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15화 (128/200)

< 대유그룹 2 >

동네 헬스장에서 중량 스쿼트에 매진할 무렵 벽돌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벽돌폰을 귓가에 가져가자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태수씨는 대유그룹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그러니 다음주 금요일 오전 9시까지 대유그룹 본사 정문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천안 연수원으로 떠날 예정이니 여벌의 의류도 꼭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짤막한 안내멘트를 내뱉은 뒤, 내 질문도 받지 않고 제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씁쓸한 순간이었다.

내심 그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다음주 금요일.

여행가방에 여벌의 옷가지와 속옷, 칫솔, 치약 등을 꾸역꾸역 쑤셔넣은 뒤 대유그룹 본사가 있는 남대문 인근으로 부리나케 내달렸다.

대유그룹 본사 정문에 도착하자 이미 신입사원 연수생들이 거의 다 모인 상태였다.

그들과 함께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2시간 남짓이 지나자 천안에 위치한 연수원에 도착했다.

그날 부터, 군대 훈련소를 능가하는 4주간의 극기훈련에 돌입했다.

연수원에 입소한지 2주차가 지났을 무렵, 서너명의 여직원들이 병원에 실려갔다.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극기훈련에 동참한 탓이었다.

그녀들은 열외를 하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남자에 못지않은 강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 연일 오버액션을 취했다.

그 덕분에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는 처지로 전락했다.

뭐라 할말이 없었다. 사서 고생한 케이스였다.

여자 연수생들이 병원에 실려가자 연수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너무 심한 강도의 극기훈련이 부작용을 불러왔다.

그런 탓인지 그날은 모든 훈련을 중단한 채 연수생들에게 자유시간을 허락했다.

세안을 끝내고 방에 들어가자 연수원 동기들이 주전부리를 즐기며 이런저런 썰을 나누고 있었다.

침상에 드러누운 채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경청했다.

피부가 썩창인 동기 녀석이 썰을 풀고 있었다.

"대유그룹은 연대 라인이 꽉 잡고 있다고."

그러자 볼때기에 여드름이 한아름인 놈이 맞장구를 쳤다.

"김유중 회장부터 연대 상대 출신인데, 말 다한거지."

나름 괜찮게 생긴 동기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삼송그룹은 서울대 출신이 꽉잡고 있다며?"

그러자 평범하게 생긴 녀석이 말을 거들었다.

"삼송은 원래 서울대가 파워가 제일 쎄다고 하더만."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범생이 녀석이 질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도그룹은 고려대가 꽉 잡고 있데. 그래서 고려대 출신의 이명복이 최단 시간내에 임원이 된거래."

동기 녀석들은 아는게 많았다.

나름 쓸모가 많은 놈들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비슷한 탓으로 끼리끼리 잘뭉쳤다.

반면 나는 그들 보다 나이가 대여섯살 윗줄인 탓에 어울리기가 만만찮았다.

녀석들은 나이 많은 나를 부담스러워 했고, 나 역시 말이 안통하는 녀석들이 귀찮았다.

우리는 비록 한방을 쓰고 있었지만 물과 기름 처럼 쉬이 섞이지 못했다.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은 나이에 유난히 민감한 나라였다.

나이차가 나면 진정한 우정을 공유하는게 쉽지 않았다.

서로 서로 상대방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었다.

유교문화의 폐해같았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나는 언제나 외로운 영혼이었다.

간혹 여자들에게 위안을 받았지만 그때 뿐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쓸만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 친하게 지냈던 나이 어린 대학 동기들과 툭하면 술을 마셨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탓인지 언제나 공허한 기분이었다.

마음맞는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내 주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인간들이 전무했다.

거의 모두 자기 이익 챙기기에 바쁜 약삭빠른 인간들 뿐이었다.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한국인들의 병폐 같았다.

결론은 하나다.

한국인들은 유교문화와 황금만능주의에 찌들대로 찌든 문화 속에 살고있다.

오늘 따라 쓸데없는 망상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몸뚱이가 편해서 그렇다.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하층에 위치한 체력단련실로 들어가자 여러명의 연수원 동기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헬스광이었다.

헬스를 두시간 정도 즐긴 뒤 방으로 들어가자 동기들이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연일 이어진 강행군에 지친 모양이었다.

침상에 눕자 절로 눈이 감겼다.

연수원 생활 4주차에 접어들자 선배들이 입사희망 지원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a4 용지에 대유종합상사에 입사하고 싶다는 의중을 강력히 피력했다.

-저는 오래전 부터 대유종합상사에서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국제적인 비지니스맨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대유종합상사로 발령내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회사에 봉사하겠습니다.

대유종합상사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전세계 각지에서 매입한 뒤 비싼 값에 되파는 중계무역 전문회사였다.

대유그룹의 모태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유중은 대유종합상사를 기반으로 오늘날 대유그룹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대유종합상사에서 수출입 업무를 배우고 싶었다.

나중에 쓸모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입사지원서를 작성한 뒤 선배님에게 전달했다.

그는 내가 작성한 지원서를 대충 흝은 뒤 나직한 어조를 내뱉었다.

"종합상사는 경쟁이 엄청 치열해서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되면 좋고, 안되면 할수 없는거죠."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계시군요."

그가 감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름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지닌거 같았다.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하하..."

그말을 끝으로 배정된 방으로 올라갔다.

***

대유그룹 남대문 본사

인사실장 이종혁과 비서실장 박태종이 머리를 맞댄 채 신입사원들의 프로필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박태종 비서실장이 흡족한 얼굴로 이력서 한장을 들어올렸다.

"연대 출신에 필기시험도 최상위권이고, 영어 회화도 능통하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겠군."

박태종의 말에 이종혁 인사실장이 맞장구를 쳤다.

"선배님 말씀대로 쓸모가 많은 친구 같습니다."

"그럼 이놈은 내가 데려갈테니까 그런줄 알라고."

"선배님이 알아서 하십쇼. 헤헤..."

그들은 대유그룹의 성골인 연대라인이었다.

***

연수원을 퇴소하자마자 문정과 태석을 술자리에 불러들였다.

어차피 내가 사주는 술인지라 녀석들은 술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나 혼자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술집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친구 없는 외톨이로 낙인 찍힐까 저어한 탓에 할수없이 녀석들을 술자리에 불러냈다.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하며 새벽 5시까지 폭음을 즐겼다.

물론 이렇다할 말 따위는 우리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술이나 같이 마시는 관계였다.

술자리가 파하자 마음 한켠이 텅 빈거 같은 공허감에 휩싸였다.

아무런 의미 없는 술자리의 후유증이었다.

게다가 골도 지끈지끈 아파왔다.

당분간 술을 멀리해야 할거 같았다.

숙취가 보통이 아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해장국 집에 들렀다.

진한 설렁탕 국물을 섭취하기 위함이었다.

설렁탕을 들이키자 그제서야 살거 같았다.

나름 속이 풀린 모양이었다.

다음날.

아줌마가 차려준 얼큰한 북어국을 음미할 무렵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주 월요일 부터 대유그룹 본사 비서실로 출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유가 뭐죠?

-이태수씨는 본사 비서실로 발령을 받으셨어요.

여직원은 그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생뚱맞게 비서실로 발령을 받았다.

비록 원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당분간 그곳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주 월요일.

평범한 양복과 구두를 착용한 채 서류가방을 어깨에 메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대유그룹 본사는 교통이 혼잡하기로 소문난 남대문 인근에 위치했다.

더군다나 신입사원은 주차할 공간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불편했지만 남들 처럼 지하철로 출퇴근 할수 밖에 없었다.

본사 빌딩으로 들어가자 연수원 선배가 로비 한켠에서 신입사원들에게 출입증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나에게도 출입증을 건넸다.

"선배님. 비서실로 가려면 몇 층으로 가야합니까?"

그러자 그가 검지 손가락을 높이 들어올렸다.

"탑층으로 올라가면 될거에요."

회장 비서실이라 탑층에서 일하는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층으로 올라가자 층 전체가 비서동으로 꾸며져 있었다.

비서동의 맨 끝에는 육중한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이 회장실이었다. 척이면 착이다.

비서동에 우두커니 서 있자, 나 보다 일찍 출근한 여비서가 말을 걸어왔다.

"신입사원 인가요?"

"네. 신입사원 이태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지만 깍듯하게 선배님으로 호칭했다.

그녀의 출입증을 유심히 살피자 민유경이란 이름이 보였다.

반반한 외모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때, 일단의 남자 비서들이 장내에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주시하며 이런저런 질문을 내던졌다.

"나이가 어떻게 되죠?"

"33살입니다."

"생각 보다 나이가 많으시네요."

"어쩌다보니 그리 됐습니다."

"어디 학교 출신이신가요?"

"연대 영문과 출신입니다."

그러자 비서들이 그럴줄 알았다는 얼굴로 저 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과 출신이면 영어회화를 잘하시겠네요?"

"조금 합니다."

"사는 곳은 어디죠?"

솔직히 답했다.

어차피 이력서에 다 나와있는 탓에 구라를 쳐봤자 소용없었다.

"압구정 현도 아파트에 삽니다."

순간 비서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부러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집이 부잔가 보네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럼 전세로 거주하시는 건가요?"

이번에도 솔직히 답했다.

"전세는 아니고, 자가로 거주 중입니다."

그러자 비서들의 얼굴에 부러움과 질시하는 표정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들의 호구조사가 불을 뿜을 즈음 장년의 남자가 비서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보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태수 씨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잠시 나를 따라오세요."

남자는 그리 말하며 회장실 옆에 붙어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여비서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장님이에요. 그러니 어서 따라가 보세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비서실장이 들어간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대유그룹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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