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5 >
영문학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기 위해 학교 대강당으로 들어가자 학과 팻말들이 횡렬로 늘어선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영문학과라는 팻말 뒤편으로 일단의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들 대다수는 여학생이었다.
남학생들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절대 다수는 여자였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 내심 흥분이 됐다.
나는 일평생 여자 손목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천하의 쑥맥이었다.
그런 내가 여학생들과 앞으로 4년 동안 대학생활을 함께 한다고 생각하자 말로 형언하기 힘든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모든 청춘들이 꿈꾸는 달콤한 캠퍼스 로맨스를 만끽할 가능성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진 탓이었다.
영문학과 신입생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여학생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본능적으로 내 얼굴이 잘나서 쳐다보는 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노티나는 차림새 때문이었다.
나는 백화점에서 거금 10만원 돈을 주고 구입한 검은색 양복을 쫙 빼입은 상태였다.
그런 내 차림새가 그들에겐 위화감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이럴줄 알았다면 그냥 편하게 캐주얼한 복장으로 오는건데.
신입생 환영회라는 말에 과도한 오버액션을 취한거 같다.
대략 30분 뒤, 학과 선배들이 우리를 고속버스로 안내했다.
고속버스 전면 차창에는 ‘대성리행’이라는 표지판이 걸려있었다.
목적지가 대성리인 모양이었다.
고속버스에 탑승하자 학과 선배가 간략한 인사말을 전했다.
“신입학우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진심으로 반갑게 생각합니다. 그럼 앞으로 2박 3일 동안 뜻깊은 오티를 모두 함께 즐겨봅시다.”
학과 선배의 그말을 끝으로 우리를 태운 고속버스가 육중한 엔진음을 토해내며 힘차게 출발했다.
대성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술판이 펼쳐졌다.
선배들은 스테인레스 세숫대야애 막걸리와 소주를 통째로 집어넣은 채 우리 신입생들에게 무지막지한 원샷을 강권했다.
나는 어느 정도 술을 잘마신 탓에 그럭저럭 술을 마셨지만 동기들 태반은 반의반도 못비운 채 그자리에서 대다수 토악질을 했다.
으웩...! 으웩...! 으웩....!
그들이 게워낸 토사물로 방안이 홍건해지자 선배들이 군기가 빠졌다며 우리들을 숙소 앞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선배들은 술도 제대로 쳐마시지 못한다는 명목으로 원산폭격, 오리뜀뛰기, 팔굽혀펴기, 피티체조 등의 체벌을 가하며 신입생들의 군기잡기에 올인했다.
선배들의 나이는 대다수 나보다 적었지만, 나는 신입생 신분이었다.
결국 울며겨자먹는 심경으로 그들의 체벌을 묵묵히 감내했다.
3시간 동안 이어진 체벌이 끝나자 곧바로 술판이 재개됐다.
동기들은 비장한 얼굴로 세숫대야에 얼굴을 박은 채 꾸역꾸역 술을 삼켰다.
억지로 술을 원샷한 동기들이 하나둘씩 제자리에 무너져내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대성리의 하룻밤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자마자 곧바로 의식화 교육이 시작됐다.
선배들은 군사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며 대정부 시위에 적극 동참할 것을 우리들에게 강요했다.
-전두한 일파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다. 그자들은 5.19 학살을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도 무고한 시민들을 고문해서 죽이고 있다!
-전두한 정권을 타도하는건 우리들에게 부여된 신성한 사명이라 할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대정부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민중가요 수업이 시작됐다.
아침이슬을 필두로 여러 유명한 민중가요들을 선배들이 제창했다.
솔직히 너무 유명한 노래들이라 따로 교육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오티는 술과 민중가요, 대정부 투쟁 교육으로 점철됐다.
저녁을 먹은 뒤 운동장으로 나가자 캠프파이어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그럽게 자리를 잡았다.
영문학과 대표인 3학년 선배 김유석이 모두발언을 내뱉었다.
"신입생 여러분들은 허심탄회하게 자기 자신을 소개해 주십시오."
김유석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는 여학우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그쪽 부터 자신을 소개해 보세요."
그러자 반반하게 생긴 그녀가 수줍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운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한영여고를 졸업한 김수정이에요. 선배님, 동기 여러분들과 좋은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그때, 선배들이 놀리듯 입을 열었다.
"남자 친구 유무랑, 키스 유무도 말해야지."
그들의 언질을 받자 수정의 볼에 분홍빛 복사꽃이 피어났다.
"아직... 남자친구는... 없어요... 키스도... 해본..적은...없고...요.."
그녀가 수줍게 대답하자 왁자지껄한 박수갈채가 장내에 기분좋게 메아리쳤다.
짝짝짝짝짝짝....!!
김수정에게 첫눈에 반했다.
신입생 중에 가장 예뻤기 때문이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이미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특히 과대표인 김유석이 그녀를 점찍은 눈치였다.
유석은 그녀의 곁에 껌딱지 처럼 달라붙은 채 이런저런 잡소리를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 부대표인 박성수가 나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신입생 중에 나이가 제일 많으신거 같은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개해 보시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선배와 동기들에게 내 자신에 대해서 나름 솔직하게 피력했다.
"제 나이는 만으로 25살이고, 한국 나이로는 27살입니다. 그렇지만 저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선배님들에게 반말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대학교라는 울타리에 들어온 이상 신입생 답게 선배님들의 지도편달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선배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저에 대해서 학우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낮에는 미장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 앉자 학우들이 나를 향해 의례적인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두시간 동안 이어진 자기 소개 시간이 끝나자 신입생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신입생 동기인 김재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들끼리 족구 한판 칠건데 형도 낄래요?"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뒷편에 위치한 족구장으로 들어가자 동기 남학우들이 보였다.
나를 포함해 신입생 중에 남학우는 달랑 10명 밖에 없었다.
반면 여학우들의 숫자는 50명이 넘었다.
영문학과는 자타가 공인하는 여초학과였다.
우리들은 곧바로 5명씩 팀을 짜서 족구게임에 몰두했다.
2박 3일간의 오티행사를 끝내자마자 시중은행을 내방했다.
잔고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계좌에는 50만원 남짓한 돈 밖에 없었다.
대학등록금과 교재비를 구입한 탓이었다.
학업을 병행하면서 미장일을 계속하거나 남들 처럼 과외를 뛰어야 할거 같았다.
연세대 학벌 정도면 미장일을 할때 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을수 있었다.
다른건 몰라도 영어 문법과 국어에 자신이 있었다.
마음을 먹자마자 연세대학교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과외 정보를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다음날.
압구정동 인근의 아파트를 내방했다.
과외 면접을 보기위함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기품 넘치는 중년 부인이 나를 맞이했다.
"어서와요."
귀부인은 그리 말하며 소파를 손짓했다.
소파에 앉자 그녀가 친절한 얼굴로 넌지시 말했다.
"차라도 한잔 하실래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식모 아줌마에게 입을 열었다.
"커피 한잔 내오세요."
"네. 사모님."
뜨거운 커피를 음미하며 그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늦게 들어간 이유가 뭐죠?"
그녀에게 솔직히 답했다.
"돈이 없어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남들 보다 늦게 대학에 들어가게 된거죠."
"보기보다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그녀가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지나고보니 도리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됐거든요."
"매사에 긍정적인 분이시네요. 마음에 들어요. 호호..."
그녀가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쳤다.
순간 말로 표현 못할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귀부인이 여자로 보인 것이다.
그때,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일 부터 영훈이를 선생님이 맡아주세요. 일주일에 5번, 하루 1시간씩 아들놈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세요."
"네. 사모님."
"과외비는 매달 말일에 4백만원씩 드릴게요."
나름 큰돈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아드님의 영어를 지도하겠습니다."
"그럼 선생님만 믿을게요."
귀부인은 그리 말하며 내 오른손을 자신의 보드라운 두손으로 포근히 감쌌다.
다음날 부터 중학교 2학년생 주영훈의 영어과외를 전담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
대학생활을 시작한지 석달이 지났을 무렵, 학생운동에 열을 올린 과대표와 부대표가 안기부에 연행됐다는 소문이 학교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아닌게 아니라 과대와 부대표는 일주일 전 부터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자 학우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은 채 과대와 부대에 대해서 난상토론을 펼치는 광경이 시야에 포착됐다.
뒷자리에 앉자 남자 동기들이 내 주변으로 잔뜩 몰려왔다.
녀석들은 술값을 잘내는 나를 큰형님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툭하면 나에게 술자리를 제안했다.
그럴 때마다 못이기는척 녀석들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술자리에서 친교를 다지는 순간이 좋았기 때문이다.
녀석들과 술자리 약속을 잡은 뒤 앞자리에 앉아있는 김수정의 백옥같은 뽀얀 목덜미와 흑단 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집중했다.
내 관심은 오로지 일편단심 김수정이었다.
그녀가 너무 좋았다.
보면 볼수록 이뻤기 때문이다.
허나, 나는 아직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 자체를 나눠보지 못한 처지였다.
천하의 쑥맥인 탓이었다.
< 시작 5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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