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유그룹 1 >
1990 년의 희망찬 새해가 밝아왔다.
신년 새해를 자축하기 위해 조수민을 대동한 채 발리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그림 처럼 아름다운 리조트에서 격정적인 정사를 탐닉하며 뜨거운 정념을 미친듯이 불살랐다.
***
드디어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시원섭섭한 심경이었다.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준 학교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정보를 취득했고, 그것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여러모로 고마운 학교였다.
졸업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수민을 대동한 채 힐튼 호텔 스위트룸을 내방했다.
그곳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격렬한 정사를 만끽한 뒤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그러기를 문득 그녀의 입에서 뚱딴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자기야. 내가 하우스를 해볼 생각인데 돈 좀 빌려줄래?"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려고 그래?"
"당연히 돈이 되니까 그러지."
"아서라. 사람은 합법적인 일을 해야 뒷탈이 없는거다."
"누가 그걸 몰라. 그렇지만 하우스는 정말 제대로 운영하면 큰 돈이 된다고."
그녀는 하우스에 환장병이 걸린 모양새였다.
"미안하지만 그런 일에는 돈을 빌려주기 싫어."
"자기야. 정말 왜, 그래?"
그녀가 심통이 단단히 난 얼굴로 나를 쏘아봤다.
"불법적인 일에는 관심없다고. 몇번을 말해야 하냐!"
허나, 그녀는 하우스를 끝까지 단념하지 않았다.
"제발! 이번 한번만 도와주라. 부탁이야. 자기야."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그녀가 아무리 사랑스럽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신경쓰기 싫으니까 잠이나 자자."
그리 말하며 두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그날 이후, 수민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내 인생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
지난 10개월 동안 집구석에서 빈둥거리며 세월아 네월아했다.
할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라도 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남자는 특히 그렇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유학도 생각해 봤지만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최선은 그럴듯한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사업을 할 시점이 아니었다.
이렇다할 투자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기업에 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름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다음날 부터, 연세대학교를 발바닥에 땀나도록 종횡무진하며 취업정보 취득에 매진했다.
한달 후.
학교를 나오자마자 광화문에 위치한 교보문고로 직행했다.
교보문고에 들어가자 학생들과 시민들이 한데 어우러진 채 신간 서적과 잡지, 만화책 등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독서열기에 내심 높은 점수를 부여하며 신간 서적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간서적 코너에 들어가자 베스트셀러 서적들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은 대유그룹 김유중 회장의 자서전에 절로 모아졌다.
자서전 제목이 매우 인상깊었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김유중 회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입지전적인 기업인이었다.
단돈 1백만원으로 회사를 창업한 뒤 대한민국 재계서열 3위권의 대유그룹을 일구어낸 장본인이었다.
곧바로 그의 자서전에 손을 뻗었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김유중 회장의 자서전을 가방에 쑤셔넣은 뒤 종로 3가 역에서 지하철 3호선에 몸을 실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김유중의 자서전을 쉼없이 탐독했다.
김유중은 M&A의 황제였다.
그는 거의 모든 계열사를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인수합병한 남자였다.
박정후와 전두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였다.
그렇지만 그의 과감한 인수합병 전략은 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알토란 같은 쓸만한 기업들만 인수했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다니는 로얄 프린스도 대유자동차에서 생산한 차량이었다.
잔고장 없이 잘 굴러가는 튼튼한 차였다.
그런 사실이 뇌리를 스치자 대유그룹에 극호감을 느꼈다.
한번쯤 그곳에서 일해봐도 좋을거 같았다.
얼마 뒤면 1991년의 새해가 밝아올 시점이었다.
봄 시즌에 대대적인 신입사원 공채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날 이후,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신입사원 공채 시험에 대비했다.
***
간만에 대선증권의 여의도 증권사를 내방했다.
객장 의자에 앉은 채 주가 현황판에 시선을 집중했다.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 SC 텔레콤은 꾸준히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내 주식가치는 거의 2100억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1200억을 투자했으니까, 대략 70퍼센트 내외의 수익률이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확실히 주식이란 놈은 우량주 중심으로 장기투자가 정답이었다.
***
1991년의 새해가 밝아왔다.
지난 1년 동안 집구석에서 펑펑 놀아서 그런지 시간이 쏘아진 화살 처럼 빠르게 흘러가는거 같았다.
게으른 내 삶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대유그룹 신입사원 공채시험에 최선을 다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를 할 무렵 뜻 밖에도 김정문과 오태석이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의 손에는 각종 법학관련 서적이 들려있었다.
꼴을 보니 사시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놈들을 고즈넉한 벤치로 이끌었다.
팔자에 안맞는 헛지랄을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주제에 안맞게 무슨 고시 공부냐?"
내 힐난에 태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샐러리맨 생활이 지긋지긋 하더라고."
"그렇다고 잘다니던 회사를 왜, 때려쳐."
"신경 끄셔. 어차피 내 인생이니까."
태석은 그리 말하며 도서관으로 들어가버렸다.
"너는 왜 사시를 공부하는거야?"
내 물음에 문정이 자신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한번 해보는거지. 뭐."
"미친놈아. 고시 공부를 아무나 하는줄 아냐. 자신 없으면 시작도 하지마."
"알았으니까 훈계는 그만하라고. 그럼 나중에 보자."
문정 역시 내 충고는 필요없다는 태도를 드러내며 도서관으로 휑하니 들어가버렸다.
나이 많은 동기형을, 길가에 나다니는 똥개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새였다.
우라질 놈들이었다.
두달 후.
대유그룹의 신입사원 공채시험이 열리는 시내 고등학교를 내방했다.
수학은 자신 없었지만 영어와 국어, 역사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탓에 합격을 자신했다.
예상대로 수학문제는 별로 나오지 않았다.
대다수 영어 문제가 많이 나왔다.
특히 회화 쪽 비중이 매우 높았다.
세계경영을 표방하는 그룹답게 영어 능력자를 우대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원하던 바였다.
시험은 생각외로 쉬웠다.
특히 영어와 회화 비중이 높았던 탓에 고득점을 자신했다.
집에서 가채점을 해본 결과 최상위권 성적을 기록했음을 알게됐다.
2주일 후.
아줌마가 차려준 정갈한 한식으로 배를 채울 무렵 집안의 전화기가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전화를 받자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태수씨는 우수한 성적으로 신입사원 공채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러니 다음주 월요일에 펼쳐지는 면접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면접장이 어디죠?
-대유그룹 본사로 월요일 아침 10시까지 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주 월요일.
대유그룹 본사 빌딩으로 들어가자 수백여 명의 예비 신입사원들이 후문 출구에 모여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인솔자인 듯한 선배 사원이 우리들을 6열 종대로 줄세우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하 대강당에서 면접을 볼 에정이니까 저를 따라서 지하로 내려오십시오!"
선배 사원은 그리 말하며 우리를 지하 대강당으로 인솔했다.
지하 대강당 한켠의 대기실에서 2시간 정도 대기했을 무렵, 선배 사원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이태수씨 면접장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름표를 부랴부랴 왼쪽 가슴에 부착했다.
면접장 안에 들어가자 길다란 테이블을 배경삼아 3명의 면접관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의자에 착석하자 곧바로 면접이 진행됐다.
날카로운 인상의 면접관이 질문을 던졌다.
"검정고시 출신인가요?"
그의 물음에 솔직히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중학교를 자퇴한 이유가 뭐죠?"
"생활 형편상 어쩔수없이 자퇴를 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나요? 이를테면 학교폭력이나 그런거?"
"전혀 그런건 아닙니다."
직후 머리가 반쯤 벗겨진 면접관이 송곳같은 질문을 해왔다.
"이력서를 보니까, 압구정 현도 아파트에 자가로 거주하시는거 같은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는게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요."
선뜻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이력서에 내 거처를 너무 솔직히 표기한거 같았다.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뭇거리자 뿔테안경의 면접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태수씨의 시험성적이 매우 좋더군요. 거의 다섯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우수한 성적이에요. 특히 영어회화 실력이 발군인거 같은데, 영어는 어디서 배우셨나요?"
"회화 학원에서 남들보다 열심히 회화실력을 연마하는데 노력했습니다. 그 덕분에 현지 원어민 수준의 영어회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왔다고 자부합니다."
내 자화자찬에 면접관들이 헛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중얼거린 뒤 날카로운 인상의 면접관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학과 성적이 나쁜 이유가 뭔가요?"
"솔직히 저는 학과 공부 보다는 영어회화 실력을 연마하는데 매진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학과성적이 남들 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면접관들이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면접을 끝마치자마자 정문과 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만에 술을 폭풍흡입하기 위함이었다.
< 대유그룹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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