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69화 (158/200)

< O2 아레나 2 >

한성그룹의 한기영 부회장은 무척 애가 탔다.

거의 1년 이상 큰아들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기영은 검경의 유력자들에게 큰아들을 찾아 달라고 숱하게 청탁했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한성철은 1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그는 클럽 사건을 진두지휘한 김태섭 차장 검사에게 아들 문제를 청탁하기로 마음먹었다.

***

서울 모처.

김태섭은 공손히 앉아 있는 한기영을 무표정한 얼굴로 주시하며 담배 한개피를 물었다.

그는 기영을 향해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뿜어내며 나직한 어조를 내뱉었다.

“나를 청하신 용건이 뭡니까?”

“아들놈이 실종된 문제로 차장님을 찾아뵙습니다.”

태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영이 애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들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러니 차장님이 제발 좀 힘을 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볼 테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기영이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태섭에게 넙죽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차장님.”

태섭은 기영이 은근히 건넨 억대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를 양복 상의 주머니에 수습한 뒤 장내에서 유유히 모습을 감췄다.

***

늦은 밤.

압구정 아파트에서 취침에 들 찰나, 김태섭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이제 그만 한성철을 풀어줘야 할 시점 같습니다.

김태섭은 초장부터 감히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얘긴 뭐하러 꺼내시는 겁니까?

-한성철의 부친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게, 영 마음에 걸립니다.

-방금 한기영을 만나고 왔습니다.

-한기영이 누구죠?

-한성철의 부친입니다.

-그자가 뭐라고 한 겁니까?

-저에게 아들놈을 꼭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이 자식은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 망각한 모양새였다.

내 입에서 곱지 않은 언사가 절로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우리 차장 검사님은 그 대가로 억대의 금품을 수수하신 거 아닌가요?

수화기에서 김태섭의 겸연쩍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면목 없지만 회장님의 말씀대로 본의 아니게 돈을 받았습니다.

-김 차장은 이 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나고, 김 차장 당신은 내 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꾼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숙지하십시오!

폰에서 갑작스런 긴 침묵이 흘러나왔다.

-긴말하지 않을 테니 지금 당장 내 집으로 오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1시간 뒤, 김태섭이 내 집에 나타났다.

녀석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가볍게 목례를 취한 후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장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김태섭에게 냉랭한 어조를 내뱉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태섭이 내 눈치를 살피며 즉답했다.

“섬에 사람을 풀어서 한성철을 서울로 데리고 오는 게 어떻습니까?”

“한성철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김 차장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녀석이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솔직하게 말하죠. 나는 김 차장을 지검장 따위나 만드려고 서포트 하는 게 아닙니다.”

태섭이 은근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알아보니 지검장이 되어봤자 2년이나 3년 후엔, 알아서 퇴임해야 하더군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우리 김태섭 차장 검사님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일이 뭘까? 하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결과 우리 김 차장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직위는 국회의원이라고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어요. 내 판단이 틀린 겁니까?”

녀석이 감동한 얼굴로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조아렸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태섭은 허리를 반으로 접은 그 상태를 꿋꿋이 유지하고 있었다.

녀석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나직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김 차장을 정치판의 거물로 키우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만한 재력이 있기 때문이죠.”

녀석이 격동한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짓, 금 배지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돈만 처먹이면 개나 소나 달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 절대충성을 맹세한다면 김 차장이 원할 때까지 금 배지를 달아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태섭의 반으로 접혀 있는 허리를 친절하게 곧게 펴줬다.

녀석의 두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이 영롱하게 맺혀 있었다.

“말씀만 들어도 너무 감사한 심경입니다. 회장님.”

“벌써 감격하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김 차장과 같이 가고 싶으니까. 암튼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김 차장을 더 높은 곳으로 확실히 밀어드릴 생각입니다.”

태섭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더 높은 곳이라면······? 설마······? 대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온몸을 들썩이며 내 발밑에 털석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회장님에게 죽을 때까지 분골쇄신하는 자세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회장님.”

태섭이 목 놓아 부르짖었다.

구구절절한 충성 서약이었다.

내 발밑에 무릎 꿇은 녀석을 오연히 내려다보며 주의사항을 차분히 전달했다.

“김 차장이 나와 오래 가려면 이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려주시면 앞으로 회장님의 심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철저히 따르겠습니다.”

“나는 누가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걸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아까 전에 김 차장은 나에게 명령조의 어투를 구사했어요. 인정하십니까?”

녀석이 송구한 얼굴로 사죄의 변을 토해냈다.

“생각해 보니 회장님 말씀대로 제가 감히 명령조의 어투를 사용한 거 같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시정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나에게 명령조의 어투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마음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회장님.”

태섭은 내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녀석을 정치판의 거물로 키우는 건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탓인지 태섭은 나에게 절대 충성을 서슴없이 맹세했다.

이제 내가 그의 충성 서약에 보답할 차례였다.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의 서랍을 열자 양도성 예금증서 수십여 장이 보였다.

액면가 1억 원에 상당하는 증서였다.

대충 열 장을 집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그만 이쪽으로 오시죠.”

내 명이 떨어지자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태섭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책상 위에 펼쳐진 양도성 예금증서를 홀린 듯 들여다봤다.

“모두 10억이니까 알아서 챙기세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받으세요.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럼 염치불구하고 회장님의 선물을 받겠습니다.”

태섭은 그리 화답하며 양도증서를 상의 주머니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녀석은 작별인사를 올린 뒤 바지 주머니에서 허름한 핸드폰을 꺼내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죠?”

“대포폰입니다. 뒤가 털릴 염려가 없으니까 앞으로는 대포폰을 이용하심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일리가 있네요. 하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태섭은 재차 정중히 작별인사를 고한 뒤 내 집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상 서랍 안에 있는 대포폰을 집어 들었다.

태섭이 어젯밤에 건네준 폰이었다.

곧바로 강태호의 대포폰으로 연락을 넣었다.

수화기에서 태호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녀석답지 않게 사자성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인사는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한 가지 청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속 편히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섬에 내려가서 한성철의 동태를 살피고 오세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잘 알면서 뭘 물어요? 지금 당장 섬으로 내려가세요.

-죄송하지만 제가 서울에서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서······.

돈 달라는 얘기였다.

-넉넉하게 챙겨줄 테니 서두르십시오.

그제야 태호의 믿음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

태호는 부하들을 대동한 채 남해 인근의 섬을 내방했다.

그는 염전주의 환대를 받으며 염전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한성철을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성철은 염전에 내려온 지 1년 만에 피골이 상접한 중노인으로 전락했다.

그 정도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탓이었다.

태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리어 비릿한 조소만이 그의 입가에 내걸렸을 뿐이었다.

그는 재벌 3세를 타이틀 삼아 수많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그녀들을 마약에 미친 창녀로 만든 한성철을 뼛속 깊이 증오했다.

태호는 다른 건 다 용서해도 힘없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범죄행위를 일삼는 밤죄자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성철을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태호에겐 그만한 권한이 없었다.

얼마 후, 그는 부하들과 함께 섬을 벗어났다.

***

드라마 제작 문제로 김용대 국장과 회사에서 협의를 나눌 무렵,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대포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김용대를 내보낸 뒤 대포폰을 귓가에 가져가자 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성철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몸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더군요.

-그놈을 서울로 데리고 오세요.

-네에······?

수화기에서 태호의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장님. 염전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입니다.

-한성철을 빼내는 게 그리 힘든 겁니까?

-네. 염전 업주와 섬 주민, 경찰 등이 한통속이라 도저히 엄두가 안 납니다.

-쓸만 한 방법이 없을까요?

-한성철을 뭐하러 빼 오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이제 그놈도 고생할 만큼 했으니, 사회로 돌려보내야죠.

-죄송하지만 이번 일은 제가 해결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태호의 입에서 자신감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할 수 없네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번 일에서 신경을 끊으세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강 사장의 계좌로 수고비를 넣어드릴 테니까 그런 줄 아시고.

-거듭 송구합니다. 회장님.

-다음에 잘하면 되죠.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날 저녁.

김태섭을 강남 인근의 일식당 룸으로 불러들였다.

룸에 들어가자마자 태섭에게 본론을 꺼냈다.

“한성철을 섬에서 빼내려면 공권력이 필요해요.”

“그럴 겁니다. 남해의 외딴섬은 대다수 치안부재 지역이거든요.”

“현지 경찰들과 섬 주민들이 염전주와 한통속이라 김 차장이 직접 손을 쓰는 게 최선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문제보다는, 한성철의 입단속이 필수적입니다.”

김 차장의 말대로 한성철이 허튼짓을 하면 골치가 아파질 게 명약관화했다.

“김 차장이 알아듣게 단도리를 치세요.”

녀석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잔에 술을 따랐다.

“그놈의 집에서 압수한 마약과 몰래카메라로 아가리에 재갈을 물리세요.”

태섭이 화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회장님.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녀석이 따라준 정종을 원샷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일이 있으니, 나 먼저 갑니다.”

“살펴 가십시오. 회장님.”

태섭은 그리 말하며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

전경을 대동한 서울 광수대 경찰들이 남해의 외딴섬을 급습했다.

그들은 염전주를 인신매매와 노동착취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했다.

더불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염전노예들을 서울로 데리고 왔다.

그중에는 재벌가 3세인 한성철도 포함되었다.

서울 모처의 컨테이너.

성철은 어두컴컴한 컨테이너 안에서 철제 의자에 온몸이 결박당한 상태였다.

그는 눈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양복 차림의 남자를 두려운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양복 남자의 무거운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네놈의 집에서 대량의 히로뽕과 헤로인, 대마초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선량한 여성들을 강간하는 영상 또한 다수 확보했다.”

성철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단 한마디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입가에 두터운 청테이프가 둘러쳐진 탓이었다.

“너를 염전에 넘긴 사람들에 대해서 이 시간 이후로 일체 신경을 쓰지 마라. 만에 하나라도 그들에게 수작을 건다면.”

태섭은 중간에 말을 끊으며 겁에 질린 성철의 두 눈을 매섭게 노려봤다.

직후 날 서린 언사를 쏟아냈다.

“대량의 마약과 강간 동영상 등의 범죄 증거물들을 근거로 내가 책임지고 네놈을 교도소로 보내주마!”

성철은 온몸을 버둥거리며 공포에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태섭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태섭은 컨테이너를 나서며 문 옆에 서 있는 검찰 수사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한성철을 풀어줘.”

“넵. 검사님.“

< O2 아레나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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