
그리해야 분당의 땅값이 하늘 높을줄 모르고 치솟기 때문이다.
미래의 도플갱어는 노태유가 대통령이 되면 분당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라고 확언했다.
나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가 말한대로 박정후가 죽고 전두한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하나도 맟추기 어려운 예언을 도플갱어는 무려 두차례나 적중시켰다.
그를 믿는건 순리였다.
고시원 주방에서 라면으로 주린 배를 채운 뒤 고시원방으로 올라갔다.
책상위에 놓여진 TV를 켜자 코미디 프로가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코미디 프로를 시작으로 가요, 드라마 등을 차례로 감상했다.
그런 탓인지 나만의 방송국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내면에서 불현듯 솟구쳤다.
쇼오락과 드라마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방송사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탓이었다.
수중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도플갱어는 87년에 분당이 대단지 아파트로 변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말대로 된다면 앞으로 2년 후에, 천문학적인 거액을 벌어들일 것이 확실시됐다.
2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다.
나는 당분간 모든걸 잊고 일 혹은 공부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곰곰히 생각한 결과 대입학력고사를 치루기로 마음먹었다.
돈이야 그때그때 조달하면 그만이지만 대학교에 들어갈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 나이도 이제 26살이었다.
이미 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많이 늦은 시점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대학교 입학을 포기한다는건 말이 안된다.
공부에는 나이가 없는 탓이다.
마음을 먹자마자 고시원을 박차고 나왔다.
그 뒤 인근의 책방에서 수험서적을 박스채로 구입했다.
그날 이후, 나홀로 고시원 방에서 대입공부에 열중했다.
11월이 되자마자 전국이 대학입시 열풍에 휩싸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름 고시원 방에서 주야를 잊은 채 공부에 열중한 탓으로 어느 정도 자심감이 있었다.
수학은 약했지만 국어와 영어, 암기과목 등에 나름 확신이 있었다.
전국 모의고사 성적도 생각 이상으로 좋게 나왔다.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학입시가 펼쳐지는 고등학교를 목표로 보무도 당당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날밤.
가채점 결과 내 점수는 거의 290점 내외였다.
340점 만점에서 50점이 빠지는 점수였다.
이 정도 성적이라면 연세대와 고려대의 중위권 학과에 얼마든지 합격이 가능한 점수였다.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수험 성적이 말도 안되게 좋았다.
하늘에 감사한 심경이었다.
며칠 뒤, 연세대 영문학과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이왕이면 영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후, 모두의 예상대로 연세대 영문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 시작 4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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