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지니스 3 >
민용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즐길 무렵, 장내에 50대 초반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목례를 취한 뒤 진중한 어조를 내뱉었다.
“어르신께서 이태수 회장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민용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랑 만나봐라. 너에게 할 말이 있는 거 같더라.”
“알았다.”
남자가 나를 2층에 있는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에 들어가자 책상에 앉은 채 나 홀로 줄담배 태우는 김건영 회장이 보였다.
그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책상 앞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김 회장이 남자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남자가 나가자마자 김 회장이 용건을 꺼냈다.
“아들 친구니까 편하게 말을 놓겠네.”
“편한 대로 하십시오.”
“고맙군. 내가 이 회장을 청한 이유는 삼성동 근처의 빌딩에 관심이 있어서일세.”
나는 삼성동 인근에 37층 내외의 업무용 빌딩을 소유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빌딩 매각을 트램프 회장의 부동산 회사에 일임한 상탭니다.”
“그렇지만 빌딩의 소유주는 이 회장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저는 골치 아픈 매각 작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김 회장이 감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소문대로 스케일이 보통이 아니구만.”
“아웃소싱이 그래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각자의 맡은 분야에서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는 거죠.”
“그렇지만 오늘은 내 부탁을 들어주게. 물론 이 회장에게 손해 될 거래를 제안할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네.”
대한민국의 최고 재벌이 이렇게 나오자 다른 수가 없었다.
일단 그의 제안을 들어보는 게 급선무였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삼성동 빌딩을 3400억에 인수할 의향이 있네. 이 정도면, 이 회장 입장에서도 좋은 거래 조건 아닌가?”
나는 삼성동 빌딩을 2년 전에, 1400억 정도에 매입했다.
김 회장의 제안에 응한다면 2년 만에 2천억에 달하는 엄청난 시세차익을 볼수 있었다.
“회장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제야 김 회장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고맙네. 마음이 결정되면 즉각 연락을 주시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에게 정중히 작별 인사를 고한 뒤 1층으로 내려갔다.
민용이 호기심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가 뭐라시던?”
“사업 얘기를 좀 했다.”
“그게 뭔데?”
“빌딩 매각 문제.”
“어디 빌딩?”
“삼성동에 있는 37층짜리 빌딩.”
민용이 두 눈을 반짝이며 거듭 물었다.
“아버지가 얼마를 제시했냐?”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이제 일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빨러 나가자.”
“그럴까?”
“그리고 명우도 부르자.”
민용이 얼굴을 움찔하며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그놈은 이제 로열패밀리도 아니잖아. 만나기가 좀 그래.”
“왜?”
“돈 빌려달라고 난리 칠까 봐 그러지.”
“에휴······ 걱정도 팔자다.”
“암튼 만나기 꺼려지니까 오늘은 부르지 말자.”
녀석은 사람을 가렸다.
같은 신분이 아니면 친교를 도모하는 행위를 극히 꺼려했다.
어렸을 때부터 받은 황제교육의 폐단 같았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에 들어가자 마호가니 책상 위에 두꺼운 대본 책자가 보였다.
김용대 드라마 국장이 가져다 둔 대본이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천국의 사다리‘란 가제가 붙은 대본을 차분히 읽었다.
대본의 주요 스토리는 대기업 공장에서 일하는 공순이가 정체를 숨긴 재벌 3세 공돌이와 알콩달콩한 사랑을 키워나간 후 종국에는 결혼에 골인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본이었다.
대본이 너무 심심했다.
그럴듯한 출생의 비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폰을 누르자 이미경 대리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피를 갖다 드릴까요?
-그건 됐고, 김용대 국장을 회장실로 호출하세요.
-네. 회장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몇 분 뒤, 김용대가 헐레벌떡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용대에게 지엄한 하명을 내렸다.
“스토리를 고쳐야 할 거 같습니다.”
“대본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네. 많이 안 들어요.”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요?”
“출생의 비밀이 없어요. 시청자들에게 극적인 반전을 주기 위해서는 출생의 비밀이 필요해요.”
용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여주와 남주를 이복동생으로 설정하세요. 그리고 나중에 두 명 모두 자살하는 것으로 드라마를 끝냅시다. 새드엔딩을 만들자고요.”
녀석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그런 식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면 막장 드라마라고 시청자들에게 쌍욕을 먹을 겁니다. 우리 방송사 이미지에도 나쁜 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시청률을 올리고 봐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수연 작가한테 내가 말한 대로 대본을 수정하라고 전하세요.”
“이 작가가 말을 안 들을 겁니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거든요.”
“그럼 그 여자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용대가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
다음날.
회사 구내식당에서 얼큰한 육개장으로 배를 채운 뒤 회장실로 들어갈 찰나, 이미경 대리가 보고를 올렸다.
“안에 이수연 작가가 와 계세요.”
“커피는?”
“갖다 드렸어요.”
“수고했어요. 그럼 나도 커피 한잔 부탁해요.”
“네. 회장님.”
미경이 다소곳이 화답하며 탕비실로 조신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수연이 소파에 앉은 채 커피를 홀짝이는 광경이 보였다.
그녀에게 목례를 취한 뒤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수연에게 본론을 내뱉었다.
“남주와 여주를 이복동생으로 설정하세요. 그리고 두 명 모두 마지막에 자살하는 새드엔딩으로 대본을 수정하십시오.”
그녀가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바락 대들었다.
“대본은 제 권한이에요. 회장님이 감 놔라 배 놔라 하실 수 없다고요!”
스타 작가라 그런지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돈을 받아먹는 하청업자에 지나지 않았다.
“내 요구를 끝내 거절하신다면 다른 작가를 섭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약을 위반하실 생각인가요?”
“뭔가 착각을 하시나 본데 계약을 위반하신 건 이 작가 쪽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계약서 하단에 드림 방송사 측과 필요할 경우 대본을 수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안 믿기시면 제가 직접 보여드리죠.”
그리 말하며 인터폰을 눌렀다.
-법무실장에게 이수연 작가와 작성한 계약서를 갖고 오라고 전하세요.
-네. 회장님.
이수연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나를 탐색하듯 살폈다.
그때, 회장실에 법무실장이 나타났다.
법무실장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살펴보세요. 내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수연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계약서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기를 얼마 후, 기운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골탕 먹이시는 건가요?”
“계약서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자필 서명을 기입한 이 작가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써놨으니까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한 거잖아요!”
그녀의 입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암튼 우리는 계약서대로 일을 진행할 뿐입니다. 그러니 내 말대로 대본을 수정하시든가, 그게 싫다면 계약금에 3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우리 회사에 지불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이수연은 분한 심경이었다.
계약서를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자신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상대방의 약점을 치졸하게 이용하는 이태수에게 진정으로 분노했다.
허나, 그녀는 힘없는 일개 작가에 불과했다.
반면 상대는 방송국 회장이었다.
그녀가 상대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거물이었다.
결국 수연은 허탈한 심경에 휩싸인 채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대본을 수정했다.
이태수가 원하는 대로 남주와 여주를 이복동생 관계로 설정한 것은 물론이고 종국에는 두 명 모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충격으로, 비참하게 자살하게 만든 것이다.
***
내가 좋아하는 막장 로맨스 극으로 대본을 수정하자마자 곧바로 남주 캐스팅에 나섰다.
원래는 대박 엔터 소속의 남배우를 남주로 활용할 생각이었지만 드라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네임밸류가 있는 남주가 절실했다.
결국 브라운관에서 나름 잘나가는 이정섭을 남주로 기용했다.
대가로 회당 1500만원에 달하는 개런티를 지급했다.
***
늦은 밤.
압구정 아파트로 박초원과 방기훈을 불러들였다.
“회당 출연료로 1500만원을 줄게. 그러니 천국의 사다리에 출연해라.”
“싫어. 아무리 못해도 2000만원은 받아야겠어.”
“너, 정말 이렇게 말을 안 들을래?”
“그런 말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 내 체면이 걸린 문제라고!”
초원은 당최 말을 들어 처먹지 않았다.
배우 뽕이 잔뜩 들어찬 모양새였다.
“원하는 대로 2천을 줄 테니까 내일부터 수원 공장에서 촬영에 돌입해.”
그제야 그녀가 환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출연료도 선지급으로 챙겨주라. 부탁할게. 오빠야.”
“내일 계좌에 쏴줄 테니까 대본이나 외워 둬.”
그리 말하며 장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훈에게 명령을 내렸다.
“초원이를 집에 바래다줘라.”
녀석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복명했다.
“넵. 회장님.”
***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오전 회의를 주재했다.
드림 방송과 드림 박스 고위 간부들은 모두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드림 엔터의 앞날이 밝다고 자화자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궤변이 끝나자마자 재무실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재무실장이 침중한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드림 케이블은 2분기에도 70억대의 적자를 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재무실장 잘못이 아니었다.
지상파 3사가 장악한 방송시장이 문제였다.
그놈들 때문에 광고수익이 형편없었다.
“아무래도 긴축재정에 돌입하시는 것이 최선 같습니다.”
“긴축재정이라······?”
“그렇습니다. 회장님. 불요불급한 조직을 폐쇄하거나 통폐합하는 조치가 절실합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법무실과 감사실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폐합한다면 업무의 효율을 제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산도 대폭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재무실장은 목이 탔는지 생수로 목을 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재무 회계실과 총무실 역시 업무가 자주 겹치는 대표적인 조직입니다. 모두 회사의 살림을 책임지는 부서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통폐합이 필요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법무실과 감사실은 겹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모두 법과 회사의 규율을 관장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통폐합 방안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하세요.”
“넵. 회장님.”
회의를 끝낸 뒤 하수용 감사실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조만간 법무실과 감사실을 통폐합 할 예정이니, 하 실장이 옥석을 가리는 작업을 해주세요.”
하수용이 반색한 얼굴로 화답했다.
“책임지고 쓸모없는 곁다리들을 가차 없이 쳐내겠습니다.”
“법무실의 핵심 멤버들을 모조리 자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세요. 모두 변호사라 그런지 연봉이 터무니없이 높아요.”
“저도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법무실이나 감사실은 조직의 수장 정도만 율사 출신으로 임명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그래서 하 실장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거에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수용은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회사에서 업무를 종료한 후 드라마 촬영이 한창인 수원 인근의 전자공장을 내방했다.
초원은 대본 내용대로 공순이로 분한 채 연기에 한창이었다.
그녀는 전자제품의 부품을 조립하는 공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잘생긴 훈남 공돌이가 그녀 옆에 나타났다.
그놈은 초원에게 뜨거운 시선을 퍼부으며 우유와 팥빵을 건넸다.
직후 낭랑한 목소리를 과시하며 그녀를 유혹했다.
“일이 끝나면 영화라도 같이 볼까?”
그러자 초원이 속으로는 좋아 죽으면서도 겉으로는 튕기는 연기를 우아하게 해 보였다.
“싫은데요. 그러니까 나한테 관심 끄시죠.”
그때, 드라마의 총감독인 김용대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컷······!”
드디어 한 씬이 끝난 모양이었다.
< 비지니스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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