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 김민용 - 1 >
원래 이명복에게 진경철을 소개해준 사람은 내연 관계인 린다 박이었다.
린다 박은 1980년대 부터 한국에서, 미국 군수업체의 무기 중개상으로 활동한 여자였다.
그런 린다 박이 진경철을 소개한 탓에 명복은 그를 철석같이 믿었다.
허나, 린다 박은 애시당초 명복에게 사기를 치기 위해 접근한 여자였다.
그리고 진경철은 그녀의 친동생이었다.
이명복은 린다 박 남매의 사기행각에 철저히 농락 당한 꼴이었다.
***
삼송전자 서초동 사옥에 칼컴의 제이콥스 최고 경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콥스는 8층 회의실에서 삼송전자 모바일 사업부문의 이선우 사장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칼컴의 지분 전량을 80억 달러에 매각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선우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제이콥스가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해온 탓이었다.
"죄송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매각 액수와 차이가 많이 나는군요."
"우리 칼컴은 한국 정부가 표준 통신 규격으로 제정한 코드 분할 다원접속 (CDMA) 기술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80억 달러의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과도한 액수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귀사가 원하는 가격이 대체 얼마요?"
제이콥스의 입에서 퉁명스런 언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20억 달러가 적정 가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선우 사장의 냉정한 답변에 제이콥스가 성이 잔뜩 난 얼굴로 버럭 고성을 내질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요!"
"마음이 상하셨다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회사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이선우의 냉랭한 언사였다.
제이콥스가 성난 콧김을 내뿜으며 격한 어조를 내뱉었다.
"당신들과 더 이상 매각 협상을 진행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 우리에게 연락을 하지 마십시오!"
제이콥스는 찬바람을 풀풀 날리며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선우는 곧바로 회장실로 올라갔다.
제이콥스와의 회담 결과를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이선우는 김건영 회장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채 보고를 올렸다.
"제이콥스 회장은 매각 대금으로 80억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김건영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cdma 기술 밖에 없는 것들이 간뎅이가 부었구만."
"그래서 일언지하에 그 자식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김건영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선우는 그리 말하며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직후 장기웅 미래전략 본부장이 김건영의 면전에 나타났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뭐야?"
"큰도련님과 관련된 사안입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도련님이 주식 투자로 300억 정도를 날리신 것 같습니다."
순간 김건영의 입에서 격한 언성이 쏟아져나왔다.
"누가 그 자식한테 돈을 준거야!"
"여사님이 돈을 주신거 같습니다."
김건영은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지금 당장 그놈을 내 앞으로 끌고와!"
"넵. 회장님."
***
드림 엔터 사무실에서 대낮 부터 짬뽕 국물을 안주삼아 자음자작을 즐기며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삼송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삼송전자는 매출 32조원과 영업이익 1조 2천억을 달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전부문과 핸드폰 부문이 국내외에서 괄목할만한 판매 신장을 보인 것이 주효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삼송전자의 성장이 내년에도 지속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중략...
삼송전자는 imf 구제금융을 아랑곳 하지 않고, 나 홀로 잘나가고 있었다. 뉴스에 나온대로 가전과 핸드폰이 국내외에서 널리 사랑 받은 탓이었다.
특히 삼송의 tv와 핸드폰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삼송전자의 시대가 활짝 열린 형국이었다.
그러나, 삼송전자의 반도체 부문은 여전히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명 치킨게임으로 알려진 덤핑 판매가 시장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삼송전자는 반도체 업체들을 고사하기 위해 메모리를 원가 수준으로 시장에 내다팔고 있었다.
그 덕분에 경쟁업체들 역시 울며겨자먹는 심경으로 치킨게임에 참여하는 형국이었다.
삼송전자는 든든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석권할 계획이었다.
김건영 회장다운 승부수였다.
허나, 치킨게임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경쟁업체들 역시 만만치 않은 자금력을 보유한 탓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내 일에 집중할 차례다.
tv를 끈 뒤 국면은행 강남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ts 인베스트먼트 계좌에 오늘 돈이 입금됐나요?
-네. 사장님. 93억 4천만원 가량이 입금됐습니다.
-잔고 총액이 얼마죠?
-1024억 안팎입니다.
50억 달러를 투자해서 1천억 내외의 임대수익을 올렸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액수였다.
전화를 끊은 뒤 창가에 드리워진 빌딩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낮이라 그런지 길가를 분주히 오가는 샐러리맨과 오피스 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내 시선은 정장룩 차림의 오피스 레이디에게 절로 모아졌다.
그녀들의 고운 얼굴과 늘씬한 여체에 시선을 집중할 찰나, 핸드폰 벨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폰에서 김민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에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죠.
-어디로 갈까요?
-이태원에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카페가 있으니까 그곳으로 오세요. 주소를 문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전회를 끊자마자 문자 수신 알람이 울려퍼졌다.
문자를 확인하자 용산구 인근의 주소와 약속 시간이 쓰여 있었다.
그날밤.
한남동 인근의 카페로 들어서자 부티나는 로열패밀리들이 나를 반겼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호스트인 김민용과 정중히 악수를 교환했다.
우리는 창가 테이블에 따로 앉은 채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김민용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솔직히 말할게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에서 뜻 밖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지금 돈이 급해서 그러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이럴 때는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게 정답이었다.
"얼마가 필요하시죠?"
그제야 민용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달만 쓰고 이자 붙여서 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백억 정도만 융통해 주십시오."
민용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의 황태자였다.
신용이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내가 가타부타 말없이 뜸을 들이자 민용이 안달난 얼굴로 재차 말을 이었다.
"한달 이자로 30프로를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니 딱 한번만 자금을 융통해 주십시오."
손해볼 일이 없었다.
신용과 담보가 확실했다.
그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좋습니다. 원하시는대로 백억을 빌려드리죠."
그러자 민용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기분좋은 웃음을 흘려보냈다.
"하하하...! 고마워요."
다음날.
한남동 인근의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국면은행이 발행한 10억원 짜리 수표 열장을 김민용에게 전달했다.
김민용은 a4 용지에 채무각서를 작성한 뒤 나에게 건넸다.
채무각서를 손에 든 채 민용에게 물었다.
"돈을 빌리는 이유를 알수 있을 까요?"
그러자 그가 흔쾌히 화답했다.
"쓸만한 주식이 있거든요. 거기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민용의 대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많았다.
주식 투자를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한테 돈까지 빌리는걸 보면, 김건영 회장이 돈줄을 막았음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이미 거액의 투자손실을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그는 신용과 담보가 확실했다.
내 돈을 떼일 염려는 거의 없었다.
며칠 후.
명우의 회사 건물로 들어갈 찰나 카페에서 알바를 하는 김소민이 시야에 포착됐다.
곧바로 카페로 발길을 되돌렸다.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소민이 쭈볏한 얼굴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왜 오신거죠?"
"그냥 커피나 한잔 하려고."
"그럼 커피만 마시고 그냥 가세요."
"알았으니까 마키아토 두잔 갖고와."
"네."
잠시후 그녀가 쟁반에 마키아토 두잔을 받쳐들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너도 한잔 마셔라."
소민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을 봐야 해요."
"어차피 카페에 손님도 없잖아."
허나, 그녀는 완강했다.
"그래도 싫다고요."
"왜?"
"사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아니까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데?"
그러자 소민이 수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한테 작업을 걸려고 하시잖아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건 그렇고, 배우 전문 기획사랑 계약했냐?"
"사장님이 신경쓸 일이 아니에요."
"이상한 기획사랑 계약하면 창녀 처럼 성상납만 하다가 인생을 종칠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까 웬간하면 내가 설립한 드림 엔터에 들어와라."
"제가 알아서 할거니까 이제 좀 그만하세요!"
소민이 왈칵 짜증을 내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내 잔소리에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
한남동 접견실.
김건영 회장은 면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김민용에게 냉랭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정 연후가 지나자마자 미국 지사에서 일을 해!"
"아버지. 저는 한국에서 배울 일이 아직 많다고요."
"하라는 일은 안하고, 허구한날 주식투기에 골몰하던 놈이 이제와서 일을 한다? 우리 큰아들놈이 애비를 웃길줄도 아는구나?"
김민용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김 회장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북미 지사에서 일하면서 밑바닥 부터 일을 익혀. 후계자 대우를 받을 생각을 눈꼽만큼도 하지마라!"
김회장은 접견실의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룹의 핵인 인사들을 둘러보며 다짐하듯 재차 입을 열었다.
"저 놈에게 편의를 조금이라도 봐준 사실이 발각이 난다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거다!"
그의 엄명이 떨어지자 장내의 인사들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민용이 일그러진 얼굴로 접견실을 나가려 할 때 김 회장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거듭 격한 어조를 내뱉었다.
"한번만 더 주식에 손을 댓다간 둘째 한테 그룹의 대권을 물려줄테다!"
민용은 헬슥헤진 얼굴로 접견실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김 회장은 테이블에 빙 둘러앉은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삼송전자는 제 역할을 200 프로 발휘했지만 다른 계열사들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지. 특히 삼송조선이 나를 아주 열받게 하더군."
김 회장은 끝자리에 앉아있는 장길수 삼송조선 사장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장길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거 같았다.
김 회장의 매서운 시선 때문이었다.
"송, 송구합니다. 회장님."
"2등도 아니고 3등이 뭐냐? 돈이 없어서 빌빌 대는 대유조선도 못이긴다는게 말이 되냐고!"
"거듭 죄송합니다. 회장님."
장길수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푹 숙였다.
"송구, 죄송 이런 면피용 발언을 하지 말라고! 밥버러지 같은 개자식아!"
김 회장은 성이 날대로 난 모양인지 격한 어조를 연거푸 내뱉었다.
"1년 준다. 무조건 그 안에 대유조선을 제쳐!"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장길수는 죽다 살아난 표정을 지으며 접견실에서 도망치듯 몸을 피했다.
김 회장은 회의를 끝마친 뒤 서재로 오집사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당신 집안 사람이 우리 집에서 일한지 몇년이나 됐지?"
"조부 때부터 회장님 댁에서 머슴을 살았으니까 엄밀히 말해 백년이 넘었습니다."
김 회장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해외 자원 개발을 해볼까 하는데, 당신 명의가 필요하거든. 물론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게 중요하지."
"분부만 하십시오. 얼마든지 따르겠습니다."
김 회장은 오집사의 지극한 충성심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기회에 해외에서 체류하면서 나 대신 자원개발 회사를 관리해."
"넵. 회장님."
"겉으로는 우리 삼송그룹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회사니까, 누가 묻거든 오집사가 창업한거로 설명하고. 그리고 해외에 나가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이아 광산과 호주의 수정 광산을 중점적으로 관리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며칠 후.
김포 국제공항에 오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 짙은 탐욕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당신 집안에 대를 이어 충성을 다했으니, 이제는 당신이 나에게 봉사할 차례다.'
오집사의 두눈에 격렬한 욕망이 번져갔다.
< 황태자 김민용 -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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