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8 >
절간의 선방에서 세월아 네월아하며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노태유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해외여행과 해외투자 자유화를 선언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시민들은 구청에서 여권만 만들면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닐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사업가들 역시 해외에 자유로운 투자가 가능해졌습니다. 중략...
노태유 대통령은 생각 외로 쓸만한 사람이었다.
신도시 백만호 건설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해외여행 욕구와 해외투자를 충족시키는 혁신적인 정책을 연일 펼치고 있었다.
확실히 전두한 보다 백배 천배 나은 양반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어마어마한 잭팟을 터트린 것도 한몫했다.
분당 지역의 땅값은 하늘 높을줄 모르고 폭등에 폭등을 거듭했다.
살사람은 산더미 처럼 많은 반면 팔려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하루에도 서너배씩 폭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슬슬 땅을 처분해야할 시기였다.
정부에서 분당 지역의 토지거래를 제한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뉴스에서 접한 탓이었다.
토지거래 규제는 토지 강제수용의 전조 현상이었다.
국가에 강제로 토지를 수용 당한다면 시세에 한참 못미치는 가격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금 덜 먹더라도 안전하게 팔아먹는게 최선이었다.
마음을 먹자마자 주지스님의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주지스님에게 공손히 말했다.
"전화를 좀 써도 될까요?"
그러자 주지스님이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시주님."
"고맙습니다. 스님."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분당에 있는 떡방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차례 가자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이사장이 웬 일로 전화를 다하셨을까?
내 속을 빤히 알면서도 하는 말이었다.
-요즘 평당 시세가 얼마나 하죠?
-평지나 산야 지역 할거없이 부르는게 값이지. 당연한걸 뭐하러 물어.
-그럼 내가 보유한 땅들을 평당 40만원 선으로 최단 시일 안에 팔아주십시오.
-염려말라구. 땅을 사겠다는 인간들이 물밀듯이 분당으로 몰려오고 있으니까.
-그럼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주지 스님에게 공손히 합장을 취했다.
일주일 후.
떡방에 들어가자 여러명의 사람들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들은 내가 보유한 땅을 매입하려는 큰손들이었다.
떡방 사장의 소개로 그들과 악수를 교환 한 뒤 토지매매 다운계약서를 차례로 작성했다.
다운 계약은 실제 매각한 가격 보다 적은 액수로 매각했다고 거래가액을 축소하는 계약이었다.
토지거래 세금을 절세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들은 큰손 답게 절반은 수표로 나머지 절반은 양도성 예금증서로 토지대금을 한방에 완납했다.
모든 거래를 끝내자 테이블 위에 고액 수표와 양도성 예금증서가 수북히 쌓였다.
210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거액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그때, 떡방 사장의 감탄성이 들려왔다.
"와....! 우리 이사장이 드디어 재벌이 되었구나. 축하한다. 이사장. 하하...!"
그는 사람좋은 미소를 얼굴 가득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나를 향해 은근한 눈빛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한푼이라도 더 복비를 많이 봤기 위해 애를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흥분대는 마음을 한켠에 밀어넣은 채 007가방에 수표와 예금증서를 꽉꽉 우겨넣었다.
복비 조로 1억원 짜리 수표를 통크게 내밀자 떡방 사장이 좋아죽는 얼굴로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며 나를 왕 처럼 떠받들었다.
떡방을 나오자마자 시중은행으로 곧장 직진했다.
흥분대는 마음은 잠시였다.
2천억을 효과적으로 굴리기 위해서는 차명으로 최소 3년 이상의 정기예금 상품에 가입하는게 최선이었다.
은행에 들어가자마자 담당 행원에게 내 용건을 솔직하게 말했다.
"백억대의 정기예금에 가입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그리 말하며 007 가방에서 1백억 상당의 양도성 예금증서를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은행원이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귀빈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행원을 따라서 위층에 있는 귀빈실로 들어갔다.
귀빈실에서 커피와 다과를 즐길 무렵 지점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역시 공손한 태도로 나를 떠받들었다.
"익명으로 3백억 내외의 정기예금에 가입하고 싶은데..."
말끝을 흐리자 점장이 더욱 공손해진 얼굴로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가능하십니다. 사장님."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새파랗게 어린 나를 상전 처럼 대했다.
자본주의는 누가 뭐래도 돈이 왕이다. 인정.
"이자율도 알려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정기예금은 기간이 길수록 연평균 이자가 늘어납니다.
"최소 5년 이상 묵힐 생각이니까 그걸 기준으로 이자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점장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5년 이상 정기예금을 들어주신다면 연평균 12프로에 달하는 이자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백억을 입금하면 5년 후에 160억을 돌려준다는 의미였다.
나름 쏠쏠한 이자였다.
마음같아서는 2천억을 모조리 정기예금에 쏟아붓고 싶었지만, 그건 안될 일이었다.
한 은행에 너무 많은 돈을 몰아넣으면 뒤탈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탓으로 일단 6백억만 정기예금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6백억을 드릴테니까 5년 만기 정기예금 상품에 가입시켜 주십시오."
그러자 점장이 감격한 얼굴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변을 토해냈다.
"성심을 다해서 사장님의 귀중한 자금을 불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날, 국면은행 강남지점에서 6백억짜리 5년 만기 정기예금에 가입했다.
며칠 후, 총 2천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3개 은행의 장기 정기예금 상품에 분산 은닉했다.
나머지 1백억은 토지거래세 납부를 대비하기 위해 일반 예금으로 은행에 예치했다.
***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5억원에 달하는 쏠쏠한 자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생각해서 부자들이 많이 사는 압구정 인근의 아파트를 매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떡방에 들어가자 나이지긋한 아저씨가 나를 반겼다.
그에게 곧바로 내 용건을 밝혔다.
"압구정 아파트를 매입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떡방 아저씨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젊으신 분이 사업을 크게 하시나 봅니다."
"조금 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세를 말씀해 주시죠."
"아시다시피 압구정 아파트는 정치인, 고위 공무원, 의사, 교수, 사업가 들이 몰려 사는 곳이라 평당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체 얼마길래 그리 뜸을 들이시는거죠?"
"평당 아무리 못해도 5백만원은 주셔야 할 겁니다."
30평을 기준으로 한다면 1억 5천만원 내외라는 얘기였다.
강북 아파트 보다 평당 가격이 3배 이상 높았다.
"게다가 압구정 아파트는 거의 모두 대형 평수로 구성된 탓에 50평대 부터 시작합니다."
까짓거 이왕이면 제일 넓은 평수로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백평대도 있는 건가요?"
"당연히 있습니다."
"지금 매물이 나왔나요."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떡방 주인은 그리 말하며 매매장부를 부산하게 뒤적거렸다.
그러기를 얼마후 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급매로 매물이 나왔네요."
"가격이 얼마죠?"
"주인이 4억 5천만원에 집을 내놨습니다."
괜찮은 가격이었다.
예전이라면 꿈도 못꿀 돈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4억 5천만원은 그리 큰 돈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볼수 있을 까요?"
"집주인에게 연락을 먼저 해보고, 알려드리죠."
떡방 사장이 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나는 그날,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1백평에 육박하는 압구정 아파트를 4억 5천만원에 매입했다.
일주일 후.
기존의 집주인이 이사가자마자 압구정 아파트로 거처를 이전했다.
백여평에 달해서 그런지 거실이 축구장 처럼 넓게 느껴졌다.
게다가 거실바닥은 이태리제 천연 대리석이었다.
그런 탓인지 서늘한 한기가 발바닥에 전해져왔다.
전주인이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집안 곳곳에 고급스런 취향의 인테리어 소품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특히 욕실이 끝내줬다.
유럽에서 공수해온 고풍스런 욕조와 타일 등이 격조높은 품격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었다.
허나, 내가 가장 감탄한 건 한강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탁월한 조망권이었다.
탑층에 위치해서 그런지 탁트인 전망이 그야말로 베리굿이었다.
거실 한켠에 자리한 라운지 테이블로 다가가자 전주인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양주가 눈에 들어왔다.
양주 진열장 옆에는 냉장고가 놓여져 있었다.
냉장고의 냉동칸을 열자 얼음이 보였다.
술잔에 양주를 붓고 얼음을 동동 띄운 뒤 시원하게 원샷하자 이 세상을 모두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누구말대로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2천억원에 달하는 정기예금이 있어서 그런지 밥을 안먹어도 배가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평소 소원대로 넓직한 고급 아파트를 수중에 넣자 그야말로 기분이 째지도록 좋았다.
압구정 고급 아파트에서 망중한을 오롯이 즐기며 영문학과 기말 시험에 착실히 대비했다.
***
영문학 기말시험을 치루자마자 캠퍼스 북쪽에 위치한 경영학 건물로 부리나케 내달렸다.
경영학 강의실에 들어간 뒤 불문곡직하고 맨 앞자리에 착석했다.
교수님의 명강의를 한자도 빼놓지 않고 세이경청하기 위함이었다.
경영학 교수님은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열변을 쏟아냈다.
-오늘은 페이퍼 컴퍼니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강의를 진행하겠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강의에 집중하도록.
-전세계의 비지니스맨들은 세금을 절세하거나 탈루하기 위해 조세회피지역에서 페이퍼 컴퍼니를 익명으로 만든다.
-그들은 갖가지 명목으로, 페이퍼 컴퍼니에 역마진 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페이퍼 컴퍼니 계좌에 돈이 쌓이도록 만든다.
-역마진 거래란 말그대로 회사가 손해보는 거래를 통칭하는 단어다.
-이런 역마진 거래 방식으로 페이퍼 컴퍼니를 살찌우더라도 법적으로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 합법적인 세금탈루라고 할수 있다.
-국내의 잘나가는 기업가들도 암암리에 조세회피제도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 조세를 포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거래가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탓에 관계당국은 거의 손을 놓은 채 모르쇠로 일관하는게 현실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나중에 사업을 하게 되면 페이퍼 컴퍼니를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수님의 명강의였다.
교수님 강의의 요점은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서 자본을 해외로 빼돌리는 방법이었다.
그는 역마진이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을 쉽게 설명했다.
조세회피지역에 가짜 명품 의류와 시계, 보석등을 수출하는 회사를 익명으로 만든 뒤, 국내에 설립한 수입회사를 통해 시세 보다 수십 수백배 이상의 가격으로 가짜 명품을 들여온다면 아주 쉽게 해외로 재산을 밀반출 할수 있었다.
의외로 간단한 방법을 이용해서 합법적으로 페이퍼 컴퍼니 계좌에 돈을 몰아넣을수 있었다.
< 시작 8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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