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림 엔터 2 >
박초원을 벤틀리에 태운 뒤 성북동 인근의 고급 저택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녀는 차안에서 대본 연습에 한창이었다.
나름 비중있는 조연 캐릭터라 대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약속장소에 들어서자 드라마 제작 차량이 줄지어 늘어선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초원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유피디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하루 종일 촬영할 예정이니까 힘들더라도 촬영장에서 절대 벗어나시면 안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날, 거의 하루종일 촬영장에 발이 묶인 채 초원을 케어하는데 전심전력했다.
매니저는 극한 직업이었다.
특히 촬영에 열일 중인 배우를 관리하는건 노가다를 뛰는거 보다 더한 중노동이었다.
온갖 잔심부름은 물론이고 촬영장을 벗어날수 없는 제약마저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못할 노릇이었다.
결국 명우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촬영장 한켠에서 초원의 연기를 지켜보며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에서 녀석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 11시에 뭐하러 전화질이냐?
-사람 좀 부탁하자.
-앞뒤 자르지 말고 알기 쉽게 말해보라구?
-형이 요즘 초원이 매니저 노릇을 하고 있거든. 그런데 이거 못할 일이더라. 그러니까 니 회사 애들 중에서 쓸만한 놈을 형한테 보내주라.
-맨입으로?
-나중에 찐하게 쏠게. 그러니까 내일 오전에 드림 엔터 사무실로 떨똘한 놈을 보내라고.
-알았다. 쨔샤. 이만 끊는다.
다음날 오전.
드림 엔터 사무실에 양복 차림의 훤칠한 청년이 나타났다.
배우 뺨칠 정도로 잘생긴 녀석이었다.
그런 탓인지 전혀 마음에 안들었다.
나 보다 잘난 놈을 옆에 두는건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진배 없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녀석에게 퇴짜를 놓았다.
"그냥 가세요."
그러자 훈남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에...? 그냥 가라고요?"
"맞습니다. 그냥 가시라고요."
그제야 녀석이 알아먹은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사무실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델 뺨치게 잘생긴 놈을 뭐하러 보낸거야?
-엔터 업체에서 일하려면 그 정도는 생겨야지
-헛소리 하지말고, 그냥 평범하게 생긴 범생이를 보내.
-드럽게 까다롭네. 너는 그래서 탈이다. 그거 나쁜거야. 반성하라고.
-알았으니까, 지금 당장 범생이를 보내라고.
그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2시간 뒤, 사무실에 키작은 범생이나 나타났다.
"김명우 기조실장님이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 녀석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평범한 얼굴과 왜소한 체격.
내가 갈구하는 매니저의 모습이었다.
나 보다 훨씬 못한 녀석이었다.
그 점에 내심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오늘 부터 신인 여배우인 박초원을 관리해."
그러자 녀석이 얼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명성그룹 소속인데요?"
"김명우 실장과 이미 얘기가 다 됐으니까, 군말하지 말고 형이 시키는 대로 해라."
그리 말하며 녀석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명령했다.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말아올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범생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니 연봉이 얼마냐?"
"대략 3천만원 남짓입니다."
"상여금을 모두 포함 한거냐?"
"그렇습니다. 사장님."
"연봉으로 5천 줄게. 그리고 설날과 추석에도 보너스로 5백, 총합하면 6천만원 정도 되겠구만."
그러자 범생이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일단 계약금 조로 천만원을 줄테니까 착실히 저금해라."
1천만원 짜리 수표를 녀석에게 건넸다.
범생이가 감격한 얼굴로 제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절반으로 접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사장님!"
"대신 오늘 부터 박초원을 니가 전담해서 케어해라."
"넵. 사장님."
1사간 뒤, 사무실에 박초원이 나타났다.
그녀는 오늘 따라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런 탓인지 평소 보다 미모가 더 대단해 보였다.
범생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박초원의 매혹적인 여체에서 당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모습에 그녀가 빙긋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박초원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범생이가 황송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두손으로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방기훈입니다. 저야 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헤헤..."
녀석은 바보같은 웃음을 흘리며 초원의 위아래를 은근히 훑었다.
방기훈을 내보낸 뒤 초원을 번쩍 들어 안았다.
그녀가 내 얼굴을 두손으로 맞잡으며 뜨거운 키스를 해왔다.
그녀의 혀끝에서 달콤 짭조름한 뒷맛이 느껴졌다.
우리는 진한 키스를 만끽한 뒤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늘 부터 방기훈이 촬영장에 갈거니까 그런줄 알라고."
"오빠는 뭐하고?"
"나는 볼일을 봐야지."
초원은 나름 이해심이 깊은 아이라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촬영 잘하고 와라."
"고마워. 그럼 내일 보자. 오빠."
초원은 그리 화답하며 내 볼에 귀여운 키스를 날렸다.
그녀를 내보내자마자 방기훈을 면전에 다시 불러들였다.
녀석에게 신용카드와 벤틀리 차키를 건네며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감독이랑 스텝, 선배 연기자들을 언제나 깍듯이 대하고, 누가 물어보면 드림 엔터테인먼트 소속 매니저라고 말해."
기훈이 부동자세로 복명했다.
"넵. 사장님."
"한달에 두번 휴일을 줄테니까 그런줄 알고. 그러라고 고액 연봉을 주는 거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장님."
기훈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카드로 식대를 해결하고 영수증은 반드시 챙겨라.
"명심하겠습니다."
"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으니까, 초원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내려가."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날 부터, 방기훈은 초원의 전담 매니저로 전직했다.
***
조달수는 대전 지역의 중견건설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형국이었다.
대전 시내에 건설한 천여 세대의 신규 아파트가 미분양이 속출한 탓이었다.
IMF의 여파로 시민들의 수중에 돈이 씨가 마른 탓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연이율 30 프로 대의 고금리 정책을 정부당국이 실시하자,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를 분양 받으려는 사람들이 신규 아파트를 철저히 외면했다.
달수는 미칠지경이었다.
월말에 돌아오는 은행 대출 이자와 어음을 마련할 길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돈이 될 만한 담보물이 없었던 탓이다.
그는 시중 은행은 물론이고 사채업자들에게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달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이 험난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결국 그는 고등학교 동창생인 은행 지점장에게 읍소를 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서울시내 일식당에 달수와 국면은행 강남 지점장인 이학규가 차례로 나타났다.
그들은 룸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진지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행 대출 좀 부탁하자."
달수의 말에 이학규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너 한테 대출을 해줬다간 나까지 모가지가 날라간다니까!"
"정말 다른 수가 없는거냐?"
"쓸만한 담보 물건이 없잖아. 그러니까 이만 포기해라."
이학규의 냉정한 말에 달수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애절하게 읍소했다.
"충남 연기군에 50만평 정도의 토지가 있는데 그거라도 담보로 잡아주면 안되겠냐?"
"시골 땅은 담보로 취급안해."
"그땅은 수도이전 후보지 중의 하나라고."
"그건 옛날 얘기잖아. 그러니까 투기붐이 한창 일어났을 때 그 땅을 팔았어야지."
"빌어먹을!"
달수는 성난 얼굴로 정종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충남 연기군의 토지는 박정후 대통령이 수도이전 후보지로 가장 유력하게 고려하던 지역이었다.
한창 때는 평당 가격이 수십만원을 호가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잘 쳐줘야 평당 만원 안팎하는 그저그런 시골 토지에 불과했다.
"요즘 시대에 어느 미친놈이 시골 땅을 사겠냐? 은행 입장에서는 담보 물건의 가치가 없는 거라고."
달수의 얼굴에 비분강개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기를 문득 다시 한번 애절한 읍소를 토해냈다.
"친구야. 딱 한번만 부탁하자. 제발 50억만 융통해주라."
달수는 그리 말하며 이학규에게 무릎을 끓었다.
친구의 그런 모습에 학규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잘 아는 재력가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한번 연락을 해볼테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학규는 그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도망치듯 몸을 감췄다.
***
드림 엔터 사무실에서 근력운동과 쉐도우 복싱에 매진할 무렵 전화벨이 울려퍼졌다.
수화기를 들자 국면은행의 이학규 지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하실 말이 뭔가요?
-혹시 돈 놀이를 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연이율 80 프로 정도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견실한 건설업자가 있는데 분양이 안되서 도산할 지경이거든요. 그래서 겸사겸사 말씀을 올린 겁니다.
-담보가 있나요?
-충남 연기군의 토지를 담보물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하더군요.
순간 도플갱어의 신탁이 뇌리를 번갯불처럼 강타했다.
2000년을 전후해 충남 연기군 일대의 토지를 구입하면 커다란 시세차익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이 원하는 돈이 얼마죠?
-50억 정도를 원하고 있습니다.
-충남 연기군의 토지를 둘러보고 싶군요.
-제가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일정이 잡히는 대로 나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장님.
며칠 후.
명성그룹의 법무실장을 대동한 채 충남 연기군을 내방했다.
약속장소인 별다방으로 들어가자 50대 초반의 남자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그는 연배가 있는 법무실장을 전주로 짐작한 듯 그에게 극진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절로 고소가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법무실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태수 사장님을 모시는 변호삽니다. 그러니 우리 사장님에게 정중하게 인사하시죠."
그의 말이 떨어지자 남자가 겸연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향해 다시 한번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레지 아가씨가 면전에 나타났다.
"커피 3잔 부탁합니다. 설탕 듬뿍 넣어서."
"네. 사장님."
우리는 레지 아가씨가 내온 달달한 커피를 음미하며 본격적인 담론에 접어들었다.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을 갖고 오셨나요?"
내 물음에 조달수 사장이 노란 봉투에서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김변이 살펴보시죠."
"네. 사장님."
김변은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을 세심히 살핀 뒤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담보 없는 깨끗한 물건입니다."
"그럼 이제 실제로 토지를 봐야겠군요. 조사장님이 안내해 주시죠."
"네. 사장님."
조달수는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나와 김변을 인근의 평야 지역으로 안내했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지역을 바라보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한 쾌감이 전신에 팽배해졌다.
"총 몇평이죠?"
내 물음에 조사장이 즉답했다.
"58만평 내욉니다."
"원하시는 액수를 말해보세요."
"급한대로 50억만 융통해 주십시오."
"연이율도 말씀해 보시죠."
"80프로 대의 이율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대출 기간은 제가 정해도 되겠습니까?"
조달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출 기간을 10개월로 한정합시다. 그 안에 이자와 원금을 완납하지 못할 경우 이 토지는 제 소유가 될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장님."
"좋아요. 그럼 내일 서울 사무실에서 김변 입회하에 채무계약서를 작성합시다."
조달수가 감격한 얼굴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조아렸다.
다음날.
조달수가 드림 엔터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김변 입회하에 채무계약서를 작성했다.
국면은행에서 발행한 1억원 짜리 수표 50장을 조달수에게 건넸다.
이로써 채무계약이 종료됐다.
앞으로 10개월 뒤에는 충남 연기군의 대규모 토지가 내 소유로 이전 될 예정이었다.
조사장은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전무했다.
건설업계는 IMF 한파가 맹렬히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형 건설사들도 하루에 수십 개씩 도산하는게 현실이었다.
조사장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돈을 변제할 가능성이 전무했다.
< 드림 엔터 2 > 끝
ⓒ 방탄리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