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제작 2 >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상암동 인근의 프린스턴 호텔을 내방했다.
나름 오붓한 점심 식사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주 실장에게 지엄한 명을 하달했다.
“레스토랑에 있는 손님들을 모두 내보내.”
“알겠습니다. 회장님.”
어차피 레스토랑에는 양놈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전부였다.
뜨내기손님들은 내 알 바 아니었다.
주 실장에게 말을 전해 들은 레스토랑 매니저가 외국인 손님들을 부랴부랴 내보냈다.
직후 내 앞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회장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매니저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예의범절을 아는 인간이었다.
녀석에게 물었다.
“여기 호텔에서 제일 잘하는 게 뭐야?”
“주방장이 중국 사람인지라 제비집과 송로버섯 요리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좋아. 그걸로 갖고 오고, 술은 와인과 꼬냑으로 가져와.”
“몇 인분을 갖다 드릴까요?”
“우리 애들 숫자에 맞춰서 알아서 갖고 와.”
매니저가 공손한 얼굴로 화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회장님.”
테이블을 4개 정도 이어 붙이자 우리 일행이 다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비서와 경호원들은 입맛을 다시며 산해진미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했다.
주 실장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운수가 대통했다.
내 덕분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요리를 맛보는 행운을 누린 탓이다.
매니저의 확언대로 제비집과 송로버섯 요리는 맛이 일품이었다.
꼬냑과 와인도 달달한 풍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은 고급 음식을 배 터지게 흡입한 뒤 회사를 향해 보무도 당당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
주말을 맞아 압구정 아파트에서 할 일 없이 소일하며, 드림 케이블의 드라마 채널에서 절찬리에 방영 중인 천국의 사다리에 이목을 집중했다.
답보상태에 빠진 시청률을 반등시킬 묘안을 짜내기 위해 나름 머리를 굴렸지만,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천국의 사다리는 2.4프로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드라마가 중반을 향해 내달리는 상황임에도 당최 시청률이 오르지 않았다.
온갖 막장 요소를 버무렸지만 시청자 유입이 한계에 부딪힌 형국이었다.
예전 보다 두 배 이상 시청률이 상승했지만. 여전히 내 성에 차지 않았다.
내심 4프로 내외의 시청률을 기대했으나, 케이블 방송 특성상 4프로 내외의 시청률은 감히 기대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지상파 드라마의 벽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나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찰나 휴대폰 벨이 요란스레 울려 퍼졌다.
폰을 받자 민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시간 있냐?
-왜?
-시간 되면 고기나 먹자고.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고깃집 근처에는 발도 안 들이는 놈이.
-나도 이제 서민들처럼 고깃집에서 소주도 마시고, 삼겹살도 먹어봐야지.
-안 하던 짓을 하면 명줄이 오늘내일한다던데, 네놈이 그 꼴이구나.
-그럴 일이 있으니까, 압구정동 주변에 있는 고깃집에서 소주나 마시자.
-움직이기 귀찮으니까 네가 지금 내 집에 와라.
-알았다. 자식아.
40분 후, 민용이 내 집에 나타났다.
녀석의 곁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피아가 있었다.
소피아에게 영어로 인사를 건넨 뒤 민용에게 한국어로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민용이 한국어로 대꾸했다.
“아버지가 소피아를 인정하셨다.”
“마누라는 어쩌고?”
“이혼해야지.”
“자식은?”
“마누라가 원하면 포기할 생각이다.”
“니 아부지도 허락하신 거냐?”
민용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소피아를 한국으로 데려왔지. 암튼 어서 나가자.”
잠시 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는 아파트 주변의 삼겹살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용과 소피아는 삼겹살을 처음 먹어서 그런지 기름기가 많다며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결국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소갈비 집으로 넘어갔다.
소피아는 투 플러스 등급의 한우를 고운 입으로 잘도 먹으며 연신 찬탄을 쏟아냈다.
“오마이 갓! 베리베리 굿 카우!”
민용 역시 소갈비를 무척 좋아했다.
집에서 많이 먹어서 그런 거 같았다.
우리는 걸신들린 아귀처럼 소갈비에 오롯이 집중했다.
그런 덕분인지 20분 만에 10인분에 달하는 소갈비를 뚝딱 해치웠다.
결국 우리는 또다시 소갈비 6인분을 추가로 주문했다.
세 명이서 16인분에 달하는 소갈비를 배가 터지도록 음미한 후 인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민용이 한국어로 속내를 밝혔다.
“아버지가 지주회사의 과반수 지분을 물려주셨어. 명실상부한 그룹의 후계자가 된 거지.”
“니가 원하는 대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거냐?”
“그런 셈이지. 그렇지만 아버지가 있으니까 당분간은 눈치를 좀 봐야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후후······.”
“지나고 보니까 그런 것 같다. 항상 엄하시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저리 변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러니까 니 아부지한테 잘해라. 그럼 형은 이만 일어날란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소피아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보자. 소피아.”
“오늘 즐거운 시간이었어. 나중에 다시 봐.”
소피아는 그리 화답하며 나를 가볍게 포옹했다.
***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김용대 드라마 국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용대는 공손한 태도로 시립했다.
녀석은 똘기가 만만치 않았다.
나랑 비슷한 과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방송국에는 용대처럼 똘기가 충만한 놈들이 필요했다.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막장 요소가 뭐가 있을까?”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하대 조의 어투가 흘러나왔다.
요즘 나는 존댓말보다 반말을 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나름 회장직에 적응한 탓이었다.
“흐음······.”
용대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녀석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용대가 두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남주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걸로 대본을 수정하면 어떨까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자, 녀석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남주와 여주가 동반 자살하는 거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더 나을 거 같거든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당신이 알아서 대본을 수정해.”
“감사합니다. 회장님.”
용대를 내보낸 후 재무실장 김성덕을 불러들였다.
“천국의 사다리에 투입된 총 자금을 말해 보세요?”
“대략 60억 안팎입니다.”
“광고 판매는?”
“현재까지 12억 남짓입니다. 막방까지 간다 쳐도 20억을 넘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최소 40억 이상 적자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드라마는 돈 잡아먹는 하마였다.
그렇지만 반드시 드라마 시장에서 성과를 내야 했다.
그래야 광고 판매가 급증하고 방송사의 네임벨류가 향상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상파를 능가하는 케이블 방송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상파를 넘어서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에서 물러 선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재무실장을 내보낸 후, 드림박스의 장준기 전무를 회장실로 호출했다.
“영회시장을 장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준기가 즉답했다.
“제작과 배급, 상영을 수직 계열화한다면 얼마든지 영화 시장을 장악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를 동시에 설립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럼 당신이 알아서 제작사와 배급사를 만드세요.”
녀석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본금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입니다.”
“재무실장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그와 자본금 문제를 협의하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장준기가 좋아죽는 얼굴로 넙죽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제작사와 배급사 네이밍에는 드림이란 단어를 무조건 배제하세요. 남들에게 책잡힐 우려가 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장 전무를 내보낸 후 이미경 대리에게 콜을 넣었다.
-달달한 커피를 갖고 오세요.
-네. 회장님.
이미경이 내온 커피를 음미하며 재무실장에게 인터폰을 넣었다.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 설립 문제를 장 전무와 협의하세요.
-회장님. 사내 유보금이 거의 바닥난 형편이라 자금을 지원할 여건이 안 됩니다.
-부족한 자금은 내가 따로 지원할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인터폰을 끊은 뒤 창가를 할 일 없이 서성일 찰나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핸드폰을 받자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일 사모펀드와 50여 채에 달하는 빌딩 매각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계약금으로 미화 10억 달러를 받았고, 중도금 20억 달러와 잔금 23억 달러를 추가로 지급받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계약금 전액을 HBC 은행에 입금했으니 잔고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죠. 그럼 나중에 저녁이라도 같이합시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회장님.
통화를 끝낸 뒤 책상에 앉았다.
데스크탑을 켜자마자 HBC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계좌번호와 클라이언트 코드를 입력하자 TS 인베스트먼트 계좌의 잔고가 드러났다.
<1,236,736,000 USD>
12억 달러를 상회하는 자금이 잔고에 쌓여 있었다.
루카스가 10억 달러를 입금한 탓에 금세 돈이 불어났다.
실탄이 마련됐으니 이제 영화시장을 먹는 일만 남았다.
나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을 몸소 실천할 생각이었다.
영화판을 장악한 뒤 방송 시장마저 먹을 심산이었다.
그만한 자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김용대를 일식당으로 불러냈다.
그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싱싱한 회를 안주 삼아 정종을 물처럼 들이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용대에게 본론을 꺼냈다.
“지상파를 능가하는 케이블 방송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녀석이 시원시원하게 즉답했다.
“미국의 드라마 전문 케이블 방송인 HBO를 적극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HBO는 전 세계 최고 최대의 유료 드라마 방송국이었다.
“그들은 지상파를 능가하는 수익과 시청자들을 고루 확보하고 있습니다. 양질의 드라마를 시청자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현실에는 맞지 않잖아. 누가 돈을 내고 드라마를 보겠어?”
“제 말의 요점은 HBO처럼 양질의 드라마를 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양질의 드라마가 대체 뭐야?”
“HBO 방송국은 장르 드라마를 주로 제작합니다. 한국 드라마처럼 사랑 타령만 하는 작품을 철저히 배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죠.”
녀석은 정종을 시원하게 원샷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HBO처럼 장르 드라마를 제작해야 합니다.”
“장르 드라마가 돈이 될까?”
“얼마든지 돈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2030 세대는 사랑 타령만 해대는 한국 드라마에 식상해 한지 오랩니다. 그들의 니즈에 맞춘 장르물을 대대적으로 론칭 한다면, 지상파를 능가하는 드라마 왕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이 들겠군.”
“과감한 투자를 해야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돈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는 거니까, 당신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건 그렇고, 장르에도 종류가 많잖아. 수사물도 있고, 전문가물도 있고, 미스테리물도 있고, SF도 그렇고.”
“일단 수사물 장르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를 말해 봐?”
“미국은 수사물이 대세를 장악한 지 오랩니다.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반증이죠. 한국도 수사물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수사물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장르잖아. 그렇지만 한국 남자들은 드라마를 잘 안 본다고.”
“회장님. 장르물은 안방시장을 떠난 남성 시청자들을 주 타겟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여성 시청자들을 버리자는 말인가?”
“여자들을 대상으로 일일 막장 드라마를 론칭하면 어느 정도 보완이 될 겁니다.”
김용대는 장르물과 일일 막장 드라마를 동시에 론칭 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지만 나름 근거가 있는 제안이었다.
장르물로 남성 시청자들을 잡고, 일일 막장 드라마로 여성들을 끌어들인다면 지상파에 버금가는 드라마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 드라마 제작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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