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 - 1 >
1998년 새해가 밝았다.
본격적으로 한국 부동산에 투자할 시점이었다.
***
유라와 갓난아기 민준을 뉴욕의 트램프 타워로 데리고 왔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아파트 내부를 홀린 듯이 들여다보며 얼굴 가득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오빠."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해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호호······."
유라는 그리 화답하며 민준이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속살이 훤히 비치는 네글리제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민준이는?"
"자고 있어."
유라는 내 품에 안기며 고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사랑해. 오빠."
"간만에 오붓하게 즐겨볼까?"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민준이가 깰 거야. 잠자리는 나중에 하는 걸로."
"그런가. 하하······."
"그런데 자기야."
"왜?"
"꼭 한국에 들어가야 해?"
"졸업논문도 냈으니까 일단 한국에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봐야지."
"들어가서 뭐 하려고?"
"부동산을 둘러볼 생각이야. 강남이랑 종로에 있는 오피스 빌딩 중심으로."
그러자 유라가 걱정이 그득한 얼굴로 나를 만류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 큰 손해를 보면 어쩌려구?"
"사업 문제는 오빠만 믿어라. 마이더스의 손이니까."
"그래도 너무 위험한 거 같아."
"에휴, 너는 이곳에서 민준이 육아나 신경 쓰고 있어. 한 달 후에 올 테니까."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서 유라 손에 쥐어주었다.
"마음대로 써라. 안 말리니까."
유라가 반색하는 얼굴로 물었다.
"한도가 얼만데?"
"쓸 만큼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유라를 품에 안은 채 침실로 들어갔다.
***
며칠 후.
20시간의 비행 끝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서자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느껴졌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압구정 아파트로 직행했다.
아파트는 텅 빈 상태였다.
전세 만기가 끝난 이후로 단 한 차례도 세입자를 들이지 않은 탓이었다.
아파트는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주인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더러워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곧바로 아파트 관리 사무실로 들어갔다.
관리소장에게 청소대행을 부탁했다.
"집이 너무 더러워서 그런데, 관리소에서 집 안 청소를 해주십시오."
소장에게 백 달러 지폐 석 장을 건네자 반색하며 화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지금 당장 깨끗이 청소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소장님만 믿겠습니다."
"넵. 사장님. 살펴 가십시오."
한국은 달러가 금값이었다.
구제금융의 여파였다.
아파트 인근의 호텔에 거처를 정했다.
며칠 동안 이곳에서 머물며 부동산 시장을 점검할 생각이었다.
다음날.
호텔에서 아침을 때운 뒤 강남역 인근의 떡방으로 들어갔다.
떡방 사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피스 빌딩이 매물로 많이 나왔나요?"
"억수로 많이 나왔죠. 한국 경제가 망했는데 오피스 빌딩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매물이 산더밉니다.
"그 매물 중에서 위치가 제일 좋은 곳이 어디죠?"
"강남역 대로변의 오피스 빌딩이 가치가 제일 낫다고 봐야죠."
"그럼 사장님이 빌딩을 좀 안내해 주시죠."
그러자 떡방 아저씨가 미심쩍은 얼굴로 내 위아래를 살폈다.
곧바로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아저씨는 내 명함을 자세히 살피더니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해외펀드에서 나오신 분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도 의뢰를 받은 상태죠. 강남의 쓸 만한 빌딩에 관심을 보이는 외국인들이 많거든요."
"아하······! 그러시구나. 그럼 제가 사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이후, 급급매로 나온 강남과 종로, 광화문 일대의 사무용 빌딩을 눈에 띄는 족족 매입했다.
***
석 달 후.
ts 인베스트먼트 명의로 급급매로 나온 강남과 종로, 광화문 등지의 오피스 빌딩 130채를 일사천리로 매입했다.
50억 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나는 서울 부동산의 반등을 확신했다.
1999년에 IMF 사태를 조기 진압한다는 도플갱어의 신탁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
남대문 대유그룹 본사 회장실.
박태종 비서실장이 김 회장에게 보고했다.
"따님의 부군이신 이태수 씨가 거액의 해외펀드를 운용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서 얻은 정보지?"
"강남과 종로, 광화문 일대의 빌딩을 대거 매입한 ts 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주가 이태수 씨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근거가 있나?"
"빌딩 매매계약을 주도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확실한 거 아닙니까?"
"매입 빌딩의 총액이 얼만가?"
"아무리 못해도 미화로 수십 억 달러에 상당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김 회장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
늦은 밤.
압구정 아파트의 창가를 서성이며 불 꺼진 강남의 빌딩 숲에 시선을 고정했다.
IMF 의 한파가 맹렬히 휘몰아친 탓인지 오피스 빌딩은 대다수 어둠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 정도로 내수 경기가 안 좋다는 반증이었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주는 금 모으기 운동을 전 국민적으로 실시하고 있었지만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부자들이 전혀 동참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오로지 서민들만 금 모으기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김대주 정부는 계속 금 모으기 운동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칠 찰나,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화를 받자 김유중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에 왔으면 처가에 들르는게 예의 아닌가?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암튼 성북동으로 들어오게. 겸사겸사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내일 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오게. 집사람이랑 아들놈들이 자네를 보고 싶어 하니까.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전화를 끊은 뒤 옷을 대충 차려입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며칠 전에 구입한 회색 컬러의 벤틀리 컨티넨탈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벤틀리에 몸을 실은 채 성북동 방향으로 차를 몰아갔다.
성북동에 도착하자 김 집사가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취한 뒤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1층에 있는 가족 식당으로 들어가자 김유중 회장과 장모님, 두 명의 처남과 그들의 와이프가 시야에 들어왔다.
처남 부부와 상견례를 나눈 뒤 김 회장과 장모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나름 사위 된 도리였다.
정갈한 한식으로 배를 채운 뒤 김 회장 부부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인가?"
김 회장이 말하자 장모님이 거들었다.
"아기도 낳았으니까 이제 결혼식을 올려야지."
"몇 달 후에 올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그제야 김 회장과 장모가 안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 회장이 나를 향해 은근한 어조를 내뱉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나를 따라오게."
"네. 장인어른."
잠시 후 우리는 정원을 거닐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김 회장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위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회사 사정이 너무 급박한 관계로 염치불구하고 말하겠네."
"국내외 은행과 제2 금융권의 대출이 전부 막힌 상태일세. 이번 달 말에 돌아오는 어음과 은행 이자 조차 내지 못할 형편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 서방이 자금을 융통해 줄 순 없겠나?"
김 회장은 세계경영을 빌미로 해외에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조성한 상태였다.
미술관뿐만 아니라 계열사 간의 역마진 거래를 통해 무수한 자금을 은닉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비자금이 많으면 많았지, 결코 못 하지 않은 남자였다.
"이 서방이 조 단위의 사설 펀드를 운용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대유그룹에 투자하는 차원에서 급한 대로 6천억 정도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김 회장은 사위에게 대놓고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총만 안 들었지 날강도 수준이었다.
"장인어른께서도 해외에서 운용하는 비자금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 회장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변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어느 정도의 비자금을 굴리고 있지만 액수가 그리 대단치 않네. 그래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이 서방에게 부탁하는 게 아닌가?"
"제가 장인어른의 부탁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김 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직후 그의 입에서 날 서린 언사가 쏟아져 나왔다.
"처가집의 어려움을 끝까지 모른 척 한다면, 유라와 결혼 할 생각 자체를 하지말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혼을 서두르라고 날마다 독촉하던 양반이 하루아침에 말을 뒤집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 회장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돈을 빌려달라는 인간이 상전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발밑에 엎드린 채 울며불며 사정해도 돈을 빌려줄까 말까인데, 김 회장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그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안 되는 건 때려죽여도 안 되는 거다.
"죄송하지만 저는 친인척들과 돈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지도 않을뿐더러, 설혹 누군가 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도, 결코 돈을 빌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김 회장이 분노한 얼굴로 고성을 터트렸다.
"정말 끝까지 처갓집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할 텐가!"
"죄송하지만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남이었다.
김 회장의 회사가 망한다고 해서 내가 아쉬울 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김 회장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해 못할 위인이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성북동을 바람처럼 빠져나왔다.
***
트램프 타워 로열 스위트룸.
유라는 갓난아기 민준을 돌보며 집 안 청소에 여념이 없었다.
그 무렵, 그녀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당장 한국으로 들어와!
김 회장의 진노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 서방과 헤어지라고!
-아빠. 미쳤어? 그게 아빠가 딸한테 할 말이야?
-그 개자식은 내 사위가 아니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민준이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내가 아빠 꼭두각시야? 나는 태수 씨를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전화 끊어!
-이년아. 이 서방 그 자식은 처갓집을 우습게 아는 인간말종이라고!
-계속 화만 내지 말고, 자초지종을 차분히 말해봐.
-그 개놈은 처갓집 어려움을 잘 알면서도, 땡전 한 푼 도와줄 마음에 없는 천하의 호로자식이야!
유라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대기업 회장이 사위한테 돈 달라고 난리를 친 거야? 아빠 미쳤어!
-이년아. 너마저 나를 우습게 아는 거냐?
-사위한테 돈 문제를 얘기한다는 자체가 아빠는 장인 자격이 없어! 끊어!
유라는 전화를 끊자마자 한국에 있는 태수에게 연락을 넣었다.
***
압구정 아파트.
중화요리로 배를 채운 뒤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lc 전자와 현도 전자 간의 빅딜이 성사됐습니다. lc 전자는 자사의 반도체부문을 현도 전자에 매각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략······.
-기어자동차의 주채권 은행인 산자은행은 현도 자동차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중략······.
김대주 정부는 대북 평화정책에 적극 협조한 현도 그룹에 쏠쏠한 선물을 안기는 차원에서 반도체와 자동차를 저렴한 가격에 넘길 계획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내 시선이 현도전자에 고정됐다.
도플갱어의 신탁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도플갱어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메모리 시장은 전망이 밝지 못했다.
경쟁업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사태의 추이를 면밀히 주시하는 게 최선이었다.
9시 뉴스를 시청한 뒤 불 꺼진 밤거리로 차를 몰고 나갔다.
< 1998 -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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