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실명제 >
서울시내를 리무진 차량이 장중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김유중 회장의 옆자리에 동승한 박태종 비서실장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오후 2시에 둥우그룹 강현욱 회장과 점심을 함께하신 뒤 미국 대사관에서 열리는 저녁 만찬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김유중은 담배 연기를 자욱히 말아올리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요즘 동우그룹의 자금 사정이 어때?"
"리비아에서 수주한 대규모 수목공사 때문에 뒷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공사대금이 밀린건가?"
"공사대금 자체를 떼인거 같다는 소문이 증권가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에서 대출금을 상환하라고 연일 독촉하는 모양입니다."
"동우그룹의 채무가 어느 정도지?"
"10조원 언저리로 알려졌습니다."
김회장의 입가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몸집에 비해서 과다한 채무를 지고 있구만."
"금년을 넘기지 못하고 파산할거란 소문 마저 시중에 돌고 있습니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고."
"네. 회장님."
리무진 차량이 쉐라톤 워커힐 호텔 앞에 정차했다.
김회장은 최상층에 위치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푸아그라와 고급 포도주를 음미하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동우그릅 강현욱 회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강현욱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라양과 찬성이 놈을 결혼시키는게 어떻습니까? 둘이 좋아하는 눈치던데...?"
김유중의 얼굴에 탐탁치않은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말씀은 고마우나 우리 유라는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라, 결혼을 시키기에는 시기상조로 보이는군요."
그러자 강현욱이 애가 타는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여자 나이 22살이면 결혼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에요. 그러니 유라양의 혼인을 허락해 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유라를 혼인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김유중은 그리 말하며 오롯이 식사에 열중할 뿐이었다.
강현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줄담배를 말아올렸다.
그는 김유중의 잘난체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나, 강현욱은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회사의 자금 사정이 심각한 탓이었다.
그는 유라와 막내 아들의 결혼에 올인했다.
대유그룹의 지원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유중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식사를 끝내자마자 장내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
3일째 무단결근했다.
비서실에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수천억대의 자산가라는 사실이 알려진 마당에 비서 노릇을 하는게 말이 안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내가 사는 압구정 아파트에 김유중 회장이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딸내미의 혼사에 애가 타는 모양새였다.
우리는 양주를 들이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자네가 내 딸의 남편감으로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리 생각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회장님,"
그리 화답하자 김회장이 자기 멋대로 진도를 나갔다.
"조만간 딸내미를 한국으로 데려올테니까 일단 한번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게 어떻겠나?"
김회장은 성격이 화급했다.
나와 비슷한 성정이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도저히 사양할수 없겠군요."
그제서야 김회장이 활짝 펴진 얼굴로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우하하하...."
***
뉴욕 맨해튼 고층 아파트에 대유자동차 북미 지사장인 유현민이 나타났다.
그는 김유중의 금지옥엽인 김유라에게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일주일 내로 한국에 들어오시라는 회장님의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싫다구요. 그러니까 이만 나가세요!"
김유라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성난 눈빛을 내비쳤다.
허나, 유현민은 냉정한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명을 어기신다면 아가씨의 생활비를 동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드까지 회수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유라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회장님의 성미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얌전히 한국으로 들어가십시오."
유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말고사가 끝나는대로 한국에 들어간다고 아빠한테 전하세요."
"그 약속을 꼭 지키시길 바랍니다."
유지시장은 그리 말하며 장내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
맞선이 코앞에 들이닥쳤다.
근사한 외제차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눈부시게 이쁜 김유라와 오붓한 드라이브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강남에 위치한 벤츠 매장에 들어가자 자동차 영맨이 간사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마음에 드는 차량이 있으신가요?"
내 시선은 매장 중앙에 전시된 삐까번쩍한 벤츠에 모아졌다.
중후한 외관이 마음에 들었다.
전시차량을 손짓하자 영맨이 친절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벤츠사에서 새로이 출시한 벤츠 s클래스 모델입니다. 사장님의 품격에 잘 어울리실 겁니다."
영맨은 그리 화답하며 내가 걸친 아르마니 수트와 손목에 매달린 파텍 필립의 명품시계를 홀린듯 쳐다봤다.
녀석은 내 재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첫눈에 알아챘다.
그런 탓인지 나를 상전 처럼 떠받들었다.
"저 차가 마음에 드는데, 오늘 곧바로 인도 받을수 있을까요?"
그러자 영맨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못해도 한달 정도는 기다리셔야 할겁니다. 대기자들이 많은 탓에..."
영맨이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현금 일시불로 구입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자 녀석이 알아먹은 얼굴로 화답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책임지고 차를 오늘 중으로 뽑아드리겠습니다. 헤헤..."
매장 안쪽의 사무실에서 벤츠 s클래스의 차량 가격을 수표로 지급했다.
1시간 뒤, 영맨은 매장에 전시된 s 클래스를 나에게 인도했다.
속전속결이었다.
다음날.
아르마니 수트와 파텍 필립 시계로 중무장한 채 벤츠 s 클래스를 약속장소인 웨스틴 조선호텔로 몰아갔다.
호텔 정문에 도착하자 벨보이가 정중한 자세로 운전석을 열어주었다.
벨보이에게 차키를 내던진 후 1층에 있는 커피샾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뒤 나홀로 커피를 두잔 정도 들이킬 무렵, 눈부시게 아름다운 김유라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미니 원피스 차림이었다.
나올데 나오고 들어갈데 들어간 쭉쭉빵빵한 여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패션이었다.
김유라는 부티와 귀티가 공존하는 어여쁜 얼굴과 글래머스한 몸매를 일신에 구비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환장할 만한 외모였다.
의자를 뒤로 빼주자 그녀가 가볍게 목례를 취하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커피를 음미하며 본격적인 대화에 나섰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유라는 그리 말하며 앱두같은 입술 안으로 커피를 한모금 삼켰다.
문득 어색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입에서 적나라한 언사가 쏟아져나왔다.
"미안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오늘 이자리에 나온건 아빠의 강요 때문이었어요."
"음..."
내 입에서 절로 깊은 한숨이 토해졌다.
얼굴과 몸매, 집안까지 완벽한 그녀에겐 이미 짝이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쪽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평양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유라가 새초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저를 조롱하시는 건가요?"
"그 전에 일단 제 소개를 간략히 하겠습니다."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툭 쏘아부쳤다.
내 알바 아니었다.
"나는 맨손으로 3천억대 부를 일구어냈습니다. 재벌가 아들내미 중에 나 보다 돈이 많은 인간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자본주의 세상은 돈이 전부라고 할수 있죠. 유라씨 역시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거 아닙니까?"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만 저는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특히 남녀 사이에는."
유라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순진한 구석이 많았다.
"그리고 댁은 나이가 너무 많아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힐난했다.
"그렇지만 회장님은 그런 나를 유라씨의 배필로 점찍었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라는 내 질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돈이 억수로 많기 때문이죠."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라씨는 나중에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실 날이 반드시 올겁니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커피샵을 박차고 나왔다.
나 싫다는 년과 더 이상 마주한다는게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대유그룹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
성북동.
김유중 회장은 노발대발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김유라가 그의 명을 거역한 탓이었다.
"이런 우라질 년을 봤나! 오냐오냐 키웠더니 지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해!"
김유중은 고성을 내지르며 면전에 서 있는 유라의 얼굴에 연거푸 손찌검을 날렸다.
딱딱딱...!
유라의 왼쪽 뺨이 금새 벌겋게 달라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질끈 깨물며 악바리 처럼 외쳤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별볼일 없는 동우그룹 아들놈 따위는 내 안중에 없어!"
"찬성 오빠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는건데...!"
"이 개년아. 동우그룹은 조만간 파산할 운명이라고!"
순간 유라의 얼굴이 헬슥해졌다.
***
회사를 때려치자 나름 시원섭섭했다.
비서일이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그 무렵, 국면은행과 신영은행, 한일은행 측에서 5년 만기 정기예금의 만료일이 다가왔다는 연락을 해왔다.
나는 정기예금을 담보로 1200억대의 융자를 받은 상태였다.
정기예금과 이자를 지급받은 돈으로 대출 원금과 이자를 한방에 갚기로 마음먹었다.
며칠후 3개 은행 측에서 정기예금과 이자 등을 합해 총 3200억대의 돈을 국면은행에 개설한 계좌로 환급했다.
그중에서 1400억을 대출 원금과 이자조로 은행 측에 완납했다.
내 수중에는 1800억대의 현금과 3000억 내외의 주식이 있었다.
총합 4800억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투자처가 쉬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정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앞날을 차분히 설계하기로 마음먹었다.
***
92년의 희망찬 새해가 밝아왔다.
그런 탓일까? 새해벽두 부터 정치권에서 용의 혈투가 연일 펼쳐졌다.
민주화 투사 출신인 김영오는 당내 투쟁에서 승리하자마자 노태유 대통령에게 당내 경선을 3월 이내에 치룰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허나, 물태유로 유명한 노태유 대통령은 변변한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김영오에게 허무하게 무릎 끓었다.
그가 요구한 3월 경선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날 이후, 김영오는 자타가 공인하는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
대선증권 여의도 객장을 오랜만에 내방했다.
객장 의자에 착석한 채 주가 시황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애석하게도 삼송전자와 현도자동차, sc 텔레콤의 주가는 연일 횡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주가 상승의 동력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감이 좋지 않았다.
그때, 내 계좌를 전담하는 대선증권의 김명국 부장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장님."
"무슨 말이죠?"
"여기서는 좀 그렇고, 귀빈실에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그럽시다."
김부장은 4층에 있는 귀빈실로 나를 안내했다.
여직원이 내온 다과를 음미하며 김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기 대권이 확실시되는 민진당의 김영오가 혁신적인 공약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증권가에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그게 뭐죠?"
"지하 자금을 양성화 한다는 명분으로 금융실명제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울거 같습니다."
속이 뜨끔한 내용이었다.
한국은 지하자금의 천국이었다.
가명으로 금융권에서 얼마든지 계좌를 틀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에 문외한인 김영오가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환장한거 같습니다."
김부장의 말대로 금융실명제가 현실화 된다면 지하자금을 굴리던 전주들에게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 확실시 되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다면 지하자금에 의지하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등에게도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제 생각에는 대기업들도 무사하지 못할거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아는 대기업들도 지하자금에 의지하는게 현실이거든요."
"음..."
"코스피를 견인하는 우량주들이 맥없이 고꾸라지는 이유도 김영오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김부장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주식을 처분하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앞으로 상당기간 우량주들도 약보합을 면치 못할 겁니다. 게다가 김영오가 금융실명제까지 실시한다면 사장님에게 큰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 금융실명제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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