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자가 뭐길래 1 >
화창한 어느날, 뉴욕 맨해튼.
김민용은 카페에서 금발미녀 소피아와 마주 앉아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감미로운 음악이 어우러진 이곳은 평온한 오후를 함께 보내려는 연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 덕분에 민용의 얼굴이 더욱 환해 보였다.
그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채 소피아와 오붓한 시간을 만끽했다.
그러기를 얼마후 그녀를 대동한 채 인근의 아파트로 유유히 사라졌다.
***
민용은 늦바람이 단단히 들었다.
한국에 처자식이 주렁주렁 매달린 녀석이 금발미녀 소피아에게 홀딱 반한 탓이다.
녀석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맨해튼 인근의 고급 아파트에서 소피아와 동거 생활에 돌입했다.
부친의 엄혹한 훈육에 별다른 저항 한번 해보지 않았던 녀석이, 내 덕분에 30대 후반의 나이에 과감한 일탈행위를 저질렀다.
절로 쓴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그 무렵, 민용이 내 집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커플 동반 여행을 제안했다.
"산타모니카 비치에 내 소유의 요트가 있거든. 그거 타고 말리부 비치까지 놀러가자."
어차피 시간이 남아도는 처지였다.
그런 이유로 민용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언제 놀러갈 생각이냐?"
"1월 달이 지나기 전에 여행을 가자고."
"오케이. 이사벨라도 좋아할거다."
"그럼 다음주 화요일을 디데이로 정할테니까 그런줄 알아라."
민용은 그말을 끝으로 내 집에서 유유히 몸을 감췄다.
다음주 화요일.
이사벨라를 대동한 채 뉴욕 국제공항에 도착할 무렵, 대합실에서 진한 키스를 즐기는 민용과 소피아 커플이 보였다.
그들은 뜨거운 광경을 연출한 뒤 환한 얼굴로 우리 커플을 반겼다.
우리 일행은 곧바로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la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인근의 산타모니카 비치로 날듯이 달려갔다.
민용은 12인승 요트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녀석은 능숙한 솜씨로 요트를 운항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갑판 위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탐닉한 뒤 본격적인 음주가무에 돌입했다.
요트 위에서 흥겨운 음악과 술을 대여섯 시간 정도 만끽하자 아름다운 말리부 비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민용은 요트를 선착장에 정박한 후 구릉지에 위치한 별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장장 열흘 동안 말리부 비치 별장에 체류하며 즐거운 한때를 만끽했다.
***
2월 중순 무렵, 민용이 내 집에 나타났다.
녀석이 고민이 그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소피아의 존재를 눈치챘어."
"그래서 어쩔건데?"
"당연히 몰래 만나야지."
"너답지 않게 아버지한테 반항할 생각이냐?"
"아버지가 난리를 쳐도 할수 없다구. 나는 소피아가 없으면 돌아버린다고."
"소피아가 그리 좋냐?"
"그걸 말이라고 하냐? 여신처럼 이쁜 얼굴과 끝내주게 잘빠진 몸매, 거기에 성격도 얼마나 착한데."
녀석의 말대로 소피아는 남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여성이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팔등신의 몸매는 물론이고 성품마저 고왔던 탓이다.
녀석이 소피아에게 홀딱 반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니 집으로 피난 오면 안될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버지가 맨해튼 아파트를 팔아버렸어. 소피아랑 동거생활을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지."
"니 아부지도 정말 엄청 독한 양반이다."
"우리집 아버지 얘기는 더 이상 하지마라. 열통 터지니까."
"당분간 한국에서 생활할 계획이니까 니들 커플이 내집에서 지내도 좋은데, 단 기물 같은거 절대 파손하면 안된다."
녀석의 입이 귓가에 내걸리며 좋아죽는 얼굴로 화답했다.
"고맙다. 친구야. 정말 너 밖에 없구나. 우하하하...."
"임마. 너무 좋아하지마라. 내집 훼손하면 곧바로 변상 책임을 물을 생각이니까."
"염려 붙들어 매라니까. 하하하..."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없는 웃음을 그후로도 한참 동안 쏟아냈다.
***
트램프 타워 집을 김민용 커플에게 내맡긴 채 한국행 비행기에 홀가분하게 몸을 실었다.
21시간의 비행끝에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길가를 오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압구정 현도 아파트로 가주세요."
"네. 손님."
다음날.
여행의 노독을 어느 정도 해소하자마자 강남 인근의 빌딩으로 직행했다.
부동산 자산관리 회사를 운용하는 김용석과 미팅을 나눈 뒤 빌딩 한켠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문에는 여전히 드림 엔터테인먼트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
사무실의 책상에서 줄담배를 말아올릴 즈음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가를 들자 명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국에 들어왔으면 형 한테 먼저 연락을 해야지.
-자식아. 한국에 입국한지 14시간도 안지났다.
-암튼 잔말 말고, 단골 룸빵으로 오늘 밤 9시까지 튀어와라.
-알았으니까 전화 끊는다.
그날밤.
명우와 함께 룸걸들을 희롱하며 발렌타인을 물처럼 들이붓자 알딸딸한 취기에 휩싸였다.
더불어 배설욕구가 목젖 까지 차올랐다.
"시원하게 쏟아내고 올테니까 아가씨들 잘들 지켜라."
"알아서 싸고 와라. 낄낄..."
명우는 그리 말하며 그녀들의 탐스러운 여체를 우왁스러운 손길로 거칠게 주물럭거렸다.
녀석과 아가씨들을 뒤로 한 채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서 오줌 줄기를 시원하게 배설할 무렵 낯익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의 남자였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빌어먹을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은 중학교 시절 내 담임선생이었다.
날마다 학비를 독촉하며 급우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를 거지새끼라고 틈만나면 비아냥 거린 인간말종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자퇴한 이유도 이 좆같은 인간말종 때문이었다.
그런 개후레자식을 코앞에서 목도하자 맹렬한 살의가 전신에 팽배해졌다.
허나, 이 개자식은 내가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놈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끝낸 뒤 7번방으로 들어갔다.
일반룸이었다.
곧바로 룸빵의 관리실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7번방에 있는 놈들이 누구지?"
"학교 선생들 같습니다."
"직위를 말해봐"
"자세히는 모르지만 교장과 교감이 주축인거 같습니다.
"저 중에서 금테안경을 착용한 놈의 신상정보를 자세히 파악해봐."
백만원 짜리 수표 한장을 관리실장에게 내밀자 그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1시간 뒤,
vip 룸에 관리실장이 나타났다.
실장이 보고를 올렸다.
"성일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는 모양입니다."
예상대로 인간말종은 여전히 교육계에 몸담고 있었다.
"수고했다. 나가봐라."
"넵. 사장님."
명우가 호기심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중학교 시절 담임."
"그런데? 그게 뭐?"
"나를 맨날 거지새끼라고 비아냥 거린 인간이지."
그제야 녀석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따끔하게 혼쭐을 낼 생각이냐?"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교육자의 자질이 눈꼽만큼도 없는 인간이 교장으로 재직한다는게 말이 안되잖아."
"그냥 넘기지 그래."
"아니. 룸빵에서 그 놈을 만난건 신의 계시야. 인간말종을 작살내라는 신의 명령이나 마찬가지라구."
"아주 제멋대로 해석하는구만. 너는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 형처럼 속편하게 살면 어디가 덧나냐?"
"너는 일평생 호강만 했잖아. 형처럼 사람들한테 치여본 적도 없으면서 내 일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마라."
"그래 알았으니까 니 좆대로 하세요. 이태수씨."
"비아냥대지 말고 강태호나 호출해. 그 인간 도움이 필요하니까."
"대체 어쩔려고 그러는데?"
"따끔하게 혼쭐을 내야지."
"폭력을 쓸 생각이냐?"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썩을 인간을 교단에서 추방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을 생각이다."
다음날.
드림엔터 사무실에 강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에게 천만원권 수표 석장을 건넨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성일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 중인 박종우를 작업해 주세요."
"어떤식으로 작업할까요?"
"그자의 뒤를 파보세요. 뭔가 건수가 나오면 그걸 이용해서 빵으로 들여보내시면 됩니다."
"건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여자를 이용해서 성폭행 범으로 엮으세요."
"연기자를 고용하면 추가비용이 발생합니다."
"나중에 일을 끝마치면 알아서 챙겨드리죠."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가 완료되는 즉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
강태호와 수하들을 태운 봉고 차량이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태호는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아파트 곳곳에 도청기를 숨겨놔라."
"넵. 형님."
그의 명을 받은 수하들이 아파트 입구로 날듯이 뛰어갔다.
그날 밤.
태호는 헤드폰에서 울려퍼지는 박종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렇다할 특이사항을 발견하는데 끝내 실패했다.
허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집 전화기에도 도청장치를 설치했겠지?"
그의 물음에 수하들이 우렁차게 복명했다.
"넵. 형님."
"나 먼저 갈테니까 쓸만한 건수를 발견하면 곧바로 전화 때려."
"염려마십시오. 형님."
며칠 후.
박종우는 학교를 퇴근하자마자 강남 인근의 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같은 광경을 먼발치에서 목도한 강태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드림 엔터 사무실에서 대낮 부터 짬뽕 국물을 안주삼아 나 홀로 술판을 벌일 무렵 김용석 사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용석이 허리를 굽신대며 보고를 올렸다.
"분부하신 대로 이번달 임대료를 국면은행 계좌에 이체했습니다."
"이체금액이 얼마죠?"
"총 102억 7412만원입니다."
"수수료를 제한 금액인가요?"
"맞습니다. 사장님."
"수고하셨어요. 이만 가보세요."
그러자 녀석이 입맛을 다시며 짬뽕 국물과 소주를 핥듯이 쳐다봤다.
결국 빈잔에 소주를 따라서 용석에게 건넸다.
녀석은 소주를 원삿한 뒤 얼큰한 짬뽕 국물을 그릇 채로 입가에 들이부었다.
짬뽕에 환장한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용석은 그후로도 한참 동안 소주를 물처럼 들이키며 짬뽕 국물을 봄날에 게눈 감추 듯 제멋대로 쓱삭 해치웠다.
용석이 사무실에서 사라지자마자 강태호가 면전에 나타났다.
태호가 공손히 시립한 자세로 보고를 올렸다.
"박종우의 약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뭐죠?"
"거액의 도박 빚이 있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하우스에서 제 두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항입니다."
"도박 빚이 얼마죠?"
"5억원 안팎입니다."
"채권자를 알아보세요."
"도박 빚을 인수할 생각입니까?"
"겸사겸사 그러는게 좋겠네요."
"도박 빚은 현행법상 법의 보호를 받을수 없습니다."
태호는 나름 법률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자가 도박에 중독 된 노름꾼이란 사실을 교육청에 투서 하시는게 어떻습니까?"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학교에서 불명예스럽게 짤리면 교육 연금도 수령할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강사장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리고 5억을 드릴테니까 도박 빚도 인수하세요."
"그자의 파멸을 원하시는 겁니까?"
"알거지로 만들고 싶어요. 그러니까 도박 빚을 빌미로 큰 판에 그놈을 세우세요. 전재산을 모조리 털어버리세요."
1억 짜리 수표 5장을 건네자 태호가 송구한 얼굴로 수표를 받아들었다.
"명령하신대로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넵. 사장님."
태호를 내보낸 뒤 벽면에 내걸린 대화면 TV를 켜자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LC 전자 관계자는 반도체부문의 지분 전량을 현도전자에 념겼다고 오늘 오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현도전자는 전세계 3위권의 메모리 반도체 업체로 급부상 했습니다. 중략...
현도전자는 무늬만 전자업체였다.
이렇다한 가전제품이 전무한 기업이었다.
그런 주제에 LC 전자의 메모리 반도체부문을 꿀꺽 삼키는 기염을 토했다.
정부의 대북정책에 그룹차원에서 전폭적으로 협조한 덕분이었다.
암튼 1999년에 들어서자 차츰 경기가 좋아지는 게 피부에 와닿을 지경이었다.
내가 소유한 빌딩의 공실률이 급감한 탓이었다.
사업을 새로이 시작하거나 재창업하는 업체들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런 탓으로 도플갱어의 예언을 굳게 믿었다.
도플갱어는 1999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경제가 정상화 될 것임을 확언했다.
이제 금년만 넘기면 내가 투자한 빌딩을 높은 가격에 매입하려는 작자들이 무더기로 출현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안봐도 비디오였다.
도플갱어의 신탁은 언제나 진리였기 때문이다.
사무실 문을 닫은 뒤 김포국제공항으로 직행했다.
심심풀이 땅콩삼아 부산 박도사를 내방하기 위함이었다.
다음날 아침 무렵.
해운대 인근의 철학관을 찾아가자 박도사가 나를 반겼다.
우리는 커피를 음미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도사에게 내 처지를 솔직히 밝혔다.
"알고보니 마누라가 나은 아들놈이 다른 작자의 피붙이였습니다."
박도사가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의 사주에 관성(官星)이 없는 탓에 자식과 인연이 별로 없는 모양입니다."
"관성이 없으면 자식이 없는 건가요?"
"사주에 관성이 없으면 대다수 자손이 없습니다. 자손과 인연이 없게 타고난거죠."
"그럼 제 피를 이을 후손을 볼 확률이 낮은 겁니까?"
"제 소견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박도사의 말대로 나는 자손을 보지 못하는 운명인거 같았다.
거시기 보호대 없이 잠자리를 즐겨도 여자들이 임신을 안하는 탓이었다.
흔히 말하는 씨없는 수박일 가능성이 높았다.
"요즘 시대는 자식이 웬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손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박도사의 말이 정답이었다.
< 팔자가 뭐길래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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