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치마킹 2 >
2002년 새해가 밝아왔다.
금년에는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지자체 선거, 대통령 선거 등이 줄줄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런 탓인지 사회 분위기가 그 어느 때 보다 들떠 있었다.
물론 내가 알 바 아니었다.
***
소민을 대동한 채 북해도 스키장을 내방했다.
신년 새해를 오붓하게 보내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북해도의 아름다운 설경을 즐기며 그림 같은 스키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뒤 인근의 온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천에서 심신의 피로를 해소한 우리는 시내에 위치한 제국 호텔 스위트룸에 여장을 풀었다.
소민과 함께 2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웨이터에게 프랑스 정식을 주문한 뒤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촬영은 언제부터 하는 거야?”
“다음 달 3일부터 촬영에 들어갈 거 같아요.”
그녀는 내 덕분에 공중파의 비중 있는 조연 배역을 따냈다.
당연히 억대의 금품을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지급했음은 불문가지였다.
“회사는 마음에 들어?”
소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예. 김 사장님도 잘 해주시고 방 실장님도 저한테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좋아요.”
“명우는 내 친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불편한 거 있으면 확실하게 말해.”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포시 숙이자 눈처럼 새하얀 보드라운 목덜미가 망막가득 스며들었다.
언제봐도 사내를 유혹하는 아찔한 목덜미였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19층 회의실로 들어가자 방송사 간부들과 재무실장이 나를 향해 90도 각도로 허리를 접었다.
그들의 정중한 인사를 본체만체하며 상석에 좌정한 뒤 나직한 목소리로 모두발언을 토해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방안을 발표해 보십시오.”
내 모두발언이 떨어지자마자 재무실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아시다시피 우리 드림 케이블은 금년에 600억에 달하는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시청률은 답보상태에 빠진 탓에 광고수익마저 답보상태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 얘기니까 요점만 말하십시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럼 본론만 말씀 올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재무실장의 입에서 작심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드림 케이블이 전년도에 비해 금년에 적자 폭이 대폭 늘어난 까닭은 순전히 드라마국 때문입니다. 드라마국에서 돼도 않는 드라마를 제작한다며 수십, 수백억을 쏟아부은 탓에 드림 케이블의 경영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습니다.”
순간 김용대 드라마국장이 분노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건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의 일환입니다. 재무실장님은 투자의 개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공부하고 오십시오!”
김용대가 성난 언사를 토해내자 재무실장이 찔끔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슬며시 주저앉았다.
그때, 용대의 격앙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드림 케이블의 앞날을 위해서는 히트 드라마를 반드시 자체 제작해야 합니다. 눈앞의 적자가 두렵다고 드라마 제작을 소홀히 여긴다면 드림 케이블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할 겁니다.”
용대는 좌중을 휘 둘러본 뒤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솔직히 재무실장이 이런 회의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드림 케이블은 대한민국의 방송산업과 문화를 선도하는 기업이라고 자부합니다.”
녀석의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회장님에게 감히 조언을 올리고자 합니다.”
“할 말이 뭐죠?”
용대가 내 두 눈을 직시하며 차분히 답변했다.
“다음 회의부터 재무실장의 참석을 원천적으로 불허해 주십시오. 모든 걸 돈으로 판단하는 재무실장이 회의에 참가한다면 건설적인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회의실에 갑작스런 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김용대의 방정맞은 입이 문제의 근원지였다.
재무실장이 앙앙불락한 얼굴로 용대를 매섭게 노려본 뒤 나를 향해 구원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용대는 주제넘게 내 권한을 침범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확실히 이 자식은 문제가 많은 놈이었다.
회사 오너에게 곧이곧대로 들이대는 모양새였다.
녀석은 고위 간부들 앞에서 일종의 하극상을 자행하고 있었다.
허나. 용대는 방송국에 필요한 인물이었다.
지금은 해고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 대놓고 하극상을 자행한 녀석을 수수방관 한다면 내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질 것이 명약관화했다.
뭔가 따끔하게 혼구녕을 낼 필요성이 있었다.
내 입에서 날 서린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김용대 국장은 가만 보면 간뎅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 같아요. 회장님 알기를 길가를 돌아다니는 똥개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단 말이죠.”
가시 돋친 언사를 토해내자 녀석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눈치챘는지 이마에 식은땀을 흘려보내며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이성을 상실했나 봅니다. 그러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은 맨날 그래요. 순간적으로 욱하는 성미. 그거 병입니다. 제발 고치세요.”
“넵.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나한테 그러지 말고 재무실장한테 사과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결국 용대는 겸연쩍은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재무실장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의 변을 쏟아냈다.
“미안합니다. 재무실장님. 제가 주제넘게 감 놔라 배 놔라 한 거 같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 자신을 단단히 추스르겠습니다.”
“좋습니다. 회장님을 봐서 이번 한 번만 김 국장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차후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업신여기는 처신을 한다면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재무실장님.”
회의 초장부터 김용대 때문에 분위기가 잡쳐 버렸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하는 게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결국 옆자리에 배석한 장준기 전무에게 회의 진행을 맡긴 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용대를 회장실로 불러들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녀석에게 매서운 일갈을 터트렸다.
“한 번만 더 주제넘게 입을 놀린다면 당신을 무조건 직위해제 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용대가 송구한 얼굴로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죄송합니다.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
“재무실장은 드라마국의 방만한 제작 시스템에 연일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요. 나 역시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제작하려면 어느 정도 돈이 샐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바닥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김 국장이 책임지고 회삿돈을 빼먹는 놈들을 단속해야 할 거 아닙니까!”
목소리를 높이자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 부하 직원들을 철저히 단도리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 문제는 여기에서 끝내고, 다른 얘기를 해봅시다. 차기작으로 로맨스 드라마를 제작하십시오.”
그러자 용대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장르 드라마 제작을 접으실 생각입니까?”
“생각해 봤는데 한국은 장르물을 소화할 만한 여건이 아니에요. 시청자들의 수준이 낮아요.”
“그래도 장르물에 도전하는 게 앞날을 위해서 좋습니다.”
“암튼 내 말대로 로맨스물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여주는 김소민으로 정하고 남주는 김우철로 확정하세요.”
“모두 대박 엔터 소속 아닙니까?”
“본격적으로 우리 애들을 키워봅시다. 그럼 이만 나가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용대를 회장실에서 내보냈다.
***
병역 브로커 권대훈이 민진당 당사에서 폭로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맨들의 플래쉬 세례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기자들을 대상으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한국당의 이해창 대표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장남인 이정훈 씨는 체중을 부정하게 조작하는 방법으로 군복무를 면제받았습니다.
기자들은 두 눈을 번뜩이며 노트북과 수첩에 권대훈의 말을 담는데 전심전력했다.
-제 손에 들린 서류가 증겁니다. 이 서류에는 이정훈 씨가 부정한 약물을 이용해서 체중을 의도적으로 끌어내렸다는 내과 전문의의 소견서가 담겨 있습니다.
기자들의 얼굴이 흥분에 휩싸였다.
덩달아 그들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기자분들에게 솔직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정훈 씨에게 불법약물을 소개한 장본인이 바로 접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폭로 기자회견을 여는 겁니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장내에 배석한 민진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의 입에서 격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회사를 파하자마자 약속장소인 타워필리스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타워필리스는 삼송건설이 심혈을 기울여 완공한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그들은 뉴욕의 트램프 타워에 버금가는 초호화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았다.
일단 그럴듯한 명품 샵들이 전무했다.
트램프 타워에는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명품 샵들이 우후죽순으로 널려 있었지만 타워필리스는 고작해야 촌티 펄펄나는 국내산 브랜드 업체들만 드문드문 입점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조망권도 형편없었다.
앞에는 강남 빌딩 숲이 있는 탓에 나름 쓸 만한 조망권이 형성됐지만 문제는 건물 뒤편이었다.
타워필리스 인근에는 구룡마을이란 판자촌이 길게 널려 있었다.
더구나 그곳은 소유권 분쟁이 극심한 동네라 단시일에 정비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타워필리스의 외관을 나름 면밀히 분석한 후 정실장과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a동 건물로 들어갔다.
정실장이 타워필리스 측 보안관계자에게 내 신분을 알리자 그가 공손한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김민용 전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앞장서세요.”
“네. 회장님.”
보안요원은 우리 일행을 펜트하우스로 이끌었다.
수행원들을 문밖에 대기시킨 뒤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자 김민용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피아가 나를 맞이했다.
그들과 인사를 교환한 뒤 펜트하우스 내부를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그때. 민용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집은 마음에 드냐?”
“내부 인테리어는 괜찮은데 조망권이 영 별로다.”
솔직히 답하자 녀석의 얼굴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네 말대로 뷰가 안 좋아서 건설 초기부터 말이 많았어.”
“한강이 조망되는 곳에 건설하지, 뭐 하러 이런 구린 동네에 주상복합을 건설한 거냐?”
“IMF 전이라 땅값이 비쌌거든. 그래서 할 수 없이 도곡동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조망권이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암튼 펜트하우스 4채로 부채를 탕감하는 게 어때?”
“좀 생각해 보고.”
“아직도 결정을 못 한 거야?”
“기다려봐라. 보채지 말고.”
나 홀로 창가를 서성이는 소피아를 슬쩍 쳐다본 뒤 민용을 향해 넌지시 운을 뗐다.
“그런데 너희 커플은 언제 결혼할 생각이냐?”
내 질문에 녀석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허락하셨는데, 엄마가 하도 난리를 쳐서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반대하는 이유가 뭔데?”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 며느리가 싫데.”
“어머니가 영어를 못하시냐?”
“응. 영어에 젬병이셔. 그래서 더욱 그런 거 같다.”
녀석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내걸렸다.
***
늦은 밤, 청와대 관저
김대주 대통령은 수심이 깊은 얼굴로 청와대의 너른 경내를 힘겹게 산책하고 있었다.
그 무렵, 장내에 박노갑 고문이 나타났다.
“형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석에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할 말이 뭔가?”
“금년 대선에 관해서 긴히 여쭐 말이 있습니다.”
김대주의 얼굴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박노갑은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김인제는 이해창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하루빨리 말을 갈아타셔야 합니다.”
“또 그 얘긴가!”
김대주의 입에서 짜증이 묻어나왔다.
허나. 박노갑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재차 드러내 보였다.
“경남 출신의 차무연을 이해창의 대항마로 만든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형님!”
박노갑은 그리 말하며 김대주의 두 눈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 벤치마킹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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