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유그룹 5 >
사모님이 자유시간을 허락했다.
나는 평소에 사고 싶었던 고농도의 단백질 보충제를 구입하기 위해 맨해튼 인근의 보디빌더 용품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한국에는 쓸만한 단백질 보충제가 거의 없었다.
수입하는 것도 출처가 불분명한 가짜 투성이였다.
반면 맨해튼의 고급스런 보디빌더 용품점에는 세계에서 이름난 단백질 보충제가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다.
내 시선은 고순도의 단백질 보충제에 모아졌다.
물론 많이 섭취하면 부작용이 있지만, 적당량를 섭취했을 경우에는 근육이 엄청 잘붙는 순기능이 있었다.
문정을 능가하는 근육맨이 되고 싶었다.
나름 근육 욕심이 생긴 탓이었다.
값비싼 단백질 보충제를 눈에 보이는 족족 쇼핑백에 집어넣었다.
한국에서 두고두고 복용할 생각이었다.
***
늦은밤, 성북동에 대유증권 박성수 사장이 나타났다.
김유중 회장은 면전에 나타난 박성수에게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서실에 새로 들어온 이태수가 주식판의 슈퍼개미라는 소문이 사실인가?"
"대선증권 측에 확인한 결과 수천억대의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김유중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고아가 무슨 재주로 그런 큰돈을 모은건가?"
"이태수는 보통 친구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부동산 투기의 달인이라는 말입니다."
"점점 모를 소리만 하는군."
"그 친구는 어린 시절 부터 수중에 돈이 생기면 무조건 분당 지역의 땅을 사뒀습니다. 거의 광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박을 쳤습니다."
"땅투기로 번 돈을 주식에 올인한건가?"
"맞습니다. 우량주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투자종목이 뭐지?"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 sc 텔레콤입니다."
그러자 김회장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대유그룹 계열사 주식은 없구만."
"송구하지만 그런거 같습니다."
그는 박성수를 내보낸 뒤 창가에 드리워진 밤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김회장의 두눈에 짙은 탐욕이 스쳤다.
'돈도 재벌급으로 많고, 게다가 가족도 없으니까 데릴사윗감으로 안성맞춤이란 말이지.'
그는 태수를 내심 데릴사윗감으로 점찍었다.
'그저그런 재벌가 아들내미는 녀석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김회장은 태수가 마음에 들었다.
맨주먹으로 수천억대의 부를 일군 점에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자신의 지난 날을 보는듯 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 가득 끈적한 탐욕이 번져갔다.
며칠 후, 성북동
김회장은 뉴욕에서 돌아온 주선미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주선미의 입에서 쌀쌀맞은 어조가 흘러나왔다.
"사람 귀찮게 왜, 오라가라 하는거야!"
그녀가 언성을 높이자 김회장이 인상을 잔뜩 쓰며 맞받아쳤다.
"이년아. 남편이 부르면 재깍재깍 올 생각 부터 해야지. 여자가 어디서 말대꾸를 하는거냐!"
그들은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언쟁 부터 벌였다.
김회장은 억지로 화를 가라앉힌 뒤 두툼한 노란 봉투를 그녀의 발 밑에 내던졌다.
"이게 뭐야?"
"이태수의 신상자료니까 읽어봐."
그러자 주선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 이비서를 뭐하러 들쑤시는건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 자료를 읽어보라고. 지금 당장!"
김회장이 격한 어조를 내뱉자 주선미가 마지못한 얼굴로 봉투 안의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태수의 신상자료를 읽어내려가는 선미의 두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이 자료가 정말이니?"
"증권사에서 철저히 조사한 거니까 믿어도 된다. 너는 그걸 보고, 느끼는거 없냐?"
김회장이 넌지시 묻자 선미가 탐욕에 물든 얼굴로 화답했다.
"우리 유라 남편감으로 딱이네. 돈도 엄청 많고, 더구나 가족도 없으니까. 호호...!"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거리는 사이였지만, 오늘 만큼은 죽이 잘맞았다.
"그러니까 니년이 알아서 둘이 자연스럽게 엮이게 분위기를 조성해 보라고."
"염려마.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당신은 뒤로 빠지라구."
선미는 그리 말하며 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침실에서 뉴욕에 있는 딸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유라야. 뭐하니?
-여기는 점심때라 밥먹고 있는데.
-학교니?
-아니. 찬성 오빠 집.
선미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자식이랑 헤어지라고 했잖아.
-언제는 찬성 오빠랑 사귀라고 했으면서. 이제와서 왜, 말이 바뀌는거야?
-찬성이 보다 더 좋은 남자가 있으니까 그렇지.
-싫어. 관신없다구.
-암튼 이번 여름방학에 한국에 들어와. 소개해줄 남자가 있으니까.
-대체, 그 남자가 누구길래 이 난리야?
-너도 며칠 전에 본 남자.
-그 사람이 누군데?
-이비서.
-엄마.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미쳤다고 별볼일 없는 비서 따위랑 사귈거 같아.
-이년아. 이비서 재산이 얼만지나 알고 그딴 소리를 하는거니.
-비서 따위가 돈이 있어봤자지.
-이비서 재산이 자그만치 3천억이 넘는다구!
수화기에서 갑자기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기를 얼마후 유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정말이야?
-확실해. 대유증권에서 엄청 자세히 조사한거야.
-와! 그런 인간이 뭐가 아쉬워서 비서로 일하는거야?
-겸사겸사 샐러리맨 생활을 해보려는 거겠지. 하여튼 이비서랑 만나봐.
-이비서가 돈 많은건 좋은데, 그 남자는 내 스탈이 아냐.
-이비서가 뭐가 어때서 그러니. 몸도 근육질이고 남자답잖아.
-그러면 월 하냐고. 얼굴이 별론데.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거니. 남자는 돈이 많은게 장땡이라구. 이년아.
-찬성 오빠 집도 재벌이야. 돈 많다고.
-찬성이는 막내라 지 형들한테 모든 재산을 뺏길 운명이라고. 그러니 엄마 말대로 이비서나 만나봐
-싫어. 그럼 끊을게. 엄마.
유라는 그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선미는 그후로도 여러차례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날.
김회장은 자신이 직접 딸과 태수를 엮기로 작심했다.
주선미를 믿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한번 결심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끝까지 밀어부치는 성미였다.
***
나는 주말임에도 동네 헬스장에서 살다시피하며 몸만들기에 열중했다.
뉴욕에서 사온 단백질 보충제를 폭풍흡입하며 중량 스쿼트에 매진했다.
그런 탓인지 온몸의 근육이 격렬한 통증을 호소했다.
근육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근육이 자리잡는 과정이었다.
찌릿한 극통이 기분좋은 감각으로 전환되려는 찰나, 의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벽돌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스쿼트를 중단한 채 전화를 받았다.
폰에서 차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성북동으로 들어오세요.
-오늘은 휴일 아닙니까?
-원래 비서는 휴일같은거 없는 겁니다. 그러니 1시간 안으로 성북동으로 오세요.
-1시간은 너무 촉박한데요. 지금 헬스장이라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다고요.
-그냥 오세요. 회장님이 찾으시니까.
빌어먹을 노릇이었다.
잘난 회장님이 웬 일로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결국 전화를 끊자마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성북동을 향해 부리나케 내달렸다.
김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수만여 권의 장서가 들어찬 서재로 들어갔다.
창가를 서성이며 잡지를 탐독하던 김회장이 나를 보자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구만. 김유중일세."
김회장은 그리 말하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대유그룹의 절대자가 일개 신입비서에게 먼저 손을 내민 탓이다.
그의 오른손을 두손으로 맞잡으며 공손히 화답했다.
"비서실에 발령받은 신입사원 이태수라고 합니다."
"인사는 이쯤하고, 차나 마시면서 대화를 좀 해보자고."
이해못할 언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무 파격적인 대우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민유경 대리가 커피 두잔을 쟁반에 받쳐든 채 서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약간 놀란 얼굴로 나를 잠시 살피더니 테이블 위에 커피 두잔을 공손히 세팅한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뜨거운 커피를 입가에 한모금 들이킬 찰나 김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비서가 우리 회사에 입사한 이유를 알고 싶은데, 솔직히 말해줄수 있겠나?"
뭔가 분위기가 요상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김회장의 입에서 내심 우려하던 언사가 쏟아져나왔다.
"원래 비서실 직원들은 신원을 정밀 검증하지. 불의의 사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지. 이비서 역시 마찬가지로 정밀 검증을 했네. 그 결과 뜻 밖의 사실을 알게됐고."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자네가 수천억대의 주식을 보유중인 사실을 잘 알고 있네."
확실히 대기업이라 그런지 정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흠..."
내 입에서 절로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음을 나름 정돈한 뒤 김회장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뒷조사를 하신 겁니까?"
"아까도 말했다시피 비서실 직원은 누구나 정밀검증 절차를 밝게 되있네. 재산 내역 조사는 기본사항이라고 할수있지."
"제가 사표를 내던지는걸 원하시는 겁니까? 정 그렇다면 지금 당장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자 김회장이 내 팔을 재빨리 잡아챘다.
"젊은 친구라 그런지 성미가 급하군. 앉아서 차분하게 내 말을 먼저 들어보라고."
못이기는 척 자리에 주저앉자, 김회장이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뉴욕에서 내 딸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봤습니다. 대단한 미인이더군요."
그러자 김회장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길게 그려졌다.
"내 딸이 마음에 드는가?"
뉘앙스가 묘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뭐죠?"
"솔직히 말하지. 나는, 내 딸의 남편감으로 자네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다.
김회장은 자기 딸을 나에게 주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새였다.
"이비서도 봤다시피 내 딸은 미스코리아 뺨칠 정도로 미모가 대단하네."
"그렇지만 초면에 이런 말씀을 하시니 솔직히 말해서 부담스러운 심경입니다."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지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나. 쇠뿔도 단김에 빼는게 진리라는 말이!"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압박했다.
"나는 이비서가 맨손으로 수천억대의 부를 축적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네. 재벌가 쭉정이 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
김회장은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칭찬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워낙에 경황이 없어서 뭐라 말씀드리기가 뭐하군요."
"그러니 집에서 곰곰히 생각해보게."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성북동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날밤.
나는 한강변을 산책하며 김회장의 제안을 심사숙고했다.
그의 딸인 김유라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대한민국 재계서열 3위권인 대유그룹의 금지옥엽이었다.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김회장은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는 내 재력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를 재벌가 아들내미 보다 높이 평가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김유라 만한 신붓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나도 이제 그럴듯한 가정을 꾸릴 싯점이었다.
언제까지 이 세상을 혼자 살수는 없었다.
도플갱어의 신신당부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도 내 처지를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김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 대유그룹 5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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