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12 >
아줌마가 차려준 맛깔나는 한우 소갈비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한국 증시가 사상처음으로 코스피 1000 포인트 고지를 돌파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수년간 이어온 주식시장 활황이 앞으로도 오랜 기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중략...
입맛이 썼다.
주식으로 떼돈을 번 인간들이 많았던 탓이다.
반면 나는 정기예금 이자에 안주한 채 세월아 네월아하고 있었다.
바보같은 짓거리였다.
한국 경제는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등 이른바 ‘3저(低) 호황’에 힘입은 탓에 연평균 20프로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구가하고 있었다.
주식시장이 폭발하는게 당연지사였다.
그런 뻔한 이치 조차 제대로 캐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주식투자에 나서야 할거 같았다.
그러나 내 수중에는 돈이 별로 없었다.
고작해야 30억 정도가 전부였다.
그 정도 자금으로는 언발에 오줌누는 수준이었다.
최소 3백억 이상의 자금이 필요했다.
천상 정기예금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게 최선이었다.
내 목표는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였다.
지금 현재 가장 잘나가는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도플갱어의 예언 대신 내 의지대로 투자를 해보고 싶었다.
다음날.
오후 무렵, 국면은행 강남지점을 내방했다.
귀빈실로 들어가자 지점장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사장님."
"그렇죠. 하하...!"
그에게 웃음을 내보이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커피를 입안에 한모금 들이킨 뒤 점장에게 내 용건을 밝혔다.
"정기예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용처를 알수 있을까요?"
솔직히 답했다.
"주식투자를 해볼 생각입니다."
그러자 점장이 난색을 표명했다.
"그런 사유로는 대출이 힘드십니다. 차라리 그거보다는 부동산 개발 명목으로 대출을 받으시죠?"
"부동산 개발이요?"
"네. 원래 다들 그런 식으로 대출을 받습니다. 그래야 위에서 대출허가가 떨어지거든요."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럼 부동산 개발 명목으로 대출을 신청할테니 알아서 잘 봐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담보가 이렇게 확실한데. 하하..."
이제 세부사항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대출 한도액수가 얼만가요?"
"사장님 처럼 담보물건이 확실한 경우 90프로 수준까지 대출이 가능합니다."
국면은행에 예치한 5년 만기 정기예금은 6백억이었다.
6백억의 9할은 540억이다.
"540억까지 대출이 가능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대출 이자도 말해주십시오."
"연이율 14프로 선까지 맞춰드리겠습니다. 3년 거치 후, 원금과 이자를 내는 식으로 짜드리죠."
"그럼 3년 까지는 이자만 내면 되는건가요?"
"네. 사장님."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 당장 대출서류를 준비해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나는 그날, 국면은행에 예치한 6백억 상당의 정기예금을 담보로 총 540억원에 달하는 대출금을 신청했다.
일주일 후, 국면은행에 새로 개설한 계좌로 540억원이 입금됐다.
***
학교를 파하자마자 여의도에 있는 대선증권으로 넘어갔다.
증권계좌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객장에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주식 시황판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주식 투자자들이 내뿜는 열기였다.
그들은 홀린 듯한 얼굴로 주가에 일희일비했다.
접신을 한 무당같았다.
대충 객장 분위기를 파악한 뒤 비어있는 창구로 다가갔다.
창구 직원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에게 내 용건을 말했다.
"증권계좌를 트고 싶어서 왔습니다."
"주민증을 가지고 오셨나요?"
"가명으로 가입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가능은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습니다. 본인 확인이 제대로 안될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가요?"
"네. 그래서 억울하게 생돈을 떼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출처가 확실한 자금이라면, 실명으로 계좌를 만드시는게 좋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더구나 내가 투자하려는 자금은 출처가 확실했다.
가명으로 계좌를 틀 필요가 없었다.
지갑에서 주민증을 꺼내서 증권사 직원에게 건넸다.
다음날.
대선증권에 개설한 본인 명의 계좌로 540억을 송금한 뒤 여의도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증권사 직원은 내 계좌에 들어있는 거액에 할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저그런 개미 투자자로 생각했다가 한방 먹은 눈치였다.
"이렇게 많은 자금을 어디에 투자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가 공손히 물었다.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 주식을 반반씩 매집해 주세요."
증권사 영맨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건설주와 제약주가 뜨고 있는데 그곳에도 투자를 해보시죠."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한대로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 주식을 반반씩 매집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주식을 매입하면 부동산 처럼 서류가 오는건가요?"
그러자 영맨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증권사 전산망에 기록이 남기 때문에 증권서류가 꼭 필요한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원하신다면 유가증권 서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모든게 확실한게 좋았다.
"그럼 증권서류를 찾으러 올테니 준비해 주십시오."
"네. 사장님."
다음날.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한 채 두장의 유가증권 서류에 시선을 집중했다.
시가 540억에 상당하는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의 유가증권이었다.
밥을 안먹어도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 두장의 서류가 540억에 육박하는 것이다.
이 녀석들의 가치는 나날이 높아질 것이 틀림없었다.
삼송전자의 메모리 반도체와 현도자동차의 승용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효자상품이었다.
나는 두 기업의 성공을 확신했다.
두 기업의 앞날에 탄탄대로가 놓여진 탓이었다.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어제끼며 동기녀석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넣었다.
오늘 같은 날은 코가 삐뚫어지도록 술판을 즐기는게 진리였다.
동기들을 대동한 채 값싼 동동주 집으로 직행했다.
우리는 파전을 안주삼아 동동주를 물 처럼 들이켰다.
그러기를 문득 동기 녀석 중의 하나가 기분 나쁜 소식을 전해왔다.
"수정이 그년이 졸업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린데."
"남자가 누군데?"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하더라."
술맛이 뚝 떨어지는 소문이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정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형 먼저 일어나는거야? 오늘 술값은 형이 내야지."
녀석은 술값 걱정이 먼저였다.
"알았다. 쨔샤. 어디 안도망간다."
그리 말하며 맛대가리 없는 동동주를 미친듯이 들이부었다.
그날 이후, 영문학과 동기 여학우들의 결혼 소문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졸업이 코앞에 닥치자 너도나도 마음맞는 남자랑 식을 올리는 모양새였다.
***
국가 기간통신망을 관리하는 한경통신의 이동통신부문이 선정그룹에 넘어갔다.
그런 탓으로 야당과 시민사회 단체는 노태유 정권을 연일 맹비난했다.
사돈기업인 선정그룹에 국가의 소중한 통신자산을 헐값에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반면 선정그룹 계열사의 주가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날마다 신고가 행진을 기록했다.
당연히 내 관심은 SC 텔레콤에 모아졌다.
한경통신의 이동통신부문을 하루아침에 꿀꺽 삼킨 탓이었다.
결국 은행에서 거액의 대출을 다시 한번 받기로 마음먹었다.
SC 텔레콤의 주식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신영은행 압구정 지점을 내방했다.
이 은행에는 익명으로 예치한 700억 상당의 정기예금이 있었다.
나는 정기예금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을 생각이었다.
신영은행도 국면은행과 대동소이한 조건으로 나에게 대출을 해주기로 확약했다.
담보물건이 확실한 탓에 대출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며칠 후, 630억 상당의 대출금이 국면은행 계좌에 입금되자마자 대선증권의 여의도 객장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증권사 영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SC 텔레콤의 주식을 630억 가량 매집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너무 무리하시는거 아닙니까?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시려고..."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후 뻔한 레파토리를 읇었다.
"저번에 말한대로 건설주나 제약주, 금융주에 투자를 해보시죠."
"됐고요. 내가 말한대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제서야 녀석이 알아먹은 얼굴로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원하시는대로 SC 텔레콤의 주식을 매집하겠습니다."
***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의 주식은 꾸준히 우상향을 기록하고 있었다.
대출이자 보다 높은 수익률이었다.
그 무렵 SC 텔레콤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무선이통통신 휴대전화를 출시했다.
그들은 모토롤라사의 벽돌폰을 기반으로 전국에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당연히 나는 누구보다 먼저 거금 250만원을 주고 벽돌폰을 구입했다.
차안에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통화품질은 내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았다.
아직 유선전화기 보다는 못했지만 그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차차 해소될 것으로 파악했다.
나는 SC 텔레콤의 무선전화 서비스에 내심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당연히 주가 역시 폭등할 것으로 예상했다.
얼마후, 내 예상대로 SC 텔레콤의 주가가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무선이동통신 서비스에 전국민이 열광한 탓이었다.
< 시작 1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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