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수1 >
51화. 인수 1
명우는 아직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녀석의 집 전화와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국번이라는 메시지만 무한 반복 될 뿐이었다.
결국 명우를 만나기 위해 평창동 집으로 찾아갔다.
녀석의 집 대문에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빨간 딱지에는 법원에서 경매에 넘길 예정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명우네 집은 그냥 망한 정도가 아니라 폭삭 망해 버렸다.
여타 재벌이 망했어도 뒷구멍으로 수천억 대의 쌈짓돈을 챙긴 반면 녀석의 집안은 말 그대로 전 재산을 말아먹은 모양이었다.
녀석이 자주 출입하는 이태원의 라운지바를 내방했다.
라운지바에는 외국인들만 한가득이었다.
명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란 테이블에 걸터앉은 채 뉴욕에 있는 김민용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명우네 집이 쫄딱 망했다.
-뉴스에 나오더라. 명성그룹 전체가 도산했다며?
-명우가 잘 가는 곳을 아냐?
-명우를 왜 찾는거야?
-그놈이 잠수를 탄거 같다. 연락두절이야.
-이태원 라운지바랑 파스칼 룸빵 정도밖에 모르는데.
-잘 생각해 봐라. 너랑 명우는 오래된 사이잖아.
-집안끼리야 잘 알지만 자주 놀지는 않았거든.
-혹시 명우 와이프의 연락처를 알고 있냐?
-폰에 저장되어 있을 거다. 잠시만 기다려봐라.
몇 분 뒤, 민용이 알려준 전번으로 연락을 넣었다.
신호가 다섯 차례 정도 갔을 무렵 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명우 친구 이태숩니다.
-아, 태수 씨구나.
-다름이 아니라 명우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도 그이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녀석의 와이프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그 사람과 상관이 없는 처지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남남으로 갈라섰다고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언제 이혼하셨습니까?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 더 이상 묻지 마세요.
그녀는 냉랭한 답변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건 경우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 회사가 망하자마자 이혼을 통고한 모양이다.
새삼 여자들이 무섭다고 느껴졌다.
남자가 수중에 돈이 떨어졌다고 뒤도 안 보고 매정하게 돌아선 탓이었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자욱하게 담배연기를 말아올리며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대성그룹이 케이블 음악 채널과 연예 오락 프로 전문 채널, 멀티플렉스 상영관 등을 시장에 매물로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성그룹 관계자는 적당한 인수자들과 물밑에서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중략······.
내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드는 뉴스였다.
요즘 들어 엔터산업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박초원을 스타로 키운 탓인지 연예 산업이 매우 유망하게 생각 된 탓이었다.
더불어 연예가의 끼 넘치는 사람들과 작업을 같이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들의 열정적인 자세와 말투, 행동 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대성그룹은 미디어 전문 그룹이었다.
그들은 케이블 채널은 물론이고 전국 대도시에 수십 개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화 제작사업 역시 적극 발을 들이고 있었다.
내 구미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날 밤.
고즈넉한 한강변을 거닐며 대성그룹이 매물로 내놓은 케이블 채널과 멀티플렉스 복합 상영관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케이블 채널의 적정 인수가격은 1천억 내외로 예측됐다.
아직 지상파에 많이 밀린 탓이었다.
그리고 멀티플렉스 복합 상영관의 인수가는 최소 9천억에서 최대 1조 3천억 내외로 예상했다.
케이블 채널과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통으로 인수하기 위해서는 최소 1조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했다.
내 수중에는 2천억 상당의 현금이 전부였다.
매물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여러 채의 빌딩을 매각해서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은행 융자도 생각해 봤지만 30프로 대의 고금리 시대에 은행 대출을 끼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일단 나 대신 협상에 나서줄 대리인이 절실했다.
이런 일은 인수 협상 전문 변호사와 세무 회계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개인이 혼자서 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 탓인지 불현듯 김변의 얼굴이 심중에 떠올랐다.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대성그룹의 케이블 채널과 복합상영관을 인수하고 싶은데 저 대신 인수합병 작업에 나서주시겠습니까?
-솔직히 그건 제 역량 밖의 일 같습니다. 인수합병은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으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김변은 내 제안을 정중히 고사했다.
-이번 기회에 국내 최고 로펌인 김앤박의 도움을 받아보시죠?
-김앤박이 그렇게 실력이 좋습니까?
-실력이라기보다 김앤박에는 인수합병 전문 변호사와 세무회계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수임료는 비싸지만 사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수 협상을 이끌어 줄 겁니다.
-그럼 김변이 김앤박 관계자와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김앤박 측에 사장님의 의중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김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하······.
-나중에 찐하게 한잔 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
며칠 후.
서초동에 위치한 김앤박 사옥에 들어가자마자 1층 데스크로 직진했다.
이쁘장한 여직원에게 용무를 말했다.
“최진기 변호사님과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태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인터폰을 연결했다.
몇 분 뒤, 젠틀한 중년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최진기 변호삽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장님.”
최변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김변에게 내 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언질을 들은 모양새였다.
최변의 안내를 받으며 7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여비서가 내온 커피를 음미하며 최변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성그룹의 케이블 채널과 멀티플렉스 복합상영관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건수가 큰 물건이네요. 원하시는 매입 희망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은 최변이 대성그룹의 매각 희망가를 먼저 알아봐 주세요. 로펌 계약은 그 이후에 진행하기로 합시다.”
최변이 내 제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대성그룹과 접촉을 해보겠습니다.”
***
김앤박 로펌의 대표 사무실에 최진기 변호사가 나타났다.
최변은 김성우 대표 변호사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채 진중한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이태수 사장은 조 단위의 사설 펀드를 운용하는 인물입니다. 반드시 우리 고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태수가 원하는 게 뭐지?”
“대성그룹의 매각 희망가를 알고 싶다고 하더군요. 계약은 그 이후에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세무회계 팀을 붙여줄 테니까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해.”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최변은 대표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대성그룹 기획조정실에 전화를 걸었다.
-김앤박 로펌의 최진기 변호삽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실장님을 바꿔 드릴게요.
-네.
잠시 후, 수화기에서 선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대철 기조실장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시장에 매물로 내 논 케이블 채널과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대해 문의를 드리고 싶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 문제라면 만나서 말씀을 나누시죠. 전화상으로는 말하기가 곤란하니까.
-오늘 저녁 6시경에 강남역 인근의 청해 일식당에서 뵙고 싶은데 가능하신가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시간 맞춰 약속장소에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있다 저녁에 뵙겠습니다.
-네. 그때 봅시다. 변호사님.
그날, 저녁.
강남역 인근의 청해 일식당에 최진기 변호사와 대성그룹 성대철 기조실장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뒷편의 룸에서 회와 정종을 즐기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변이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케이블 채널과 복합상영관의 매각 희망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성대철이 즉답했다.
“케이블 채널은 3천억 정도를 원하고, 복합 상영관은 최소 1조 2천억 안팎을 희망합니다.”
최변은 그의 말을 수첩에 받아적은 후 재차 물었다.
“케이블 채널과 복합 상영관에 대출이 있나요?”
“그룹 차원에서 대출받은 거라 인수자가 부담할 융자금은 거의 없습니다.”
“매출과 영업이익 등의 회계장부를 제공할 의향이 있습니까?”
“인수를 희망하시면 언제든지 제출할 생각입니다.”
최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대현의 빈잔에 정종을 가득 따라 부었다.
성대현은 정종을 한입에 털어 넣은 뒤 최변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들은 한동안 술잔만 기울이며 서로를 탐색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성대철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매입을 희망하는 인수자가 누군가요?”
“대규모 사모펀드를 운용하는 분이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최변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드림 엔터 사무실에 최변이 나타났다.
우리는 커피를 음미하며 본론에 돌입했다.
“대성그룹 측은 케이블 채널 3천억, 복합상영관 1조 2천억을 원하고 있습니다.”
“총합 1조 5천억이란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사장님.”
대성그룹은 내가 원하는 인수가 보다 5천억 이상을 더 원하는 모양새였다.
“두 개 합해서 1조 원으로 쇼부를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최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5천억을 다운시키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2천억 내외가 마지노선 같습니다.”
“좀 더 힘을 써보시죠. 김앤박 로펌의 명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차액이 너무 심하면 인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공산이 높습니다.”
“그럼 3천억 정도만 가격을 다운시켜 주십시오. 그리 확약해 주시면 오늘 당장 수임 계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습니다.”
“일단 대표님에게 사장님의 의중을 전달해 보겠습니다.”
최변은 그리 말하며 사무실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그날 밤.
사무실에서 근력운동에 매진할 무렵 최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수가액을 1조 2천억 정도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성공 사례금을 우리가 원하는 액수로 맞춰 주십시오.
-그 문제는 만나서 얘기합시다.
-내일 오후 2시경에 김앤박 로펌으로 와주십시오.
-좋습니다. 내일 봅시다.
다음날 오후.
김앤박 로펌 7층 사무실에 들어가자 최변이 나를 반겼다.
그는 원탁의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테이블에 착석하자 최변이 수임계약서를 들고 왔다.
“수임 계약에 대해서 말씀해 보십시오.”
최변이 즉답했다.
“수임 계약료 200억과 성공사례금 200억입니다.”
총합 400억이었다.
“인수 협상이 실패할 경우 성공사례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일종의 배수진이라고 할 수 있죠. 고객님들에게 우리 김앤박 로펌이 최선을 다해 인수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점을 알리는 것입니다.”
계약서 하단에 내 자필서명을 기입했다.
“계약서에 적힌 김앤박 로펌의 공식 계좌로 200억을 이체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곧바로 국면은행 강남 지점에 전화를 걸었다.
김앤박 로펌의 공식계좌에 200억을 이체한 후 최변의 손을 힘차게 마주 잡았다.
“최변만 믿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인수 협상에 나서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장님.”
“진행 상황을 전화로 알려주십시오.”
“네. 사장님.”
김앤박 로펌을 나온 뒤 인근의 밥집으로 넘어갔다.
오늘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은 탓이었다.
밥집에서 육개장으로 배를 채울 무렵 식당에 익숙한 놈이 나타났다.
녀석은 대학 동기인 김정문이었다.
정문은 오토바이 가죽 패션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식당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이 타고 온 오토바이가 보였다.
정문은 배달용 오토바이를 몰고 있었다.
사법고시에 실패한 뒤 오토바이 배달맨으로 전직한 모양이었다.
명문대 출신의 씁쓸한 현실이었다.
주제넘게 사시에 매달린 탓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정문이 놀란 얼굴로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형을 이런 곳에서 다 보네. 헤헤······.”
녀석은 간사한 미소를 흘리며 맞은편에 털석 주저앉았다.
< 인수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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