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34화 (135/200)

< 이명복 >

국면은행에 개설한 ts 인베스트먼트 계좌로 빌딩 임대수익이 입금됐다.

거의 200억에 상당하는 액수였다.

한 달 임대수익으론 짭짤한 규모였다.

그러나 내가 목표로 하는 수익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 한국 경제는 IMF 구제금융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경제가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천상 1999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빌딩을 매각할 생각이었다.

최소 다섯 배 이상의 시세차익을 확신했다.

도플갱어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은행 잔고를 확인한 뒤 명우를 만나기 위해 이태원 인근의 라운지 바로 차를 몰아갔다.

명우는 긴 테이블에서 칵테일을 음미하며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녀석의 전화는 오래 이어졌다.

나는 묵묵히 칵테일을 음미하며 명우의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통화를 끝마친 명우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국에는 언제 가냐?"

"내일모레."

"6개월 만에 제수씨와 아기를 보겠구나."

"그런 셈이지."

"내일 나랑 철학관에 갈래?"

"철학관이 뭔데?"

"사주 보는 곳."

"거긴 왜?"

"사주를 아주 잘 보는 도사가 있어."

"얼마나 잘 보는데?"

"재물 운과 여자 운을 기가 막히게 맞추는 사람이야."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사주가 잘 맞는다는 소문을 숱하게 접한 탓이다.

"그 사람 이름이 뭔데?"

"부산 박 도사."

"부산에 있는 사람이냐?"

"너도 따라올래?"

"겸사겸사 따라가 볼까?"

"이번 기회에 네 놈이 타고난 재물 운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거도 좋잖아."

"하긴, 그럼 내일 나랑 같이하자."

"비행기 표는 형이 예약할 테니까 김포공항으로 내일 오전 10시까지 와라."

"오케이."

다음날.

명우와 해운대 인근의 단독 주택으로 들어가자 사주를 보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광경이 보였다.

소문대로 사주를 잘 보는 남자 같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온 걸 보면 사주를 잘 보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내 말에 명우가 화답했다.

"부산 박 도사는 대한민국에서 사주를 제일 잘 보는 사람이야. 그래서 복채도 3백만 원이 넘는 거고."

"대단하네."

2시간가량 시간이 지나자 아가씨가 명우의 이름을 호명했다.

"김명우 씨 들어오세요."

"네."

우리는 내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는 장년의 남자가 형형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의자에 앉으시죠."

그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명우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누구 먼저 보시겠습니까?"

명우가 나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내 친구 먼저 봐주십시오."

그러자 박도사가 나를 쳐다보며 구수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생년월일을 알려주시죠?"

그에게 내 생년월일을 알려주자 만세력으로 사주팔자와 대운을 뽑아서 a4 용지에 한자로 적어 내려갔다.

그는 내 앞으로 사주팔자와 대운이 적힌 a4 용지를 내밀었다.

그곳에 시선을 기울이자 익숙한 한자들이 보였다.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병오일(丙午日)

경신시(庚申時)

박도사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내 사주를 찬양했다.

-태양의 화기를 타고난 병오일주가 년월시에 재물과 여자를 깔고 앉은 사주로다.

-발길 가는 곳마다 온통 돈과 꽃밭이로다.

박도사는 한시 비슷한 가락을 읊으며 내 재물 복과 여자 복에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재벌의 사주를 타고나셨습니다. 더구나 승왕한 화기가 경신금 재성을 깔고 앉은 탓에 재물복의 한계를 감히 추측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자 명우가 부러움이 잔뜩 깃든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박 도사는 소문대로 내 재물 복을 제대로 맞추고 있었다.

역시 그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다만 사주에서 재물은 여자와 같은 의미가 있는지라 죽을 때까지 호색할 운명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남자 사주에서 재성은 돈과 여자를 통칭합니다. 육신(六神)이 원래 그래요. 남자는 수중에 지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자들이 비례해서 늘어나는 생물이죠. 반면 수중에 돈이 없으면 여자가 붙지 않습니다."

명쾌한 답변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정답이었다.

박도사의 말대로 남자는 수중에 돈이 없으면 여자를 취할 엄두조차 낼 수 없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돈이 많으면 여자를 얼마든지 따먹을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탓에 개나 소나 오입질에 나선다.

박도사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더군다나 사장님은 재물 운이 너무 강해서 육친의 정이 삭막해질 위험성이 있어요. 강왕한 재물 복이 가족 간의 정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흐음······."

내 입에서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사장님은 열 집 살림도 마다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박 도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직시했다.

그는 내 속내를 한눈에 꿰뚫고 있었다.

"도사님 말씀대로 저는 열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이지요."

박 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변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사장님처럼 재운(財運)이 극왕(極旺)한 분들은 자손이 매우 귀한 운명입니다."

"사주적으로 이유가 있는 건가요?"

"남자 사주에서 자녀는 관성(官星)으로 봅니다. 일반적으로 관운을 뜻하는 육신(六神)이지만 남자의 경우 자손을 뜻하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박 도사는 목이 탔는지 생수로 목을 축인 뒤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장님의 사주는 온통 경신금 재성(財星)밖에 없어요. 더구나 지장간(支藏干)에도 관성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미국에 제 아들놈이 있습니다."

"음······."

그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러기를 얼마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한 아드님인가요?"

박 도사는 신통방통했다.

내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사주에 그런 것도 보이시나요?"

갑자기 박 도사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결혼하지 마십시오. 사장님은 사주에 돈과 여자가 너무 많아서 결혼하시면 틀림없이 이혼하실 겁니다."

뜨끔한 말이었다.

"이유가 뭐죠?"

"사장님은 돈과 여자를 구름처럼 몰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당연히 한 여자에 안주하시면 좋을 것이 없습니다."

헛으로 넘길 수 없는 박도사의 말이었다.

박 도사는 그 말을 끝으로 명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장님의 생년월일을 알려주시죠."

그러자 명우가 기대 만발한 얼굴로 자신의 생년월일을 박 도사에게 알려주었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결혼에 관해서 심사숙고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원래 미국으로 돌아가면 유라와 성당에서 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도사의 사주통변을 들은 뒤로 마음이 변했다.

더불어 도플갱어의 확언이 뇌리를 스쳤다.

-절대 결혼을 하지 마라!

아무래도 결혼을 하지 말고 동거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게 최선 같았다.

미국에는 애들을 많이 낳아도 끝내 결혼을 하지 않는 동거 커플이 아주 많았다.

그들처럼 끝까지 동거 생활을 유지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

트램프 타워 로열 스위트룸.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유라와 비슷하게 생긴 아름다운 여자가 나를 반겼다.

"오셨어요. 형부."

그녀는 유라의 여동생인 김유미였다.

사실 그녀의 이름만 들었지 실물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우리 처제가 대단한 미인이었네. 하하······"

"고마워요. 호호······"

그녀는 유라에 맞먹을 정도로 미모가 대단했다.

그런 탓인지 아기와 노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흐뭇한 심경이었다.

유미의 화사한 미모를 은근히 감상할 무렵 거실에 유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야.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한국에서 볼일이 너무 많더라고."

"그래도 중간에 한 번쯤은 뉴욕으로 왔어야지. 민준이 백일잔치도 못 했잖아."

"돌잔치로 퉁치자. 그건 그렇고, 간만에 오붓하게 놀아볼까."

그리 말하며 유라를 번쩍 안아 들자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미가 보잖아."

"처제도 어차피 가족인데, 뭐가 창피하다고. 하하······"

그리 말하며 유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자 그녀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자태였다.

우리는 곧바로 침실로 들어갔다.

그 후 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함께했다.

유라는 내 품에 안긴 채 여행을 가자고 난리를 쳤다.

"민준이는 어쩌고."

"유미가 보면 되지."

"처제도 학교를 가야 할 거 아냐?"

"지금 자퇴한 상황이라 시간이 많아."

"그래도 처제 혼자서 민준이를 보라고 하는 게 좀 그런데."

"자기가 용돈을 많이 주면 되지."

"장인어른이 처제한테 용돈을 안 주는 거야?"

"주긴 주는데, 딱 생활비 밖에 안 줘. 그러니까 자기가 민준이를 돌보는 댓가로 만 달러 정도를 주라고."

"알았다. 그건 그렇고, 어디를 가고 싶기에 이 난리냐?"

"파리도 가고 싶고, 런던도 둘러보고 싶고, 바르셀로나랑 로마, 밀라노도 보고 싶고······"

"유럽에 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유럽이 볼거리가 많잖아."

"아휴······."

"왜 그래?"

"유럽 애들 인종차별 심해. 특히 동양 사람한테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인간들이라고."

"그 정도는 감안하고 가는 거지. 그래도 볼거리가 너무 많단 말이야."

"알았다. 이번 기회에 유럽에서 한 달 정도 푹 쉬다 오자."

"꺄아악······! 고마워. 자기야. 호호······."

유라가 어린 소녀처럼 기쁨의 절규를 내질렀다.

유럽 여행에 환장병이 걸린 모양새였다.

***

거실에서 CNN을 시청할 무렵 목욕가운을 걸친 유미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욕실에서 샤워를 했는지 머릿결이 촉촉한 상태였다.

그런 탓인지 미모가 더 대단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유미도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허나, 그녀는 유라의 친동생이었다.

지킬 건 지켜야 한다.

그래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된다.

내심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유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민준 엄마 데리고 유럽여행을 갈 예정이거든."

"언니한테 들었어요."

유미가 기대 만발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야릇한 살 내음이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후끈해지는 심사를 가까스로 가라앉힌 뒤 지갑에서 1만 달러짜리 수표 5장을 꺼내서 유미에게 건넸다.

"한 달 정도 민준이를 돌봐줘. 그리고 이 돈으로 용돈이나 해."

"꺄아악······! 고마워요. 형부."

유미 역시 소녀처럼 기쁨의 환성을 내쏟으며 내 품에 포근히 안겨들었다.

그러자 물컹한 감촉이 온몸에 전해져왔다.

내심 미칠 지경이었다.

아름다운 유미가 내 품에 안긴 탓이었다.

유미는 내가 준 수표를 소중히 챙긴 뒤 게스트 룸으로 들어갔다.

그때, 유라가 내 앞에 나타났다.

"만 달러만 주라니까 왜, 5만 달러를 준거야?"

"만 달러 갖고 누구 코에 붙이냐. 최소 5만 달러 정도는 들고 있어야지."

"유미 그년, 버릇 나빠진다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주라는 돈만 주라고."

"알았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차려."

"그러지 말고 오늘 아침은 1층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해결하면 안 될까?"

"파스타 나부랭이를 먹으라는 거야?"

"파스타가 어때서? 맛있잖아."

"에휴, 말을 말자."

"어서 옷 갈아입어. 식당에 그 차림새로 갈 거니?"

그녀는 내가 걸친 허름한 트레이닝복을 손짓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그 옷 좀 갖다 버릴 수 없니? 꾀죄죄한 옷이잖아."

"내가 오랫동안 입은 옷이라고. 그러니까 버리지 말고 고이 모셔둬라."

그리 말하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아디다스 신상 트레이닝복으로 환복한 뒤 유라, 유미 자매와 민준이를 대동한 채 트램프 타워 1층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맛대가리 없는 파스타로 배를 채울 무렵 식당에 익숙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반카 트램프였다.

그녀는 나에게 특유의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친 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정장룩 차림이라 그런지 의자에 앉자 그녀의 육감적인 허벅지가 내 시야에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그때, 이반카가 나에게 뜨거운 시선을 노골적으로 퍼부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

현도 그룹 계동 본사 회장실.

오충렬 기조실장은 정조영 회장의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채 침중한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이라크와 이란의 정부 당국이 거액의 공사대금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이유가 뭐야?"

"애당초 이명복이 무리한 계약을 체결한 것이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정정불안 때문에 공사대금을 지불할 여력이 없는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정조영이 분노한 얼굴로 버럭 고성을 내질렀다.

"이명복, 그 개자식을 지금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그의 엄명에 기조실장이 쩔쩔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명복의 소재지가 전혀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 개자식이 회사에 입힌 손실이 얼만가?"

"대략 14억 달러가 넘습니다."

정조영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고사성어가 남의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이명복에게 회사에 입사한 지 10년 만에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줄 정도로 그를 애지중지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뼈아픈 배신일 뿐이었다.

그때, 기조실장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이라크와 이란의 정부 당국자들과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이명복이 거액의 뒷돈을 받아먹은 게 틀림없습니다."

정조영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 이명복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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