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수 3 >
53화. 인수 3
현도 자동차 정현구 사장은 정조영 회장의 큰아들이었다.
그는 현도 그룹의 계동 사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지 않은 탓이었다.
정현구는 테헤란로 인근의 진명빌딩에 잔뜩 눈독을 들였다.
위치도 좋았고 층수도 50층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명빌딩을 계동 본사를 대체할 만한 요지라고 판단했다.
그 무렵, 빌딩 매각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앤드류 루카스 부사장이 계동 사옥을 내방했다.
그는 트램프 회장의 최측근 인물이었다.
정현구와 루카스는 회의실에서 머리를 맞댄 채 의견을 교환했다.
“저희 클라이언트는 한화로 최소 5천억 이상을 원하고 계십니다.”
정현구가 머리를 저었다.
“너무 높은 가격을 부르시는군요.”
“아시다시피 테헤란로는 요지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게다가 층수도 50층에 달할 정도로 규모 있는 빌딩이죠.”
“그래도 우리가 예상하는 가격을 훨씬 상회하는 액숩니다.”
“원하시는 가격을 말씀해 보십시오.”
“4200억이 마지노선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현구의 완강한 태도에 루카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가격과 너무 차이가 나는군요.”
“그러니 우리 입장을 클라이언트 측에 전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루카스는 계동 사옥을 벗어나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드림 엔터 사무실에 중년의 백인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빌딩 매각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루카스 부사장이었다.
우리는 악수를 교환한 뒤 커피를 음미하며 진지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현도 그룹은 4200억을 마지노선으로 책정한 상탭니다.”
“그 이상은 힘들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건가요?”
“태도가 너무 완강하더군요. 4200억 이상을 줄 생각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마땅한 다른 인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루카스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직후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4500억 정도에 만족하시는게 최선 같습니다.”
대성그룹의 케이블 방송과 복합상영관을 일사천리로 인수하기 위해서는 조 단위 자금이 필수였다.
“4500억 선에서 매각 작업을 해보세요.”
루카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로에 있는 대명빌딩도 매각을 추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루카스를 내보낸 뒤 중화 요리집에 전화를 걸었다.
-짬뽕이랑 군만두, 간짜장을 배달해 주세요.
-네. 사장님. 금방 보내드리겠습니다.
단골집이라 그런지 중화요리가 20분 만에 배달됐다.
짬뽕과 간짜장, 군만두를 봄날에 게눈 감추듯 후딱 해치운 뒤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장 분위기는 어때?
-촬영장 분위기가 거기서 거기지, 뭐하러 그런 걸 묻냐?
-알았다. 임마. 초원이 컨디션이나 말해 봐?
-연기 잘한다고 감독이랑 동료 배우들한테 엄청 이쁨을 받더라.
초원은 연기를 정말 잘했다.
타고난 여배우였다.
-남자배우들이 접근할지 모르니까, 그거 철저히 차단해라.
-염려 마라. 형이 다 알아서 하니까.
-그럼 수고.
전화를 끊자마자 중량 스쿼트에 돌입했다.
그 후 쉐도우 복싱을 끝으로 하루 스케쥴을 마무리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TV를 켰다.
9시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재보궐 선거 결과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뉴스 앵커가 낭랑한 목소리로 재보궐 선거 결과를 알리고 있었다.
-한국당이 서울 송파갑과 강동을에서 펼쳐진 재보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중략······.
한국에는 개돼지 같은 국민들이 여전히 많은 모양이었다.
IMF사태를 초래한 한국당의 지지자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기분이 엿같아젔다.
무지몽매한 개돼지 같은 인간들이 한국 땅에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양주 진열장에서 진과 토닉워터를 꺼낸 뒤 달달한 진토닉을 제조했다.
진토닉을 물처럼 들이키며 베란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떨어진 한강변으로 시선을 돌리자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았다.
그때, 소파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파에 놓인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가자 김민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송건설이 도곡동에 트램프 타워에 맞먹는 초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할 예정이거든.
-그래서 용건이 뭔데?
-펜트하우스도 만들 생간인데, 관심 있냐?
-완공이 언젠데?
-2002년 중반에 준공할 예정이야.
-분양가는?
-평당 1천 정도.
-펜트하우스 평수는?
-3백 평 내외고 복층 구조야.
-30억이라는 말이구만.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딱일거 같아서 연락을 했다.
-생각해 볼게.
-펜트하우스를 4채 정도 조성할 예정인데, 그걸로 내 빚을 퉁치는게 어떠냐?
-급한 거 아니니까,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알았다. 그럼 나중에 보자.
-오케이.
***
김앤박 로펌의 대표 사무실에 최진기 변호사가 나타났다.
최변은 김성우 대표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용건을 꺼냈다.
“이태수 사장과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시죠?”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태수는 조 단위 자본을 굴리는 큰손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김앤박의 주요 고객이 될 인물입니다.”
“흐음······.”
김성우는 최변의 제안을 심사숙고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주 금요일 오후 2시경에 가평 클레이 사격장으로 이 사장을 데리고 와.”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표님.”
***
최진기 변호사는 나를 가평 인근의 사격장으로 안내했다.
사격장으로 들어가자 요란한 총성이 장내에 메아리쳤다.
탕탕탕······!
김성우 대표로 짐작되는 남자가 하늘 높이 떠오른 원반을 목표로 산탄총의 방아쇠를 연거푸 잡아당기고 있었다.
탕탕탕탕······!
그는 묵직한 샷건을 비서에게 넘기며 나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보기보다 동안이십니다. 몸도 아주 좋으시고.”
김성우 대표는 부러워하는 눈길로 내 탄탄한 근육질 바디를 훑었다.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동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 화답하며 김성우와 악수를 교환했다.
김성우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클레이 사격을 즐겨보시겠습니까?”
“총을 별로 쏴보지 않아서 좀 힘들 거 같은데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탄약 장전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그만입니다.”
김 대표는 그리 말하며 묵직한 산탄총과 실탄 4발, 귀마개, 조끼 등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4연발 샷건입니다. 한번 손맛을 느껴보시죠.”
“한번 해볼까요?”
“해 보세요. 아주 짜릿한 쾌감을 느끼실 겁니다.”
김 대표가 환한 얼굴로 클레이 사격을 적극 권유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장구를 몸에 착용한 뒤 본격적으로 클레이 사격에 나섰다.
스타트라는 구호가 떨어지자마자 둥그런 원반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녀석들을 목표로 4연발 샷건의 방아쇠를 미친 듯이 잡아당겼다.
그러자 귀청이 떨어질 듯한 총격음이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탕탕탕탕······!
허나, 내가 발사한 총알은 단 한발도 원반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김 대표가 친절한 얼굴로 샷건에 탄약을 재장전한 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다시 한번 해보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트‘라는 단어를 힘차게 외쳤다.
순간 서너 개의 원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푸른 하늘에 치솟았다.
곧바로 녀석들을 목표로 방아쇠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탕탕탕탕······!
아쉽게도 이번에도 역시 내가 발사한 총탄은 아슬아슬하게 원반을 빗겨나갔다.
열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 후로도 미친 듯이 클레이 사격에 매진했다.
나를 약 올리는 원반 녀석들을 초전박살 내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4시간가량 클레이 사격을 즐긴 후 인근의 밥집으로 넘어갔다.
뜨거운 삼계탕을 안주 삼아 김 대표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거대 로펌의 대표답게 아는 게 많았다.
특히 정치판이 돌아가는 속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여당에서 한국당의 이해창 대표를 무너뜨릴 비장의 무기를 준비 중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뭐죠?”
“큰아들의 병역 비리 혐의를 잡은 것 같습니다.”
“한국당 측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당 내에서 이해창 비토론이 비등하고 있어요. 대선에 출마할 경우 1997년과 마찬가지로 백전백패할 것으로 판단하는 거죠.”
“그렇지만 내년에 펼쳐질 총선에서 한국당의 압승이 예상되고 있지 않습니까?”
“총선과 대선은 전혀 다른 얘깁니다. 총선에서는 한국당이 승리할지 몰라도 대선에서는 여당이 이길 확률이 높아요.”
김 대표의 확언이었다.
허투로 넘길 수 없는 발언이었다.
“이제 정치 얘기는 그만하고 인수합병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대성그룹과 새로운 얘기가 오간게 있습니까?”
“대성그룹의 유진용 회장이 임직원들의 고용승계를 강력히 원하고 있습니다.”
“몇 년을 승계해야 하는 건가요?”
“최소 3년입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반대급부가 있는 겁니까?”
“사장님이 원하시는 가격 대에 매각할 의중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괜찮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평직원은 상관없었지만 고위 간부들과 임원들은 무조건 해고하는 게 정석이었다.
밥만 축내는 밥버러지였기 때문이다.
내 속내를 김 대표에게 솔직히 밝혔다.
“평직원들의 고용은 얼마든지 승계가 가능하지만, 임원들은 고용승계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묘안이 있나요?”
“일단 겉으로는 임직원의 고용승계를 보장하는 계약서를 작성한 후, 회사를 완전히 인수하시면 단계적으로 임원과 간부사원들을 정리하시는 겁니다.”
“그건 계약 위반이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의 고용승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유 회장이 딴지를 걸지 못할 겁니다.”
“노사 분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요?”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간부급 사원들은 기본적으로 노조에 가입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한국의 노동법이 원래 그렇습니다.”
김 대표의 명쾌한 답변이었다.
“그럼 유 회장 측에게 임직원들의 고용승계를 3년 동안 보장한다는 점을 전해 주십시오.”
“오늘 중으로 유 회장에게 사장님의 의중을 전하겠습니다.”
김성우와 만남을 끝마친 후 드림 엔터 사무실로 들어갔다.
명우는 짬뽕 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초원이는?”
“집에 보냈지.”
“너도 집에 들어가지 뭐하러 사무실에 있냐?”
“그냥 술이나 빨려고.”
“술집에서 마시면 되잖아.”
“자식아. 돈을 아껴야지. 내가 아직도 재벌로 보이냐?”
“한 달에 천만원 씩 꼬박꼬박 월급을 타 먹는 놈이 술집 갈 돈도 없냐?”
“암튼 너도 술이나 빨아라.”
명우는 그리 말하며 빈 잔에 소주를 콸콸 따랐다.
녀석이 건넨 소주를 원샷하자 알딸딸한 뒷맛이 목젖에 느껴졌다.
이럴 때는 얼큰한 짬뽕 국물이 최고다.
짬뽕 국물을 들이키자 그제야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담배를 입가에 베어 문 채 담배 연기를 자욱이 피워올리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나른한 감각이 온몸에 팽배해졌다.
그때,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뭘 하길래, 그리 바쁜 거냐?”
“그럴 일이 있다.”
“솔직히 말해 보라구. 대체 무슨 지랄을 하는 거야?”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관심은 넣어둬라. 그럼 내일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한국당의 이해창 대표는 뒷 끝이 심한 남자였다.
그런 탓인지 김영오 전 대통령을 누구 보다 싫어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영오 계파 의원들을 모조리 물 먹일 생각이었다.
공천권을 무기로 그들을 당에서 몰아낼 계획이었다.
이해창은 그만한 힘이 있었다.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질주한 탓에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당내 영향력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해창은 자택으로 심복을 불러들였다.
그는 심복에게 얄팍한 서류 한 장을 넘겼다.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개자식들을 공천에서 반드시 탈락시켜!”
그의 엄명이 떨어지자 심복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복명했다.
“대표님이 명하신 대로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김영오의 개들을 당에서 모조리 몰아낼 테다!”
이해창의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이 일렁였다.
< 인수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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