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 - 2 >
한산한 도로를 주행하자 고즈넉한 심사에 빠져들었다.
그때, 핸드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폰을 귓가에 가져가자 김명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마. 한국에 왔으면 형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처리할 일이 많아서 미처 연락을 못했다. 이해해라.
-한국에서 무슨 할 일이 그리 많다고, 형한테도 연락을 안 한 거야?
-그럴 일이 있다. 그런데,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전화 한 거냐?
-당연히 한잔 빨려고 연락했지.
-회사가 어렵다며? 술 빨 시간이 있냐?
-한고비는 넘겼다. 영감이 꼬불친 비자금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하얏트 호텔 라운지 바로 지금 당장 튀어 와라.
-하얏트 호텔이 한두 군데냐?
-이태원 쪽으로 오라고.
-오케이. 있다 보자.
전화를 끊은 뒤 이태원 하얏트 호텔 방향으로 차를 몰아갔다.
하얏트 호텔 정문에 도착한 후 벨보이에게 차키를 내던지자마자 지하에 위치한 라운지 바로 직행했다.
라운지 바에는 야심한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외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이태원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명우는 기다란 라운지 테이블에서 나 홀로 칵테일을 즐기고 있었다.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자 반색하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칵테일 한잔할래?"
"달달한 거로 한잔 갖고 와라."
명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텐더에게 하와이안 블루 한잔을 주문했다.
달달한 하와이안 블루를 음미하며 녀석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수씨가 아기를 낳았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정화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니 동생 얘기는 하지 마라."
"안 할 거니까 염려 붙들어 매라."
"그럼 고맙고."
그리 말하며 칵테일을 목젖 깊숙이 들이켰다.
그런 탓인지 칵테일이 금세 밑바닥을 드러냈다.
빈 잔을 머리 높이로 들자 바텐더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와이안 블루를 더 드릴까요?"
"그거 보단 보드카를 한 잔 주십시오."
"네. 손님."
바텐더가 내온 보드카를 원샷하자 알싸한 뒷맛이 목젖에 느껴졌다.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명우가 은근한 어조를 내뱉었다.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뭐냐?"
"당연히 투자를 하려고 입국했지."
"무슨 투자?"
녀석이 두 눈을 바짝 빛냈다.
"쓸만한 빌딩."
"그럼 지난 석 달 동안 빌딩을 매입하려고 그리 바쁘게 돌아다닌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러자 녀석이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도 너처럼 돈이 많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대 명성그룹의 후계자가 헛소리를 하는 이유가 뭘까?"
그러자 녀석이 양팔을 맹렬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빛 좋은 개살구 신세라고. 내 수중에 단돈 10억조차 없다니까."
"그건 좀 심한데?"
"꼰대가 회사가 어렵다고 내 명의로 된 부동산을 모두 급매로 처분했어."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올 거 아니냐?"
"기조실장 월급이래 봤자 달에 천만 원도 안 된다."
녀석은 자조 섞인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채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요즘 룸빵도 못가는 처지냐?"
"당근 빳다지. 돈이 있어야 그런 델 가지."
"법인카드로 긁으면 되잖아?"
"그랬다간 우리 집 꼰대가 노발대발 할 거다."
"로열패밀리 친구한테 빌붙지 그러냐?"
"그 자식들은 하나같이 의리 없는 놈들이라 내 인생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고."
"그래서 나를 부르셨구만. 내 돈으로 룸빵에 가려고."
그러자 녀석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임마. 자리에서 일어나라. 형이 간만에 거하게 쏜다."
"역시 태수, 너밖에 없다. 하하하······!"
우리는 곧장 강남의 고급 룸살롱으로 넘어갔다.
vip룸에 들어가자 관리실장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물주를 탐색하는 눈빛을 내비치며 나와 명우를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그때, 명우가 나를 손짓하며 실장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의 물주니까 알아서 모셔라."
순간 실장이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제일 비싼 양주랑 아가씨들 열 명 정도 들여보내. 제일 잘 나가는 에이스로 추려서."
"넵. 사장님."
잠시 후 반반한 아가씨들과 양주병이 룸 안에 무더기로 출몰했다.
우리는 양주를 물처럼 들이키며 아가씨들과 밤새도록 오붓한 시간을 만끽했다.
다음날.
압구정 아파트에서 숙취 해소를 위해 단잠에 매진할 무렵 천장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우르르릉······!!
쾅쾅쾅······!!
우르르르르르릉······!!!
쾅쾅쾅쾅쾅쾅쾅쾅······!!!
위층 인간들이 집안에서 뭔가 공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잠은 다 잤다.
결국 인근의 호텔 방으로 대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윗집 사람들과 얼굴을 붉혀봤자 나만 손해였다.
며칠 후.
오늘도 하루종일 위층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우르르르릉······!!!
쾅쾅쾅쾅쾅쾅쾅······!!!
결국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504호에 살고 있는데요. 604호에서 요즘 매일 공사를 하는 거 같습니다.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으니까 주의를 주세요.
그러나 관리사무소 측은 냉담한 태도로 일관했다.
-층간소음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니 504호 입주민께서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한동안 한국에서 체류할 예정이었다.
그러자면 조용한 환경이 필수였다.
레지던스 호텔로 거처를 옮길까도 생각해 봤지만 압구정 아파트는 내 집이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내 집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간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위층 입주민에게 조용히 해줄 것을 요구하기로 결심했다.
옷을 대충 걸친 뒤 604호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쇼?"
"아래층 사람입니다. 504호에 사는."
"그래서요?"
"일단 문 좀 열어보세요. 할 말이 있으니까."
그제야 남자가 현관문을 열었다.
남자는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씨름 선수를 연상케 하는 체격이었다.
"요즘 천장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종일 울려서 올라와 봤습니다. 혹시 집에서 공사를 하시나요?"
"그런 적 없는데요."
그가 시치미를 뚝 뗐다.
아무리 봐도 이 남자가 층간소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저 큰 덩치로 집안에서 날아다닌 탓에 공사장을 방불케 하는 소음을 유발했음이 틀림없었다.
"암튼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잘 지경이니까 조심해 주세요."
그러자 남자가 인상을 잔뜩 쓰며 문을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쾅'하고 닫아버렸다.
기분 나쁜 자식이었다.
그날 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604호에 사는 덩치는 천장을 3초 간격으로 뒤꿈치를 이용해 무자비하게 찍었다.
조용히 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돌아오는 건 더욱 큰 소음이었다.
곧바로 604호로 날듯이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덩치가 '씨발'이라는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남의 집 초인종을 함부로 누르는 거야! 씨발!"
남자는 대놓고 반말과 욕지거리를 일삼았다.
"층간소음을 유발한 주제에, 이제는 욕까지 하는 겁니까?"
순간 덩치가 인상을 잔뜩 쓰며 나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래. 이 똥강아지 새끼야. 좆같으면 한판 붙던가?"
남자는 비웃음을 입가에 한가득 베어 문 채 나를 향해 양손을 우득우득 꺾으며 '강아지 새끼야'라는 단어를 쉴 새 없이 토해냈다.
피가 거꾸로 치솟을 지경이었다.
사람의 인격을 대놓고 모독한 탓이었다.
곧바로 놈의 비어있는 안면을 목표로 라이트훅과 레프트 훅을 벼락처럼 날렸다.
녀석이 놀란 얼굴로 어버버거리며 전신을 허우적거릴 찰나 놈의 빌어먹을 면상에 살벌한 어퍼컷이 섬전처럼 틀어박혔다.
퍼억······! 퍽······!
-크아아악······!!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내 인격을 모독한 개호로 자식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얼굴이 묵사발이 난 덩치가 맨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집 안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놈의 얼굴에 다시 한번 무자비한 사커킥을 날렸다.
퍼어억······!!
-으아악······.
그것을 시작으로 놈의 몸뚱이를 폭풍처럼 후려갈겼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퍼퍽퍽······!!!
-으아아아아아악······ 제발······ 그만······ 아아아아악······!!!
녀석은 돼지 멱따는 비명을 길게 내지른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개자식을 묵사발을 내자 일장박투를 매의 시선으로 살피던 이웃 주민들이 하나같이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덩치의 악행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덩치는 우리 아파트의 트러블 메이커였다.
층간소음을 너무 심하게 유발한 탓에 옆집과 윗집에서조차 항의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덩치는 입주민들을 폭력과 폭언으로 제압했다.
그런 개자식을 내가 흠씬 두들기자 입주민들은 하나같이 감사한 눈길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다음날.
내 집에 경찰들이 나타났다.
"604호에 사는 우영진 씨가 폭행 혐의로 이태수 씨를 고소하셨습니다."
"정당방위였는데요?"
"한국에서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쌍방 폭행이었습니다."
"그건 경찰서에서 조사해보면 나오겠죠. 그러니 저희와 서로 가주시죠."
"좋습니다. 옷 좀 갈아입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10분 드릴 테니 그 안에 나오십시오."
"네."
안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희 회사에 법무팀 있냐?
-당연히 있지. 뻔한 걸 뭐 하러 묻냐?
-형이 돼지 새끼를 한 마리 잡았거든. 그런데 그 돼지 새끼가 이 형님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더라. 그러니까 너희 회사 변호사 좀 같이 쓰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쌍방 폭행이야. 그러니까 강남 경찰서로 변호사를 보내. 비싼 술을 사줬으면 돈값을 해야지
-알았다. 임마. 경찰서로 보낼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오케이.
강남서에 도착하자마자 젠틀한 변호사가 나를 맞이했다.
그 덕분에 별다른 조사 없이 쌍방폭행이 인정되었다.
며칠 후.
명성그룹의 법무실장을 대동한 채 덩치가 입원한 병원으로 직행했다.
녀석은 1인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병실 안에는 녀석과 비슷하게 생긴 아저씨랑 아줌마가 있었다.
곧바로 그들에게 스산한 언사를 내뱉었다.
"한 번만 더 주제 모르고 설치면 당신들 모두 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알아서 처신을 똑바로 하십시오!"
그러자 덩치 아저씨와 아줌마가 곰과 하마처럼 쉴 새 없이 으르렁거렸다.
"이 개새끼가 누구 앞에서 협박이야! 나한테 죽어볼래!"
"이 개차반 같은 자식이 남의 아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어놓고, 뭘 잘했다고 지랄이야!"
법무실장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줌씨와 아저씨에게 유창한 언변을 토해냈다.
"여기 계신 이태수 씨가 댁의 아드님을 폭행 혐의로 고소하셨습니다. 이미 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은 상태고, 목격자도 있으니까 아드님은 아무리 못해도 3년 이상의 징역을 받으실 겁니다."
법무실장은 그리 말하며 병원에서 발급한 내 진단서를 그들에게 건넸다.
전치 16주에 달하는 진단서였다.
그런 사실을 확인한 아줌씨와 아저씨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허나, 법무실장은 그들의 악다구니를 모르쇠로 일관한 채 자기 할 일에 묵묵히 전념했다.
"1시간 뒤, 이곳으로 검찰 수사관이 올 겁니다. 그러니 조사에 성실히 응해 주십시오. 물론 아드님의 죄가 너무 확실해서 선처 따위는 없을 겁니다."
법무실장은 그리 말하며 나에게 병실에서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다음날.
내 집에서 속 편하게 tv 프로그램을 시청할 무렵, 하마처럼 생긴 아줌마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미친년처럼 맨바닥에 털석 무릎을 끓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사장님. 제발 부탁 드려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드님은 워낙에 인간말종이라 콩밥이 최선 같습니다. 사람의 인격을 너무 심하게 모독하더라고요."
"그래도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사장님. 제발······!"
"일 없으니까 아드님 옥바라지나 할 생각부터 하세요. 그럼 이만 실례."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을 매정하게 닫았다.
그 후로도 초인종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지만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인간말종 같은 덩치 녀석에게 사람의 인격을 함부로 모독하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처절하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일주일 후.
명우와 룸살롱에서 질펀한 술판을 벌이며 돼지 녀석을 안주 삼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돼지 새끼가 구치소에 이감됐다고 하더라."
"구형은?"
"3년 정도 받겠지.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응. 내가 너무 열이 받았거든."
그러자 명우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1998 -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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