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크로 소프트 6 >
경영학 강의가 끝나자마자 법학대학원 건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버드 법학 교수님에게 자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프랭크 아서'라는 명패가 내걸린 사무실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뉴저지주의 고위 법관 출신이었다.
심호흡을 길게 내쉰 후, 육중한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그러자 안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선 채 흡연을 즐기는 장년 남자가 보였다.
그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내 소개를 했다.
"경영대학원에 재학중인 이태수라고 합니다. 교수님에게 여쭐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나에게 할말이 뭔가요?"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결혼 문제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라면 결혼 당사자들 간에 하는게 좋을텐데요."
프랭크 교수님은 그리 말하며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소파에 착석하자마자 내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는 재산이 조금 있는 편입니다. 그래선지 결혼을 독촉하는 여자가 내 재산을 탐하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이 씁쓸한 고소를 입가에 베어물며 나직한 언사를 흘려보냈다.
"피앙세가 tv나 영화에서 처럼 남편 재산을 강탈하려는 악녀로 보인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교수님."
"가족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겁니다."
"흐음..."
교수님은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말아올리며 뭔가를 곰곰히 생각했다.
얼마후 교수님이 다소 유쾌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혼전계약서를 작성하면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할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한국인들은 혼전계약서를 들이미는걸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탓에..."
말끝을 흐리자 교수님이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동거 외엔 방법이 없겠군요."
"동거를 하더라도 사실혼이 인정되는거 아닌가요?"
그러자 교수님이 유효적절한 답안을 추가로 제시했다.
"본인 사후에 전재산을 공신력있는 복지기관에 의탁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한다면, 별다른 뒷탈이 없을 겁니다."
법학 교수님답게 아는 것이 많았다.
"제가 작성한 유언장의 공증을 서주십시오. 물론 합당한 사례금을 지불하겠습니다."
"그럼 유언장을 작성해서 나에게 가져오세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장내를 조심스럽게 물러나왔다.
며칠 후.
프랭크 아서 교수님의 공증을 받은 유언장을 시티은행 금고에 고이 보관한 뒤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유라와 담판을 짓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얼굴과 몸매가 내가 환장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라와 섣불리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럴듯한 타협점을 그녀에게 제시할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동거를 요구할 계획이었다.
받아들이면 좋고, 거부해도 상관없었다.
헤어지면 그만이니까.
일종의 꽃놀이 패였다.
그녀 만한 미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도플갱어의 금언이 다시금 마음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는 절대 결혼을 하지말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도플갱어의 말대로 결혼 대신 동거를 하는게 최선으로 생각됐다.
유라의 퀸즈 자택으로 들어서자마자 내 마음을 솔직히 전했다.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미국애들은 동거를 엄청 많이하더라. 결혼도 안하고 애낳고 사는 부부들이 지천에 널린거지."
그녀가 쎄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우리도 미국애들 처럼 동거를 하는게 어때? 그게 편하잖아."
순간 그녀가 화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 미쳤어! 갑자기 왜, 동거타령을 하는건데?"
"오래전 부터 생각한거야. 그러니까 편하게 동거 부터 하자."
그리 말하며 유라에게 다가서자 그녀가 정색한 얼굴로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개소리 하지말라고! 나는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싶다니까!"
"너는 젊은 여자애가 왜, 그렇게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거냐? 미국애들 봐라. 얼마나 쿨해. 동거가 자유롭잖아. 우리도 그렇게 살자."
"싫다고! 나는 그런거에 관심 없으니까, 내 앞에서 동거 얘기를 절대 꺼내지마!"
그녀의 목소리 톤이 점점 높아졌다.
악다구니 같았다.
결국 유라에게 최후통첩을 내뱉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결혼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나랑 동거를 하든지, 아니면 헤어지든지 알아서 선택해."
그러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그 말이 진심이니?"
"그래. 그러니까 마음이 결정되면 연락해."
유라를 뒤로 한 채 퀸즈 집을 빠져나왔다.
공은 이제 그녀에게 넘어갔다.
학교 헬스장에서 근력운동을 만끽한 후 옆건물에 위치한 복싱체육관으로 넘어갔다.
요즘 재미를 붙인 쉐도우 복싱에 매진하기 위함이었다.
전신거울을 들여다본 채 원투 스트레이트와 잽, 어퍼컷 등을 무한반복했다.
내 앞에 악당이 있다는 상상을 하며 나름 최선을 다해 주먹을 휘두르자 전신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쉐도우 복싱은 겉으로 보면 쉬운 운동 같았지만 체력소모가 상당했다.
주먹을 휘두르는 자체가 근력을 많이 소모하는 탓이었다.
두시간 가까이 쉐도우 복싱을 즐긴 후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저녁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키며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 명우가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드잡이질을 한 이후로 소가 닭을 보듯 서로를 경원시하며 강의실에서 마주쳐도 서로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명우가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났다.
이유가 뭘까?
자존심 강한 그놈이 사과를 할리는 만무할테고.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여동생 문제로 니놈과 절교하는건 별로 내키지 않더라고."
명우는 그리 말하며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재벌 후계자 답지않게 사람 보는 안목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왔구만. 그런 의미에서 형이 거하게 한잔 쏜다."
그리 말하자 명우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룸살롱으로 가자."
"이 근처에 룸빵이 있냐?"
"당연히 여긴 없고, 뉴욕 플러싱 한인타운에 있지."
"오케이. 지금 당장 뉴욕으로 가자."
1시간 뒤, 우리는 사이좋게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욕 퀸즈의 플러싱 지역은 한인상가 밀집지역이었다.
당연히 한국식 룸살롱도 성업중이었다.
우리는 블랙로즈란 상호명이 적힌 룸빵으로 직행했다.
반반한 아가씨들의 술시중을 받으며 밤새도록 병나발을 불어제꼈다.
그러기를 얼마후 아가씨들과 인근의 모텔로 들어갔다.
나는 그날, 하룻밤 술값으로 2천만원에 상당하는 돈을 써제꼈다.
명우에게 내심 미안했기 때문이다.
녀석에게 주먹질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명우는 제가 먼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름 쓸만한 녀석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부터 명우와 함께 학교 구내 식당으로 직행했다.
베트남 쌀국수로 숙취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쌀국수를 꾸역꾸역 섭취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늘어놓았다.
명우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사가 문제가 많나봐."
"어느 정도 길래 똥씹은 표정을 하는거야?"
"금융권 대출이 거의 막힌 모양이야."
"명성그룹이라면 나름 10대 그룹에 속하잖아."
"철강이랑 건설 쪽에서 대규모 적자를 봤어. 거의 조단위라고 하더라."
녀석은 그리 말하며 밥맛 없는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한국으로 들어가야 할거같다."
"mba 학위는 어쩌고?"
"지금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학위가 문제냐?"
녀석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먼저 간다. 나중에 보자."
명우는 그말을 끝으로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며칠 후, 녀석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뉴욕 퀸즈 인근의 주택가에 김유중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회장은 유라가 타준 커피로 목을 축인 뒤 침중한 어조를 내뱉었다.
"이태수랑 하루 빨리 결혼을 하는게 너에게 좋아."
"나도 그러고 싶지만, 오빠가 결혼을 기피한다고."
"흐음..."
김회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기를 얼마후 다시 입을 열었다.
"회사 사정이 말이 아니야. 동우그룹 꼴이 나지말란 법이 없다고."
순간 유라가 헬슥해진 얼굴로 김회장을 쳐다봤다.
"그 말이 정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이태수를 반드시 잡아. 너라도 돈많은 남자를 만나서 호강을 누려야 할거 아니냐!"
김회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유라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볼게."
"동거를 하면서 아이를 낳아. 그러면 자연스럽게 결혼하겠지."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유라는 그리 화답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야시시한 미니 원피스 차림의 유라가 내 아파트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내 품에 안겨들었다.
격렬한 정사에 돌입할 찰나 그녀가 뜻 밖의 말을 꺼냈다.
"콘돔 필요없으니까, 자연스럽게 해줘."
"임신이 될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어. 나는 오빠 여자니까. 그리고 동거도 받아들일게."
불감청 고소원이다.
"고맙다. 유라야."
나는 그날, 노콘으로 유라의 육감적인 여체를 격렬히 탐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케임브리지 아파트에서 동거생활에 돌입했다.
***
1997년의 희망찬 새해가 밝아왔다.
그런 탓인지 유라가 있는 솜씨 없는 솜씨를 총동원해서 떡국을 만들었다.
그녀가 내온 떡국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하버드 대학으로 등교했다.
속을 든든히 채워서 그런지 오늘 따라 기운이 넘쳐 흘렀다.
학교 주차장에 벤츠를 파킹한 뒤 경영대학원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안젤리나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몸에 딱 붙는 청바지와 푸른색 가죽 점퍼 차림이었다.
그런 탓인지 굴곡진 하체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였다.
언제봐도 아찔한 골반과 탐스러운 애플힙이었다.
안젤리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렇지 뭐. 너는 어때?"
"졸업 논문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야. 맨날 도서관에서 파묻혀 지냈어."
일순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서 그런거 같았다.
이럴 때는 남자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게 상책이다.
"다음에 보자. 안젤리나."
"그래. 빠이."
안젤리나는 터질 듯한 뒷태를 과시하며 도서관 쪽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1층 부터 차례로 훑으며 3층 까지 올라갔다.
안젤리나는 3층 열람실에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녀 곁에는 잘생긴 백인 훈남이 있었다.
나와 헤어진 후 새로 사귄 남친 같았다.
그들은 손을 잡거나 가벼운 키스를 하는 등의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목격하자 격렬한 질투심이 내면에서 활화산 처럼 치솟았다.
내 소중한 장난감을 엄한 놈에게 뺐긴 기분이었다.
훈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 밤 9시까지 우리가 자주가던 시내 술집으로 나와라."
그러자 안젤리나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남자친구가 있어. 그리고 공부도 해야하고."
"마지막으로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무조건 나오라고."
그 말을 끝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날밤.
시내 술집에 안젤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
그리 말하며 안젤리나를 지나쳐 술집 밖으로 나갔다.
술집 정면에는 아담한 호텔이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안젤리나가 체념한 얼굴로 나를 따라 호텔로 들어왔다.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안젤리나를 번쩍 안아든 채 앵두같은 입술에 격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내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격렬한 잠자리를 탐닉했다.
< 마이크로 소프트 6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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