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박 1 >
트램프의 부동산 개발회사는 HBC 은행의 TS 인베스트먼트 계좌로 빌딩매각 대금을 연일 입금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TS 인베스트먼트의 계좌 잔고는 거의 160억 달러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한화로 환산할 경우 2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세금 따위는 일체 내지 않았다.
치외법권인 외국계 자본의 탈을 쓴 까닭이었다.
한국 정부는 IMF의 달러를 차입하는 대가로 외국계 자본에 대해서 일체의 세금을 면제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이제 내 소유의 건물은 논현동 인근의 빌딩 서너 채와 강남역 주변의 업무용 빌딩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조만간 모조리 매각할 계획이었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였다.
특히 외국계 자본의 탈을 쓸 경우 한국 땅에서 돈을 버는 건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다.
***
휴일을 맞아 명우를 동네 헬스장으로 불러들였다.
우리는 러닝머신을 같이 뛰며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나누기 시작했다.
명우는 비처럼 쏟아지는 땀을 수건으로 훔치며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영화 제작자들이랑 자주 만난다며?”
“그런 얘기를 어디에서 들었냐?”
“주 실장이 그러던데.”
“그 인간, 보기보다 입이 더럽게 싸네.”
“암튼 그 자리에 나도 끼워주라.”
“왜?”
“대박 엔터에 소속된 배우들을 키워야 할 거 아니냐?”
“대박 엔터에 소속된 배우들이 총 몇 명이지?”
“초원이랑 소민이를 포함해서 14명이다.”
“언제 그렇게 많이 끌어들인 거야?”
“내가 명색이 대박 엔터 사장인데 그 정도 권한도 없냐?”
명우의 입에서 가시 돋친 힐난이 튀어나왔다.
“대주주면 대주주답게, 대박엔터에 소속된 배우들을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거 아니냐?”
“형이 요즘 일이 바빠서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니가 좀 이해해라.”
“말로만 그러지 말고 확실하게 밀어달라고. 돈도 억수로 많으면서 왜 그렇게 쫀쫀하게 구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니가 투자하는 영화에 김우철을 비중 있는 조연으로 꽂아줘.”
“김우철이 누군데?”
“이번에 영입한 유망주.”
“일단 실물이나 보자.”
“관심 있냐?”
“그러니까 어여 불러봐라.”
“오케이.”
명우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십 분 뒤 20대 초반의 훤칠한 청년이 헬스장에 나타났다.
녀석은 나와 명우를 발견하자마자 허리를 절반으로 접으며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신인 배우 김우철입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님.”
“내가 누군지 아나?”
“넵. 대박 엔터의 실질적인 수장이시고, 드림 케이블 방송사의 회장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명우가 나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언질을 한 모양이었다.
“얼굴도 훈남 스타일이고, 체격도 좋고 팔다리도 길쭉길쭉하게 잘 빠졌네.”
우철이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렇지만 배우로 성공하려면 발성과 화면장악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우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조했다.
“연기 경력이 있냐?”
“학원에서 연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연기를 공부한 지 얼마나 됐지?”
“1년 반 정도 됐습니다.”
“그럼 어느 정도 연기를 하겠구만.”
그때, 명우가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발성이랑 표정 연기가 보통이 아니라니까. 그래서 너한테 김우철을 추천한 거라고.”
“알았으니까 너는 좀 빠져라.”
그러자 녀석이 삐진 얼굴로 헬스장 구석에 놓여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우철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녀석은 정석적인 미남이라기보다 부담 없는 훈남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체격이 너무 좋았다.
187cm 남짓한 큰 키와 길쭉한 팔다리가 요즘 여자들한테 충분히 먹힐 만한 비주얼이었다.
우철을 돌려보낸 후 명우에게 속내를 밝혔다.
“영화 보다는 드라마에 먼저 출연시키는 게 좋아 보이는데, 네 생각은 어때?”
“드라마에 꽂는 게 만만치 않잖아.”
“그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시켜 봤자 반응이 올 거 같지 않은데······?”
명우는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녀석은 케이블 드라마를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공중파의 비중 있는 조연.”
녀석은 큰 걸 바라고 있었다.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요구였다.
“너도 알다시피 공중파에서 쓸만 한 배역을 따내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러니까 돈 많은 너한테 부탁하는 거잖아.”
명우가 간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 김우철을 확실히 키울 자신이 있냐?”
“네가 서포트만 제대로 해주면 틀림없이 반응이 온다니까.”
“알았다. 생각 좀 해보자.”
“생각만 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팍팍 좀 밀어주라. 친구야.”
“알았다니까. 보채지 좀 마라. 일이라는 건 절차가 있는 거니까.”
명우를 뒤로 한 채 헬스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집에 도착한 뒤 NBS 방송국의 유한성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책임피디로 승진한 상태였다.
드라마국 부국장 레벨이었다.
수화기에서 유한성의 간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네요.
녀석은 내가 방송가의 거물로 등극하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내 사람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유 피디에게 부탁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회장님의 부탁이라면 끓는 물 속이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헤헤헤······.
폰에서 유한성의 헤픈 웃음소리가 거북스럽게 들려왔다.
-내가 김우철이란 유망주를 키우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유 피디가 쓸만 한 배역을 알선해 주셨으면 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회장님. 제가 책임지고 뜰만한 배역을 따내겠습니다.
-그럼 수고를 해주세요. 그리고 조만간 술이나 같이 합시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한달음에 달려가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내일 밤 8시경에 하얏트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이나 같이합시다.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겠습니다. 회장님.
***
다음날.
회사에서 업무를 끝마친 뒤 수행원을 대동한 채 하얏트 호텔 강남점을 내방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창가 테이블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유한성이 보였다.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주 실장에게 내 의중을 전달했다.
“아무 자리나 앉아서 저녁식사를 하세요.”
“넵. 회장님.”
주 실장은 허리를 깊숙이 조아린 뒤 경호원들과 함께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창가 테이블로 다가가자 유한성이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인사는 됐고, 스테이크나 같이 합시다.”
“네. 회장님.”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바싹 태운 등심 스테이크와 단맛이 강한 샴페인을 갖다 주세요.”
“네. 고객님.”
우리는 맛 좋은 스테이크와 달달한 샴페인으로 배를 채우며 서로 간의 근황에 대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그러기를 얼마 후 본격적인 대화에 돌입했다.
“대박 엔터 소속 배우들에게 편의를 좀 봐주세요.”
유 피다가 은근한 얼굴로 반문했다.
“대박엔터가 회장님과 관련된 곳인가요?”
“일종의 자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내 친구 놈이 대표 자리를 맡고 있지만 실제 회사 주인은 바로 접니다.”
“아······! 그러시구나.”
“지금은 배우들로 진용을 짰지만 조만간 아이돌 그룹도 대대적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아이돌 그룹을 론칭하려면 제작비가 많이 소요될 겁니다.”
“그 정도야 각오해야죠.”
유 피디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직후 간절한 얼굴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제 일평생 소원이 쓸만 한 영화를 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세요. 하실 말이 뭡니까?”
“그럼 속 시원히 말하겠습니다. 제가 조만간 영화를 제작할 계획입니다.”
“방송사를 퇴사할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님.”
“영화제작은 그리 만만하게 아닙니다. 자본금도 많아야 할 뿐 아니라 막상 영화를 제작했더라도 상영관을 잡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그래서 회장님에게 이렇게 청을 넣는 거 아니겠습니까?”
유한성은 나에게 딜을 넣고 있었다.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할 생각이죠?”
“일단 그전에 제가 만든 시나리오를 한번 보십시오.”
한성은 그리 말하며 서류가방에서 두툼한 책자를 꺼내서 내 손에 공손히 건넸다.
그가 건넨 대본을 대충 쓰윽 훑었다.
첫 장에 주요 줄거리가 적힌 관계로 대본을 파악하는 데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폭 가문을 희화한 영환가요?”
“네. 일반적인 잔인한 조폭물 대신 개그적인 요소를 삽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투자를 전담하는 담당자에게 유 피디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라고 언질을 넣겠습니다.”
그러자 한성이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직후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조아린 채 감사의 변을 토해냈다.
“회장님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내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그려졌다.
아직 투자 얘기도 꺼내지 않았건만, 그는 김칫국물을 거하게 마신 모양새였다.
“일단 앉으세요. 이제 내가 부탁한 문제에 관해서 대화를 나눠봅시다.”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한성은 자리에 공손히 앉으며 서류가방에서 얄팍한 시나리오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죠?”
“내년 초에 NBS 방송국에서 방영 예정인 주중 미니시리즈입니다.”
“내용을 말해 보세요.”
“아름다운 여선생님과 고등학생 남주의 풋풋한 첫사랑을 다룬 작품이죠.”
내용은 그럴듯했다.
여성 시청자들에게 먹힐 만한 스토리였다.
“남주가 정해졌나요?”
“남주는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할 예정입니다.”
“오디션 책임자가 누구죠?”
“저와 드라마국 국장인 장태현, 방송사 대표인 박기춘입니다.”
“장태현과 박기춘은 어떤 사람들이죠?”
유한성의 입에서 적나라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두 놈 모두 돈과 여자에 환장한 속물 중의 속물입니다.”
차라리 잘 된 심경이었다.
“얼마를 전달해야 할까요?”
“남주니까 최소 3억 이상은 건네셔야 할 겁니다.”
“각자에게 1억 5천씩 주면 되는 건가요?”
“국장은 1억 5천이면 충분해 보이고 박기춘 사장에겐 2억 원 정도를 건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하죠. 그러니 두 사람과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끝마친 뒤 인근에 위치한 성심 빌딩으로 넘어갔다.
대박 엔터는 성심 빌딩의 1층 부터 4층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성심 빌딩 역시 내 소유의 업무용 건물이었다.
나는 이 건물을 끝까지 보유할 생각이었다.
대박 엔터의 사옥으로 오래전부터 낙점한 탓이었다.
4층에 위치한 대표실에 들어가자 이쁘장한 여비서와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명우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여비서들과 놀아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타고나기를 그리 타고난 모양이었다.
여비서가 수줍은 얼굴로 급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사무실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런 모습에 명우가 입맛을 다시며 나를 힐난하는 눈초리를 내비쳤다.
“연락도 없이 남의 사무실에는 뭐 하러 온 거야!”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다.
고용 사장 주제에 회사의 오너 알기를 개똥으로 아는 모양새였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에라이 개자식아. 하라는 일은 안 하고, 허구한 날 여비서랑 물고 빠는데 환장했냐!”
“남이사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인데.”
“에휴······ 말을 말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푹신한 소파에 털석 주저앉았다.
아무 말 말이 담배 연기만 자욱하게 말아올리자 명우가 궁금한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고. 뜸 들이지 말고.”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얄팍한 시나리오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툭 내던지자 녀석이 기대만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게 뭐냐?”
“묻지 말고 시나리오나 살펴봐. 마음에 들면 연락하고.”
그러자 녀석이 홀린 듯한 얼굴로 시나리오에 시선을 고정했다.
< 대박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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