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작 2 >
55화. 새로운 시작 2
하수용 감사실장이 드림 엔터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대성 케이블의 유진혁 전무가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잡았습니다.”
유진혁은 대성그룹 유진용 회장의 사촌 동생이었다.
감사 보고서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은 뒤 하수용에게 나직이 말했다.
“구두로 보고하세요.”
“네. 회장님.”
하수용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말을 길게 이었다.
“유진혁은 외화와 드라마를 수입하는 대가로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아 챙겼습니다.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판권을 구입한거죠.”
“일종의 빽마진 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가 조성한 비자금의 상당 부분이 유진용 회장에게 건너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수용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유진혁 전무 외에도 고위 간부들 태반이 업무추진비 명목으로 거액의 회삿돈을 탕진했습니다. 해외여행을 간다거나 유흥비로 전용하는 사례가 수두룩합니다.”
“오기용 상무의 경우 판공비를 고급 외제차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더군요.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나 다름 없습니다.”
“대성 케이블과 복합 상영관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누구죠?”
“유진혁 전무와 오기용 상무를 필두로 최소 30명 이상의 인물들이 거액의 회삿돈을 축내는 주범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하수용이 두 눈을 번뜩이며 진중한 언사를 내뱉었다.
“유진혁의 경우 유진용 회장과 연계된 인물이라 하루빨리 법적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그 문제는 최변과 상의할테니, 하 실장님은 비리자료 수집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넵. 회장님.”
하수용을 내보낸 뒤 최진기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성 케이블의 유진혁 전무가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잡았습니다.
-확실한 정본가요?
-검사 출신의 하수용 실장이 확인한 사항입니다.
-유 전무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요?
-아무래도 유진용 회장의 오더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유회장과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
서울 모처에서 대성그룹 유진용 회장과 만남을 가졌다.
감사팀이 조사한 자료를 건네자 유회장이 의아한 안색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게 뭡니까?”
“보신대로 우리 감사팀이 조사한 자룝니다. 한번 읽어보시죠.”
유회장이 봉투에서 감사자료를 꺼내서 차분히 읽어내려갔다.
그러기를 얼마 후 핼쑥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에게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요?”
“비자금 조성을 즉각 중단하십시오. 만약 오늘 이후에도 회삿돈을 계속 횡령하신다면 검찰에 유회장님을 고발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기운 빠진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약서에 삽입된 임직원 3년 고용승계 보장 문구를 평직원 고용승계 문구로 변경해 주십시오.”
“흐음······.”
유 회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 감사팀은 임원들과 고위 간부들의 비리자료를 다수 확보하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콩밥을 먹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 요구를 수용하십시오. 나 역시 쓸데없이 회사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유 회장은 내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칼자루를 쥔 쪽은 나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 사장이 원하는 대로 할테니, 제발 내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법적으로 문제가 많지만 유 회장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할 수 없군요. 그들을 해직처리 하는 선에서 일을 매듭짓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며칠 후, 최진기 변호사와 대성그룹의 합의 하에, 계약서상에 삽입된 임직원 고용승계 3년 보장 문구를 평직원 3년 보장 문구로 변경했다.
***
이명복은 아름다운 산타모니카 비치를 거닐며 자신의 삶을 차분히 반추했다.
그는 현도건설 사장을 역임하며 암암리에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아 챙겼다.
그 덕분에 수천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회사에 손해가 되는 공사 수주를 자기 멋대로 밀어붙인 대가였다.
허나, 이제 그는 빈털털이 신세였다.
린다 박 남매에게 전 재산을 사기당한 탓이었다.
이명복은 그들을 미국 검찰에 고소하고 싶었지만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명목상 그는 진경철의 사모펀드에 자기 책임하에 전 재산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법률은 주식과 펀드 투자에 관해서 본인 책임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이명복은 진경철을 사기혐의로 고소 할 수 없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서울시장직에 미친 듯이 집착했다.
대권으로 가는 발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명복의 목표는 대통령이었다.
그가 대통령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그 말인 즉 마음만 먹으면 나랏돈을 얼마든지 횡령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의 두 눈에 격렬한 탐욕이 파도치듯 일렁였다.
‘반드시 한국의 대통령이 되고 말 테다!’
이명복에게 한국의 대통령직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
신흥빌딩과 대명빌딩, 오성빌딩을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에 1조원 대의 실탄이 ts 인베스트먼트의 국내 계좌에 입금됐다.
국내계좌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대성그룹 측에 5천억 대의 중도금을 전달했다.
그날 이후, 김앤박 로펌의 세무회계 팀이 대성 케이블과 멀티플렉스의 재정상황을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
박초원이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또다시 시청률 대박을 쳤다.
초원은 은막의 여왕으로 자리를 잡았다.
탁월한 비쥬얼과 뛰어난 연기력, 높은 스타성을 두루 겸비한 탓이었다.
그런 연유로 광고 제안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출연 제의 역시 산더미처럼 몰려들었다.
명우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초원을 케어하는게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광고주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영화 관계자들과 미팅이 줄줄이 사탕처럼 잡혀 있는 까닭이었다.
더구나 녀석은 초원을 자기 혼자 케어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탓인지 명우가 날마다 인력충원을 요청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드림 엔터 사무실에 나타나자마자 볼멘소리를 토해냈다.
“로드 매니저를 언제 충원해 줄거냐?”
명우가 목소리를 높이며 하소연했다.
“방기훈이 조금 있으면 병원에서 퇴원하니까 조금만 더 수고해라.”
“아직 뼈도 여물지 않은 놈을 어디에 써먹냐!”
녀석의 말대로 방기훈은 깊스를 푸른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현장에 곧바로 투입하기에는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알았다. 네가 알아서 로드를 구해 봐라. 대신 한 달에 100만원 정도만 지급해.”
“진작 그럴 것이지.”
명우는 그리 말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누구한테 거는 거야?”
“집구석에서 쳐노는 동생 놈한테 건다. 왜?”
“명철이한테 거는 거냐?”
“그래. 그러니까 좀 조용히 하라고.”
명철은 명우의 친동생이었다.
그놈 역시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거지 신세였다.
부친에게 이렇다 할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상태에서 회사가 쫄딱 망했기 때문이다.
1시간 후.
희여멀건한 녀석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명우의 동생인 명철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헤헤······.”
명철 역시 명우처럼 넉살이 좋았다.
집안이 망했어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형 밑에서 일 좀 해라. 니가 하는거 봐서 월급도 올려줄 테니까.”
“넵. 형님.”
명철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대답했다.
“니 친형이 시킨 대로 하면 될 거다.”
그리 말하자 명우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 부터 박초원을 니가 맡아라.”
그러자 명철이 좋아죽는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탑 여배우를 케어 한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그때, 사무실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묘령의 여인이 등장했다,
박초원이었다.
그녀에게 명철을 소개했다.
“아는 동생이니까 앞으로 잘 지내라.”
초원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명철에게 목례를 취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명철이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박초원 씨를 만나게 되어서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헤헤······.”
초원을 면전에서 목도하자 이성을 상실한 모양새였다.
하긴, 그녀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떠오른 상태였다.
명철의 저런 과한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날부터, 명철은 초원의 로드 매니저로 전직했다.
***
대성 케이블과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인수대금을 완납하자마자 최진기 변호사와 하수용 감사실장을 대동한 채 상암동을 향해 보무도 당당히 큰 발걸음을 내딛었다.
서울시는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하기 위해 상암동에 거대한 방송가 타운을 조성하고 있었다.
대성 케이블은 서울시에서 매입한 상암동 부지에 재빠르게 방송사 건물을 완공한 후 그곳으로 입주한 상태였다.
대성 케이블 방송사의 신축건물은 25층 높이였다.
높이는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너른 대지를 차지한 탓에 건평은 넓은 편에 속했다.
우리 일행은 24층에 위치한 대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방송사 간부들이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상석에 좌정하자마자 유진혁 전무와 오기용 상무를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 전무와 오기용 상무는 일주일 안에 자진 퇴사하십시오.”
순간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착 가라앉았다.
“당신들이 해쳐먹은 돈이 장난 아니게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수 초기부터 잡음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으니까 알아서 자진 퇴사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유진혁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보세요.”
“물이 맑은 곳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천적에게 손쉽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집니다. 너무 깨끗한 척, 올곧은 척 하시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뭡니까?”
“신입 회장님에게 조언을 올리는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유 전무님이 뭔가를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당신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콩밥을 먹일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해요.”
그리 말하자 유진혁이 온몸을 부들거리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싸가지가 영 아니었다.
결국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기로 마음먹었다.
“하 실장님. 유 전무에게 감사 자료를 보여주시죠.”
“넵. 회장님.”
하수용은 그리 말한 뒤 서류 가방에서 감사 서류를 꺼내서 유진혁에게 전달했다.
유진혁은 감사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후 기겁한 얼굴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보안 요원들은 지금 당장 유 전무를 끌고나가세요.”
내 명이 떨어지자 장내에 우두커니 서 있던 건장한 체격의 양복사내들이 유진혁을 회의실 밖으로 짐짝처럼 끌고 나갔다.
“이기용 상무님도 보셨겠지만 유 전무님은 아주 간뎅이가 많이 부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 상무님도 조사해 보니 유 전무와 막상막하더군요.”
이기용이 겁먹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시가 2억원에 상당하는 고급 외제차를 판공비로 떠억하니 구입하는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나오신 겁니까?”
순간 이기용이 온몸을 벌벌 떨며 제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경찰에 고발하기 전에 알아서 회사에 고급 외제차를 반납하세요. 그리고 자진 퇴사 절차도 밟으시고.”
보안요원을 손짓하자 이기용 역시 장내에서 짐짝처럼 치워 버렸다.
되먹지 않은 개자식 두 마리를 처리한 뒤 좌중을 향해 지엄한 명을 내렸다.
“앞으로 회삿돈을 함부로 횡령하거나 배임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 즉시 경찰에 고발할 겁니다.”
생수를 들이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회사는 내 사유재산입니다. 그 점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내 지엄한 언사에 좌중의 인사들이 하나같이 겁먹은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이 회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저들에게 확실히 알려줄 필요성이 있었다.
좌측 맨 끝자리에 앉아 있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착용한 아저씨를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뿔테 안경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이, 이용섭입니다.”
“당신 직책도 말해 보세요.”
“편성 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편성 부장이 하는 일이 뭐죠?”
“말 그대로 방송 편성을 책임지는 직책입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대성 케이블의 시청률이 밑바닥을 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새로운 시작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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